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학점 학사 시대, 대학의 시간표가 다시 짜인다

미국 3년제 학위 확산이 던진 질문…AI 시대 대학은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3년제 학사학위 실험이 시작된다. 매사추세츠 고등교육위원회는 최근 메리맥 칼리지와 서포크대학교의 3년제 학사학위 시범과정을 승인했다. 두 대학은 2027년 가을학기부터 기존 4년제 학사학위와 다른 형태의 단축형 학사과정을 운영할 예정이다. 메리맥 칼리지는 심리학, 커뮤니케이션, 형사사법, 경영학 등 4개 분야에서 96학점 응용학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으며, 서포크대학교는 헬스케어 행정·혁신 분야의 94학점 응용학사 과정을 개설한다.

이 변화는 단순한 조기졸업 프로그램이 아니다. 기존 4년제 교육과정을 방학까지 활용해 3년에 몰아 듣는 방식도 아니다. 핵심은 학사학위의 기준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 학사학위의 오랜 표준이던 120학점 체제를 유지한 채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졸업에 필요한 총 이수학점을 90학점대까지 낮추고 교육과정을 다시 설계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대학이 학생에게 요구하는 ‘시간’과 ‘학점’의 총량을 줄이면서도, 학위가 보증해야 할 역량은 유지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려는 실험이다.

그동안 대학 학위는 일정한 시간을 전제로 했다. 한국에서 학사학위는 통상 4년, 미국에서도 학사학위는 4년과 120학점으로 인식돼 왔다. 학생은 정해진 기간 동안 캠퍼스에 머물며 전공과 교양을 이수하고, 일정 학점을 채우면 졸업했다. 그러나 등록금 부담, 학생 부채, 중도탈락, 학령인구 감소, 취업 연계 요구, 생성형 인공지능의 확산이 겹치면서 대학의 전통적 시간표가 흔들리고 있다. 이제 질문은 “학생이 몇 년을 다녔는가”에서 “학생이 졸업 시점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매사추세츠의 3년제 학위는 이 질문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인 사례다. 찬성 측은 학생이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빨리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비판 측은 학위 기간 단축이 대학 경험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학생은 기존 4년제 대학에서 교양, 탐색, 복수전공, 해외 경험, 네트워크를 누리고, 비용 부담이 큰 학생은 단기 취업형 학위로 몰리는 이중구조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3년제 학위는 그래서 단순한 학제 개편이 아니다. 대학이 학생에게 제공해야 할 교육의 본질을 다시 묻는 신호다. AI 시대에 대학은 더 빠른 졸업을 요구받고 있지만, 동시에 더 깊은 학습과 더 오래 지속되는 역량을 요구받고 있다. 이 모순된 압력 속에서 대학은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가.

4년을 3년에 압축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이번 시범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압축’이 아니라 ‘재설계’다. 기존 조기졸업은 학생이 학기당 더 많은 수업을 듣거나, 계절학기를 활용하거나, 고등학교 때 취득한 학점과 대학 학점을 합산해 졸업 시기를 앞당기는 방식이었다. 이 경우 졸업에 필요한 총학점은 그대로 유지된다. 학생이 더 많이 듣고 더 빠르게 움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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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그러나 메리맥 칼리지와 서포크대학교의 3년제 학위는 다르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 수 자체를 낮춘다. 120학점 안팎이던 학사학위 기준을 94~96학점 수준으로 줄인다. 이는 대학이 학생에게 요구하는 학습량의 총량을 다시 계산하겠다는 뜻이다. 어떤 과목은 남기고, 어떤 과목은 줄이며, 어떤 경험은 필수로 두고, 어떤 경험은 선택에서 제외할 것인지를 다시 판단해야 한다.

서포크대학교가 준비하는 헬스케어 행정·혁신 응용학사 과정은 보건의료 분야의 행정, 혁신, 조직운영 역량을 중심으로 설계됐다. 보스턴이라는 지역적 맥락도 작용한다. 보스턴은 병원, 바이오, 보건의료 산업이 밀집한 도시다. 대학 입장에서는 지역 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더 빠르게 양성한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다. 메리맥 칼리지의 96학점 응용학사 과정도 심리학, 커뮤니케이션, 형사사법, 경영학 등 직무 연계성이 비교적 뚜렷한 분야를 대상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줄어드는 것은 주로 자유선택 영역이다. 학생이 전공 바깥의 다양한 수업을 탐색하거나, 복수전공을 하거나, 해외연수를 다녀오거나, 전혀 다른 학문 분야를 경험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대학 측도 이를 인정한다. 3년제 학위는 자신의 진로가 비교적 분명하고, 특정 직업목표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려는 학생에게 적합한 경로라는 설명이다. 반대로 전공 탐색이 필요한 학생, 학문적 연구를 이어가려는 학생, 폭넓은 대학 경험을 원하는 학생에게는 기존 4년제 경로가 더 적합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3년제 학위는 학생 선택권 확대라는 얼굴과 대학 경험 축소라는 얼굴을 동시에 갖는다. 분명 일부 학생에게는 1년의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것이 실질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가족을 부양해야 하거나, 학자금 대출 부담이 크거나, 빨리 취업해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하는 학생에게 3년제 학위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 제도가 취약계층 학생에게만 집중된다면, 대학은 새로운 계층 분화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학위의 가격을 낮추는 일과 학위의 가치를 낮추는 일은 다르다. 3년제 학위의 성패는 바로 이 차이를 대학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

‘학위의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

3년제 학위가 등장한 배경에는 미국 고등교육의 비용 문제가 있다. 미국의 대학 등록금과 학생 부채 문제는 오랫동안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대학에 입학해도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고, 졸업하더라도 학위가 취업과 소득 상승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는 불신이 커졌다. 대학 학위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인식은 남아 있지만, 그 학위를 얻기 위해 4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 의문은 코로나19 이후 더 강해졌다. 온라인 수업과 비대면 교육을 경험한 학생들은 대학 교육의 가격과 실제 교육 경험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캠퍼스 생활, 교수와의 상호작용, 친구와의 관계, 동아리와 네트워크, 지역사회 경험까지 포함한 대학의 총체적 경험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면, 굳이 높은 등록금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됐다. 대학은 더 이상 ‘4년제 학위’라는 이름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여기에 생성형 AI가 새로운 압력을 더했다. AI는 학생의 학습 방식뿐 아니라 전공 선택과 진로 판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Gallup과 Lumina Foundation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학사과정 학생의 42%는 AI가 전공 변경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답했다. 전체 조사 대상 학생 중 16%는 AI의 영향을 고려해 이미 전공을 바꿨다고 응답했다. 학생들은 더 이상 “어떤 전공이 인기 있는가”만 묻지 않는다. “이 전공은 AI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졸업 후 첫 일자리가 AI로 대체되지는 않을까”, “내가 배우는 지식은 몇 년이나 유효할까”를 묻고 있다.

이는 대학에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대학은 전통적으로 현재의 직무기술만을 가르치는 기관이 아니었다. 대학은 특정 직업을 위한 훈련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고력, 시민성, 윤리, 의사소통, 문제해결력, 학문적 탐색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 정부와 기업은 점점 더 명확한 취업성과를 요구한다. AI 시대에는 그 압력이 더 커진다. 대학은 학생에게 “졸업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3년제 학위와 역량 중심 교육은 이 요구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정해진 시간 동안 강의실에 앉아 있었는지가 아니라, 학생이 실제로 어떤 역량을 갖췄는지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출석과 학점의 누적이 아니라 결과와 수행의 입증을 중심으로 학위를 설계하자는 것이다. 이는 고등교육의 오래된 원칙을 흔든다. 학위의 기준을 투입에서 산출로 옮기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출 중심의 언어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학 교육을 지나치게 단기적 직무성과로만 환산하면, 대학이 제공해야 할 더 넓은 가치가 사라질 수 있다. 비판적 사고, 역사적 이해, 윤리적 판단, 타자와의 소통, 민주 시민성, 불확실성 속에서 질문을 세우는 능력은 당장의 직무기술처럼 빠르게 측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AI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역량이기도 하다. 기술은 빠르게 바뀌고, 현재 유망한 직무도 몇 년 뒤에는 자동화될 수 있다. 대학이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 자산은 특정 도구 사용법만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다시 배우고 판단하는 힘이다.

그래서 3년제 학위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대학이 시간을 줄이려면, 오히려 더 분명한 교육철학이 필요하다.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부차적인지 구분해야 한다. 학생에게 반드시 남겨야 할 역량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줄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지키는 것이다.

교양은 사치인가, 회복탄력성인가

3년제 학위 논쟁의 중심에는 교양교육이 있다. 학사학위를 90학점대로 줄이려면 대학은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덜어내야 한다. 전공의 핵심 과목을 줄이기는 어렵다. 직무 연계형 학위라면 현장실습이나 프로젝트 과목도 남겨야 한다. 그러면 줄어드는 영역은 대체로 자유선택, 교양, 전공 외 탐색 과목이 된다.

찬성 측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폭의 교양과 탐색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진로가 분명한 학생에게는 불필요한 학점 이수가 비용과 시간의 낭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이 헬스케어 행정 분야에서 일하고자 한다면, 그에 필요한 행정, 재무, 조직, 데이터, 법·윤리, 현장실습을 집중적으로 배우는 편이 더 낫다는 주장이다. 학생이 빨리 취업해 소득을 얻고 경력을 쌓는다면, 그것 역시 중요한 교육성과라는 논리다.

반면 비판 측은 교양과 탐색의 축소가 학생의 장기적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대학생은 입학 시점에 자신의 진로를 완전히 알기 어렵다. 많은 학생은 대학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업을 듣고,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나고, 실패와 우회를 경험하며 진로를 수정한다. 대학의 4년은 단지 학점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를 이해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1년 줄이는 것이 과연 모든 학생에게 이익인가.

더 중요한 문제는 교양교육의 성격이다. 교양은 취업과 무관한 장식이 아니다. AI 시대의 교양은 오히려 직업적 회복탄력성의 기반이 될 수 있다. 특정 소프트웨어 사용법은 몇 년 안에 낡을 수 있다. 특정 직무 프로세스는 자동화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낯선 상황에서 질문을 만드는 능력, 데이터와 맥락을 함께 읽는 능력, 사람과 조직을 이해하는 능력, 기술의 윤리적 결과를 판단하는 능력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AI가 많은 지식 작업을 자동화할수록 인간에게 남는 역할은 단순한 정보처리가 아니라 판단과 해석, 관계와 책임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 영역은 전공기술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인문사회적 이해, 과학기술의 맥락, 윤리적 감수성, 의사소통 능력이 함께 필요하다. 따라서 3년제 학위가 교양을 줄인다면, 그 줄어든 교양을 어떤 방식으로 대체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교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선명하게 재구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3년제 학위에서도 AI 윤리, 데이터 리터러시, 글쓰기, 의사소통, 조직과 사회 이해, 법과 제도, 인간행동 이해 등은 핵심 역량으로 남길 수 있다. 과목 수는 줄이되, 전공 프로젝트와 교양역량을 결합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헬스케어 행정 전공이라면 의료윤리, 보건격차, 환자권리, 공공정책, 조직커뮤니케이션을 전공 프로젝트 안에 통합할 수 있다. 경영학 전공이라면 AI와 노동, 플랫폼 경제, 조직윤리, 지역경제 문제를 실제 사례 분석과 연결할 수 있다.

문제는 학점 수가 아니라 설계의 질이다. 120학점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깊은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니다. 90학점이라고 해서 반드시 얕은 교육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90학점 학위가 120학점 학위와 동등한 가치를 주장하려면, 대학은 그 교육과정이 무엇을 줄였고 무엇을 강화했는지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더 싸고 더 빠르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3년제 학위가 성공하려면 교양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교양의 목적을 다시 세워야 한다. AI 시대의 교양은 학문적 여유가 아니라 생존역량이다. 대학은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학사학위가 반드시 4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는 이미 3년 학사와 2년 석사 구조를 운영해 왔다. 볼로냐 프로세스 이후 유럽 고등교육은 학위체계를 비교 가능하게 만들고, 학점과 학위의 이동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재편됐다. 영국과 호주도 전통적으로 3년제 학사와 별도의 우등학위 또는 심화과정을 구분해 운영해 왔다. 캐나다 역시 일반학사와 우등학사의 구분이 존재한다. 세계적으로 보면 4년제 학사만이 유일한 표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3년제 학위 실험이 주목받는 이유는 미국 대학의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학사교육은 전공교육과 리버럴아츠 교양교육을 결합한 4년제 모델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학생은 입학 후 일정 기간 전공을 탐색하고,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이수하며, 전공과 비교과 활동을 결합해 대학 경험을 형성한다. 이 모델은 비용이 높지만, 동시에 폭넓은 교육경험을 제공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90학점대 학위는 이 모델을 내부에서 재검토하는 시도다. 유럽식 3년제 학위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학사교육 안에서 어떤 요소를 줄이고 어떤 요소를 남길 것인지를 다시 결정하는 것이다. College-in-3 Exchange와 같은 네트워크가 확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러 대학과 인증기관이 3년제 또는 90학점대 학위의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일부 대학의 특이한 실험이 아니라 고등교육 재정과 학위 가치에 대한 구조적 압력이 제도권 전체로 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학위 기간의 국제비교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유럽의 3년제 학사와 미국의 3년제 응용학사는 같은 이름의 ‘3년’이라도 교육철학과 학제적 맥락이 다르다. 유럽의 학사과정은 전공 집중도가 높은 경우가 많고, 석사과정과의 연계가 전제되는 경우도 많다. 영국과 호주의 3년 학사 역시 우등학위나 대학원 진학 구조와 맞물려 있다. 캐나다의 일반학사와 우등학사도 진로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3년이라는 숫자만 비교해서 어느 제도가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학위 기간이 아니라 학위의 경로다. 3년제 학위 졸업생이 취업시장에서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대학원 진학 시에는 어떤 조건을 요구받는가. 기존 4년제 학위로 전환할 수 있는가. 추가 학습이나 마이크로크레덴셜, 대학원 브릿지 프로그램으로 보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연결 구조가 없다면 3년제 학위는 학생에게 빠른 길이 아니라 막다른 길이 될 수 있다.

매사추세츠 시범과정에서도 이 우려는 제기됐다. 학생들은 일부 고용주가 3년제 학위를 기존 4년제 학위와 동등하게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또 3년제 학위를 마친 뒤 전통적 학사과정으로 다시 진입하려 할 경우 재정지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안내받아야 한다. 이는 단축형 학위가 아직 사회적 등가성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학위는 대학 안에서만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학위는 노동시장, 대학원, 전문자격, 공공기관 채용, 국제이동성과 연결된다. 대학이 아무리 좋은 취지로 3년제 학위를 설계하더라도, 사회가 이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합의가 없다면 학생이 위험을 떠안게 된다. 따라서 3년제 학위의 핵심 과제는 교육과정 설계만이 아니다. 학위의 사회적 인정체계를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한국 대학의 질문은 다르지만 연결돼 있다

한국 대학이 당장 미국식 90학점 학사학위를 도입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국의 고등교육 제도, 학사관리, 전공이수 체계, 국가자격, 채용관행은 여전히 4년제 학사학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미국의 3년제 학위 실험이 한국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한국 대학도 이미 학위의 시간표를 다시 짜야 하는 압력을 받고 있다.

첫 번째 압력은 학령인구 감소다. 입학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대학은 기존 학과와 교육과정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 학생 모집이 어려워질수록 대학은 더 분명한 교육성과를 제시해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는 대학이 어떤 역량을 길러주는지, 졸업 후 어떤 경로를 열어주는지 묻는다. 지역대학은 지역산업과의 연계, 평생교육, 성인학습자, 재직자 교육, 마이크로디그리 등 새로운 수요를 찾아야 한다.

두 번째 압력은 AI 인재 양성이다. 한국 정부는 AI를 국가경쟁력의 핵심으로 보고 전 생애 AI 교육, AI 융합인재 양성, 학·석·박사 패스트트랙, AX 부트캠프, AI 융합 교육과정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다. 통상 8년 이상 걸리던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최대 5.5년까지 단축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하겠다는 방향도 제시됐다. 이는 한국에서도 ‘학위 취득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려는 정책적 상상력이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 압력은 교육과 직무의 정합성이다. 기업은 졸업장보다 실제 역량을 요구한다. 학생은 전공이 취업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정부 재정지원사업도 대학에 산업수요와 지역전략산업을 반영한 교육과정 개편을 요구한다. 대학은 전공을 유지하되 AI를 결합하고, 기존 학과를 융합전공이나 마이크로디그리로 재구성하며, 현장실습과 프로젝트 기반 수업을 확대하려 한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 대학이 배워야 할 것은 “3년제로 줄이자”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대학은 미국의 3년제 학위 논쟁을 통해 교육과정의 우선순위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지금의 4년제 학사과정은 정말 4년이 필요한 구조인가. 교양교육은 학생에게 어떤 역량을 남기고 있는가. 전공교육은 산업 변화에 대응하고 있는가. 비교과와 현장실습은 학위과정 안에서 실질적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학생은 졸업 시점에 자신의 역량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한국 대학의 상당수 교육과정은 여전히 학점의 누적에 가깝다. 전공필수, 전공선택, 교양필수, 교양선택, 비교과, 현장실습이 각각 존재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학습경로로 통합돼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학생은 많은 과목을 듣지만, 졸업할 때 자신이 어떤 역량을 갖추었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도 학생의 역량을 포트폴리오와 수행성과로 보여주는 데 익숙하지 않다.

3년제 학위 논쟁은 한국 대학에 시간 단축보다 구조화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4년을 유지하더라도 교육과정이 느슨하면 학위의 가치는 흔들린다. 반대로 학점 수를 줄이지 않더라도 학생의 학습경로를 명확히 하고, 전공과 교양, 현장과 연구, AI 활용과 인간적 판단을 연결한다면 학위의 신뢰는 높아질 수 있다. 한국 대학의 과제는 학위 기간을 줄이는 데 앞서 학위의 내용을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다.

AI 시대의 대학은 더 짧아질 수도 있지만, 더 얕아져서는 안 된다

AI 시대의 고등교육 개혁은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기술은 빠르게 바뀌고, 기업은 즉시 활용 가능한 인재를 원하며, 학생은 비용과 시간을 줄이려 한다. 대학도 이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대학이 시장의 요구에만 맞춰 단기 직무교육기관으로 변한다면, 대학은 자신이 지켜야 할 고유한 역할을 잃을 수 있다.

AI는 대학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분명하게 묻는다. 지식 전달만이 대학의 역할이라면 AI는 이미 많은 부분을 대체할 수 있다. 학생은 온라인 강의, 생성형 AI, 공개 자료, 기업교육 플랫폼을 통해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대학이 여전히 필요하려면 대학은 단순 지식 제공 이상의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 증명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뤄져야 한다. 첫째, 대학은 학생이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AI가 답을 생성할수록 인간은 질문을 설계하고 답의 적절성을 평가해야 한다. 둘째, 대학은 학생이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직, 갈등, 설득, 돌봄, 책임, 윤리의 문제는 기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셋째, 대학은 학생이 계속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정 기술의 유효기간이 짧아질수록, 학습을 지속하는 힘이 가장 중요한 역량이 된다.

이 세 가지는 단순히 전공기술을 빨리 익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양과 전공, 이론과 실습, 기술과 윤리, 지역과 세계를 연결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따라서 3년제 학위가 성공하려면 “빨리 졸업시키는 학위”가 아니라 “핵심역량을 더 치밀하게 설계한 학위”가 돼야 한다.

이 점에서 역량 중심 교육은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학생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어떤 수준의 판단과 수행을 보여주는지 평가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다만 역량 중심 교육이 단기 직무기술 체크리스트로 축소돼서는 안 된다. 대학의 역량은 코딩언어 하나, 소프트웨어 하나, 자격증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 AI 시대의 핵심역량은 기술적 수행능력과 인간적 판단능력의 결합이다.

대학은 학위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의 가능성까지 줄여서는 안 된다. 대학은 학점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이 세계를 이해하는 폭까지 줄여서는 안 된다. 대학은 교육과정을 효율화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이 실패하고 탐색하고 우회하며 성장할 기회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

3년제 학위의 위험은 짧음 그 자체가 아니다. 위험은 짧아진 시간을 이유로 대학의 책임을 축소하는 데 있다. 반대로 3년제 학위의 가능성도 짧음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가능성은 대학이 자신의 교육과정을 더 정직하고 더 치밀하게 다시 설계하는 데 있다.

3년제 학위가 가장 민감한 논쟁을 불러오는 지점은 형평성이다. 겉으로 보면 이 제도는 학생 선택권을 넓힌다. 4년제 경로와 3년제 경로가 함께 존재하면 학생은 자신의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진로가 분명하고 빨리 취업하려는 학생은 3년제 학위를 선택할 수 있고, 더 넓은 탐색과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학생은 4년제 학위를 선택할 수 있다. 대학은 다양한 학생의 필요에 맞춘 경로를 제공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은 언제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학생은 선택지를 넓게 가질 수 있다. 반면 학비 부담이 큰 학생은 사실상 빠른 졸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수 있다. 그 결과 4년제 학위는 여전히 폭넓은 교양과 네트워크, 해외 경험, 연구 기회를 제공하는 ‘완전한 대학 경험’으로 남고, 3년제 학위는 비용을 줄이기 위한 ‘축소형 경로’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이 경우 3년제 학위는 사회적 이동성을 높이는 장치가 아니라 계층 분리를 고착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부유한 학생은 더 긴 시간 동안 자신을 탐색하고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며, 취약한 학생은 빨리 졸업해 노동시장에 진입한다. 학위 이름은 모두 학사지만, 실제 경험과 네트워크, 진로의 폭은 달라진다. 대학이 이런 구조를 방치한다면 비용 절감형 혁신은 교육 불평등의 새로운 이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3년제 학위는 반드시 안전장치를 가져야 한다. 첫째, 3년제 학위와 4년제 학위 사이의 전환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학생이 입학 후 진로를 바꾸거나 더 깊은 학습을 원할 때 기존 학위과정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대학원 진학이나 전문자격 취득에서 불이익이 있는지 명확히 안내해야 한다. 셋째, 고용주와의 협약을 통해 학위의 사회적 인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넷째, 3년제 학위 안에서도 교양과 시민역량, AI 윤리, 의사소통 등 장기적 역량을 보장해야 한다.

특히 고용주와 대학원, 인증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학이 아무리 3년제 학위의 질을 주장해도 기업이 이를 낮게 평가하면 학생은 손해를 본다. 대학원 입학에서 추가 학점을 요구하거나, 전문자격에서 불이익이 생긴다면 학생의 경로는 좁아진다. 따라서 단축형 학위는 대학 단독으로 설계할 수 없다. 대학, 정부, 인증기관, 기업, 대학원이 함께 학위의 등가성과 보완경로를 논의해야 한다.

한국 대학에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마이크로디그리, 융합전공, 계약학과, 재직자 과정, 성인학습자 전형, 온라인 학위과정 등이 늘어날수록 학위와 자격의 위계가 복잡해진다. 새로운 경로가 정말 학생의 기회를 넓히는지, 아니면 기존 정규 학위와 다른 낮은 지위의 경로로 굳어지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교육혁신은 늘 형평성의 질문과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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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미래는 ‘기간’이 아니라 ‘약속’에 달려 있다

매사추세츠의 3년제 학위 승인은 하나의 지역 뉴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고등교육의 미래를 둘러싼 여러 질문이 압축돼 있다. 대학 학위는 몇 년이어야 하는가. 120학점은 여전히 유효한 기준인가. 교양교육은 얼마나 필요하며, 어떤 방식으로 남아야 하는가. AI 시대의 전공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학생에게 더 빠른 졸업을 제공하는 것이 곧 더 좋은 교육인가. 학위의 사회적 인정은 누가 보증하는가.

이 질문들은 한국 대학에도 낯설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 지역대학 위기, AI 인재 양성, 산업수요 기반 교육과정 개편, 전공자율선택, 마이크로디그리, 학·석·박사 연계과정, 성인학습자 확대는 모두 대학의 시간표를 다시 짜는 움직임이다. 차이는 있을지라도 방향은 같다. 대학은 더 이상 기존의 4년제 학위 구조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이 시간 단축의 경쟁에만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학위가 짧아지는 시대일수록 대학은 자신이 무엇을 보증하는지 더 분명히 해야 한다. 졸업생이 어떤 역량을 갖추는지, 그 역량이 어떻게 검증되는지, 학생이 진로를 바꿀 때 어떤 경로가 열려 있는지, 교양과 전공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AI 시대에 인간다운 판단과 책임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3년제 학위는 대학의 실패를 보여주는 신호일 수도 있고, 대학의 갱신을 위한 기회일 수도 있다. 만약 이 제도가 단지 비용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된다면, 대학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교육과정을 다시 묻고, 학위의 핵심역량을 재정의하며, 학생에게 더 유연하고 투명한 경로를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면 고등교육 혁신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AI 시대의 대학은 더 빠르게 변해야 한다. 하지만 더 가볍게만 변해서는 안 된다. 학생은 더 빨리 졸업할 수 있어야 하지만, 더 좁은 세계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대학은 더 효율적이어야 하지만, 더 빈약해져서는 안 된다. 기술은 교육의 속도를 바꾸지만, 교육의 목적까지 대신 정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학위의 기간이 아니다. 대학이 학생에게 어떤 약속을 하는가이다. 4년이든 3년이든, 120학점이든 90학점이든, 대학은 졸업생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다시 배우고, 함께 일하고,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대학의 시간표는 달라질 수 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4년제 학위도, 3년제 학위도 모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매사추세츠에서 시작된 3년제 학위 실험은 그래서 대학에 묻는다. 무엇을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가. AI 시대 고등교육의 미래는 이 질문에 대한 대학의 답변 위에서 다시 쓰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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