사라지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진입 경로’일지도 모른다
AI가 노동을 바꾸는 방식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고, 동시에 훨씬 깊다. 어느 날 갑자기 특정 직업이 사라지는 식의 변화보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그 직업 안에 들어 있던 개별 과업들의 재배치다. 반복적이고 표준화된 업무, 문서화된 판단, 일정한 형식을 가진 기록과 분석부터 AI가 스며들기 시작하고, 그 결과 직업 전체보다 먼저 흔들리는 것은 사람들의 경력 경로와 진입 구조가 된다. 스탠퍼드 인간중심AI연구소의 AI Index 2026이 노동시장 장면에서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변화다. AI는 채용 수요를 만들고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가장 젊고 가장 초기에 있는 노동자들의 자리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시장이 지금 단순한 축소나 확대의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재편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AI 관련 채용 수요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늘어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22세에서 25세 사이 소프트웨어 개발자 고용이 2022년 정점 이후 하락해 2025년 9월에는 약 20% 가까이 낮아진 것으로 나타난다. 겉으로 보면 AI 일자리는 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 일자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더 좁아지고 있는 셈이다. 이 모순은 우연이 아니다. AI가 사람의 일을 덜어주는 기술인 동시에, 사람을 뽑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기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AI 채용 수요의 확대만 놓고 보면 지금의 노동시장은 분명 호황의 얼굴을 하고 있다. Lightcast 자료를 바탕으로 한 AI Index 2026에 따르면 2025년에도 여러 국가에서 AI 스킬을 요구하는 구인공고 비중은 꾸준히 높아졌다. 싱가포르는 전체 구인공고 가운데 4.69%가 AI 스킬을 요구해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고, 미국도 2.56%까지 올라왔다. 미국 내부를 들여다보면 AI와 머신러닝은 여전히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스킬 군이었고, Python은 25만 건이 넘는 공고에 등장했다. AWS, 확장성, 자동화, 워크플로 관리처럼 AI를 실제 서비스와 시스템 안에 구현하고 운영하기 위한 기술 수요 역시 크게 늘었다. 기업들이 이제 AI를 “알아야 하는 기술”이 아니라 “굴려야 하는 시스템”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장면은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트형 AI로의 이동이다. 2025년 미국 채용공고에서는 생성형 AI 관련 스킬 언급이 전년 대비 111% 증가했지만, 전체 AI 채용공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소폭 줄었다. 반면 에이전트형 AI, AI agents, agentic systems, LangGraph 같은 표현이 포함된 공고는 급격히 늘었다. 이는 기업들이 더 이상 단순히 챗봇이나 텍스트 생성 도구를 다루는 사람을 찾는 데 머물지 않고, 여러 도구와 모델을 연결해 실제 업무 흐름을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채용시장의 중심이 “AI를 써본 사람”에서 “AI를 일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요구되는 기술 수준이 높아질수록, 노동시장 초입에 있는 사람들은 더 불리해진다. 기업이 원하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입문 수준의 코딩 능력이나 기초적인 툴 사용 경험이 아니다. 데이터 흐름을 이해하고, API와 워크플로를 연결하고, 사람이 하던 절차를 AI 기반 시스템으로 다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는 숙련된 인력에게는 기회가 되지만, 막 진입하려는 사람에게는 곧바로 장벽이 된다. 그래서 AI 시대의 노동시장에서는 “새로운 일이 생긴다”는 말이 곧바로 “새로운 사람에게 기회가 열린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 Index 2026의 가장 불편한 데이터가 등장한다. 보고서는 미국에서 22세에서 25세 사이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고객지원 인력의 고용이 2022년 이후 약세를 보였고, 특히 AI 노출도가 높은 직군에서 초기 경력층의 감소폭이 더 두드러졌다고 설명한다. 22세에서 25세 사이 노동자만 따로 보면, AI 노출도가 높은 직업군의 고용은 AI 노출도가 낮은 직업군에 비해 약 16% 더 낮은 수준으로 움직였다. 이 흐름은 경기침체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금리, 업황, 채용 조정 같은 일반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더라도, AI 노출도가 높은 직군에서 초기 경력층이 더 취약한 모습은 별도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데이터가 말해주는 것은 단순한 청년층 고용 감소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AI는 가장 먼저 초급 경력의 사다리를 흔들고 있다. 과거에는 소프트웨어 개발이든, 분석이든, 행정이든, 연구든, 어느 정도 반복적이고 기본적인 업무를 맡으면서 경험을 쌓고 중간 수준의 숙련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존재했다. 그런데 AI가 바로 그 기초 단계의 업무를 빠르게 덜어내기 시작하면, 조직은 더 적은 초급 인력으로도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한 사람당 생산성이 올라가면 신규 채용의 필요가 줄고, 그 결과 가장 먼저 줄어드는 것은 조직 전체의 고급 인력이 아니라 초급 인력의 진입 문이다. AI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가장 큰 충격은 일자리 총량보다도, 전문가로 성장하는 경로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미시적 생산성 연구에서는 AI가 경험이 적은 노동자에게 더 큰 도움을 준다는 결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객지원 분야에서는 대화형 AI를 사용한 상담원이 시간당 해결 건수를 14%에서 15% 높였고, 그 효과는 숙련이 낮은 상담원에게서 더 크게 나타났다. GitHub Copilot을 사용한 개발자들은 완료한 풀리퀘스트 수가 늘었고, 일부 연구에서는 주니어 개발자일수록 더 큰 생산성 향상을 보였다. 마케팅이나 회계처럼 일정한 절차를 가진 분야에서도 AI는 반복적 과업을 빠르게 처리하면서 사람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즉 AI는 분명히 초급 인력의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런데 실제 노동시장에서는 바로 그 초급 인력의 채용이 줄어든다. AI가 사람을 더 유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사람의 필요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Index 2026이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꺼내는 표현이 “seniority-biased technological change”다. 기술 변화가 모든 사람을 고르게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숙련된 인력과 진입 초기 인력에게 더 먼저 충격을 준다는 뜻이다. 이전의 자동화가 반복적인 제조업 일자리를 먼저 흔들었다면, 지금의 AI는 지식노동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표준화된 초급 과업부터 건드리고 있다. 이는 노동시장의 위기가 반드시 대규모 실업이라는 형태로 먼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청년층과 초급 인력이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잃는 방식으로 변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당장 실업률은 크게 오르지 않을 수 있어도, 몇 년 뒤 중간 숙련 인력이 부족해지는 구조적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이 변화는 소프트웨어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AI Index 2026이 올해 특히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의료 현장에서의 업무 재편이다. 2025년 임상 영역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된 AI 도구는 진단 AI보다도, 의사와 환자의 대화를 자동으로 기록해 문서화하는 ambient AI documentation 시스템이었다. 이 도구들은 의사가 직접 입력하던 진료 기록을 실시간 음성 인식과 생성형 AI를 결합해 자동 작성해주고, 그 결과 의료진은 문서 업무에 쓰던 시간을 줄이고 환자와의 상호작용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됐다. 여러 병원 시스템에서 기록 시간 감소, 인지 부하 감소, 번아웃 완화, 환자 응대 집중도 향상 같은 효과가 보고됐다. AI는 의사를 대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의 하루를 구성하던 가장 반복적이고 표준화된 과업부터 먼저 바꾸고 있었다. 이 장면은 AI가 노동을 바꾸는 방식을 아주 잘 보여준다. 많은 사람이 AI가 의료 현장에 들어오면 먼저 진단 자체를 대체할 것이라고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환자와 마주 앉아 있는 의사의 진단 권한보다 그 뒤에 쌓여 있던 행정·기록·문서화 업무가 먼저 흔들렸다. 즉 AI는 직업의 핵심 정체성을 단번에 지우지 않는다. 대신 그 직업이 실제로 돌아가게 만드는 주변 과업들을 재배치한다. 그리고 이 재배치가 누적되면, 언젠가는 직업의 본체도 달라진다. 의사가 환자를 보는 시간보다 기록을 정리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의사의 가치와 병원의 운영 방식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과정이 곧바로 장밋빛 미래를 뜻하지는 않는다. 같은 보고서는 FDA가 2025년에 승인한 AI 기반 의료기기가 258건에 이르렀고 누적 승인 수가 1,357건을 넘었다고 정리하면서도, 실제 임상적 근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많은 기기가 기존 장비와의 실질적 동등성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들어오며, 무작위 임상시험 같은 강한 근거를 갖춘 사례는 여전히 적다. 다시 말해 의료 현장에서도 AI는 먼저 들어오고, 검증은 뒤따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들이 이 기술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AI가 가장 먼저 덜어주는 일이 바로 가장 피로하고 반복적이며 측정 가능한 업무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재편은 기술의 철학보다, 현장의 피로에서 먼저 시작된다.
연구실도 마찬가지다. AI Index 2026이 올해 처음으로 Science와 Medicine을 독립 장으로 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AI는 더 이상 사무직 보조도구나 소비자 서비스에 머물지 않고, 연구의 방식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2025년 과학 장은 AI가 단일 실험 단계나 문헌 정리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헌 탐색, 가설 생성, 실험 설계, 코드 실행, 데이터 분석까지 이어지는 연구 워크플로 전체를 다루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아직 최고의 AI 에이전트도 박사급 전문가 기준에는 크게 못 미치고, 실제 실험으로 검증된 사례는 많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진입의 방향이다. 연구실에서도 AI는 가장 먼저 “연구자라는 직업”을 없애기보다 “연구자가 하루를 보내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이 변화는 개발자, 의사, 연구자라는 서로 다른 직능을 하나의 공통된 문제로 묶는다. AI는 지금 전문가를 한꺼번에 대체하는 대신, 전문가가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초급 과업과 중간 절차를 먼저 바꾸고 있다. 코드를 짜는 사람에게는 기초적인 구현과 디버깅이, 의사에게는 기록과 정리가, 연구자에게는 문헌 요약과 초벌 분석이 먼저 재편된다. 그렇게 되면 “전문가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반복과 축적을 통해 숙련이 형성됐다면, 이제는 AI를 전제로 한 감독과 검증, 설계와 판단이 더 중요한 역량으로 떠오를 수 있다. 전문가는 손이 빠른 사람이 아니라, AI가 만들어낸 결과를 어디까지 신뢰하고 어디서 개입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으로 재정의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AI 시대의 노동 문제는 일자리가 늘어나느냐 줄어드느냐의 이분법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실제 변화는 더 복잡하다. 일부 과업은 빠르게 사라지고, 일부 과업은 더 중요해지며, 일부 과업은 아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변화는 모든 직종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표준화와 문서화가 많이 진행된 영역, 성과 측정이 쉬운 영역, 디지털 흔적이 풍부한 영역에서 더 먼저 나타난다. 그래서 AI의 노동 충격은 공장처럼 한눈에 보이는 곳보다 병원, 사무실, 연구실, 개발 조직처럼 겉보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지식노동 공간에서 더 먼저 누적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에 던지는 질문도 선명해진다. 한국이 고민해야 할 것은 단순히 AI 인재를 얼마나 더 길러낼 것인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AI가 초급 경력의 사다리를 약화시킬 때, 그 공백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다. 대학은 여전히 전통적인 숙련 축적 경로를 전제로 학생을 길러내고 있고, 기업은 즉시 투입 가능한 인력만을 더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병원과 연구기관 역시 AI가 덜어주는 업무를 반기면서도, 그 업무를 통해 형성되던 초기 숙련의 기능을 어떻게 대체할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AI 활용 교육이 아니라, AI 시대의 경력 경로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AI는 직업을 단숨에 없애지 않는다. 대신 직업 내부의 구조를 바꾸고, 그 구조 속에서 누가 먼저 기회를 얻고 누가 먼저 밀려나는지를 다시 정한다. 그래서 지금의 질문은 “몇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인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경로로 사람이 전문가가 되어왔고, 그 경로가 AI 시대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는가. AI가 가장 먼저 바꾸는 것은 일자리 총량이 아니라, 바로 그 경로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시장의 미래는 그 경로를 어떻게 다시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