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률 너머, 대학은 ‘살아갈 힘’을 가르치고 있는가

대학은 학생에게 직업만이 아니라 삶을 준비시키는 공간이어야 한다. 생성형 AI가 지식의 답안을 대신 쓰는 시대, 대학 교육은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교육의 중심으로 불러와야 한다.

대학은 오랫동안 학생에게 미래를 준비시키는 곳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그 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좋은 학점, 좋은 인턴십, 좋은 자격증, 좋은 포트폴리오, 좋은 자기소개서, 좋은 취업처. 대학의 언어는 어느 순간부터 학생의 삶 전체를 설명하기보다 노동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절차와 조건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졌다.

학생들도 이 언어에 익숙하다. 입학과 동시에 비교과 프로그램을 확인하고, 학년별 취업 로드맵을 살피고, 공모전과 대외활동을 기록하고, 학점과 스펙을 관리한다. 대학은 학생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그 요구에 맞추어 자신을 정리한다. 할 수 있는 것, 해본 것, 증명할 수 있는 것, 수치화할 수 있는 것, 제출할 수 있는 것. 그렇게 학생의 대학생활은 점점 하나의 이력서 형식으로 배열된다.

물론 취업은 중요하다. 청년에게 일자리는 생존의 문제이고, 대학 교육이 사회 진출을 외면할 수는 없다. 전공교육은 전문성을 길러야 하고, 대학은 학생들이 현실의 노동시장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취업률을 가볍게 볼 수도 없다. 등록금과 시간을 들여 대학에 온 학생과 가족에게 졸업 이후의 삶은 매우 구체적인 문제다.

그러나 대학이 학생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취업 준비뿐이라면, 우리는 너무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은 직업인이기 전에 한 사람이다. 졸업 이후에는 직장만이 아니라 관계를 만나고, 실패를 만나고, 상실을 만나고, 비교와 불안을 만나고, 선택의 책임을 만나고, 때로는 삶의 의미가 흔들리는 시간을 만난다. 대학이 학생에게 삶의 수단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삶의 목적과 방향을 묻는 일은 학생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 온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새삼스럽지만 낡은 질문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대학이 가장 새롭게 다시 물어야 할 질문에 가깝다. 생성형 AI가 지식을 요약하고, 보고서를 쓰고, 에세이를 구성하고, 심지어 토론의 논거까지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이 어떤 주제에 대해 ‘답안’을 얻는 일은 이전보다 쉬워졌다. 그러나 어떤 답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전히 학생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AI는 칸트 윤리학을 설명할 수 있지만, 학생을 대신해 칸트적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려줄 수는 없다. 공리주의를 정리할 수는 있지만, 고통과 선택 앞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대신 선택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대학의 역할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간다. 대학은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인가, 아니면 학생이 지식을 자신의 삶으로 바꾸어 가도록 돕는 공간인가. 대학은 취업 가능한 인재를 길러내는 곳인가, 아니면 살아갈 힘을 가진 사람을 길러내는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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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수업으로 묻는 대학

최근 해외 고등교육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다. 홍콩대의 공통교양 교육과정인 Common Core 프로그램 안에 개설된 ‘Life Worth Living’ 수업이다. 이 수업은 이름 그대로 “살 만한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삶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업이 추상적인 철학 강의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업은 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 기독교, 유대교, 세속적 휴머니즘 등 여러 사상과 종교적·철학적 전통을 다룬다. 학생들에게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서로 다른 전통이 인간의 고통, 행복, 욕망, 공동체, 실패, 죽음, 구원,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를 함께 검토하게 한다.

강의 방식도 독특하다. 시시포스의 바위를 무대 위에서 직접 짊어지는 퍼포먼스가 등장하고, 대중음악과 춤이 철학적 질문을 여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튜토리얼에서는 학생들이 역할극을 통해 도덕적 딜레마를 토론한다. 학생은 자기 이름으로 말하기 전에 어떤 인물의 역할을 맡는다. 유교적 학자의 관점에서 말하기도 하고,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인물의 입장에서 판단하기도 한다. 그 역할의 가면은 학생에게 안전한 거리를 제공한다. 자신의 신념으로 평가받는다는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낯선 세계관을 시험해볼 수 있게 한다.

이 방식이 중요한 이유는 학생들이 단지 내용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살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좋은 삶에 관한 교육은 정보를 많이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불교가 무엇을 말하는지, 유교가 무엇을 중시하는지, 기독교가 인간과 고통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세속적 휴머니즘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그 관점이 실제 삶의 문제 앞에서 어떤 질문을 만들어내는지 경험하는 일이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뒤에도 남아 토론한다고 한다. 시험에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삶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인가, 해석해야 할 것인가. 행복은 즐거움인가, 의미인가. 타인의 기대와 나의 욕망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가. 이런 질문은 취업 면접에서 바로 묻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이 살아가며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대학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 대학에도 교양교육이 있다. 핵심역량을 기반으로 한 교양 교육과정, 기초학문 교과목, 인성교육, 의사소통, 디지털 리터러시, 창의융합, 시민성, 글로벌 역량을 강조하는 교과목들이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양교육을 얼마나 자기 삶의 질문과 연결된 교육으로 경험하고 있을까. 교양은 전공 밖에서 이수해야 하는 학점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공통의 지적 경험인가.

교양교육이 단지 졸업요건을 채우는 영역으로 인식될 때, 대학은 매우 중요한 기회를 잃는다. 교양은 전공보다 덜 중요한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전공이 학생에게 특정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제공한다면, 교양은 그 지식과 기술을 어떤 삶과 어떤 사회 안에서 사용할 것인지를 묻는 교육이어야 한다. 전공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면, 교양은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그 선택이 나와 타인과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묻는 교육이어야 한다.

오늘의 대학은 학생 정신건강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상담센터를 확대하고, 심리검사를 운영하고, 마음건강 프로그램을 만들고, 위기학생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교직원에게 자살예방 교육과 학생지원 교육을 제공한다. 이러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학생의 불안, 우울, 자해, 고립, 대인관계 어려움은 실제적이고 긴급한 문제다. 대학은 학생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학생 정신건강 위기를 행정적 대응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상담 인력을 늘리고,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위기대응 매뉴얼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학생들이 경험하는 깊은 공허와 무기력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단순히 스트레스 관리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패했을 때 자신을 붙들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신을 성과의 합계로만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불안은 더 커진다.

대학의 학생지원은 치료와 상담의 영역만이 아니라 교육과정의 영역과도 연결되어야 한다. 학생이 삶의 의미를 묻고, 실패를 해석하고, 고통을 말하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자기 기준을 세워가는 과정은 상담실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학 교육 안에서도 다루어져야 한다. 상담센터는 위기에 처한 학생을 돕는 중요한 안전망이다. 그러나 교육과정은 학생이 위기 이전에 삶을 사유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언어를 배우는 더 넓은 장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학은 학생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조심스럽지만 피할 수 없다. 물론 대학이 특정한 가치관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 국가, 학교, 교수자가 하나의 좋은 삶을 정해놓고 학생을 그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통제에 가깝다. 특히 다원화된 사회에서 좋은 삶의 방식은 하나일 수 없다. 학생마다 배경이 다르고, 신념이 다르고, 욕망이 다르고, 살아갈 세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 해야 할 일은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를 함께 묻는 것이다. “행복은 이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검토하게 하는 것이다. “성공은 취업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취업 이후에도 남는 삶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하는 것이다.

학생 정신건강 위기를 의미의 위기로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이 아픈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 치료이고, 때로 약물이고, 때로 휴식이고, 때로 보호체계다. 그러나 동시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언어다. 실패한 자신을 전부 실패한 인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돕는 관점이다. 비교에서 밀려난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결론 내리지 않도록 붙드는 관계와 사유다. 대학은 이 역할을 교육과정 안에서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취업역량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학의 책임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학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실용성을 요구받았다. 산업수요에 맞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요구, 졸업생 취업률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 지역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교육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졌다. 학령인구 감소와 재정 압박 속에서 대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 자주 증명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취업성과는 가장 가시적인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가시적인 지표가 중요해질수록, 보이지 않는 교육의 가치는 뒤로 밀리기 쉽다.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렀는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갖게 되었는지, 자기 삶을 해석하는 언어를 얻었는지, 실패 이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면의 토대를 만들었는지는 숫자로 보여주기 어렵다. 대학평가표에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 취업률처럼 비교하기도 어렵고, 자격증 취득률처럼 산출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 교육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일부는 숫자로 잘 보이지 않는다. 좋은 수업 하나가 학생의 세계관을 바꾸기도 한다. 한 권의 책, 한 번의 토론, 한 명의 교수, 한 명의 친구가 학생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어주기도 한다. 대학 시절에 만난 질문 하나가 졸업 이후 오랫동안 삶을 지탱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정량평가의 언어로 포착하기 어렵지만, 대학이 대학다울 수 있는 이유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취업역량 교육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취업역량이 대학 교육의 거의 유일한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전공도 취업을 위해, 교양도 취업을 위해, 비교과도 취업을 위해, 상담도 중도탈락 방지를 위해, 학생지원도 성과관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될 때 대학은 학생을 한 사람으로 보기보다 관리해야 할 성과 단위로 바라보게 된다. 학생은 어느새 ‘잘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취업시켜야 할 대상’이 된다.

하지만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취업 가능성만이 아니다. 자신을 돌보는 능력, 관계를 맺는 능력, 상실을 견디는 능력, 갈등을 해석하는 능력, 공동체 안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능력, 돈과 노동의 의미를 성찰하는 능력, 기술 변화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모두 하나의 교과목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학 교육 전체가 이런 질문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대학은 학생에게 “어떻게 취업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취업 이후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도 물어야 한다.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를 도와야 한다. 동시에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를 사유하게 해야 한다. 이 두 질문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있어야 한다. 삶의 방향을 잃은 취업 준비는 쉽게 소진으로 이어지고, 현실의 기반 없는 삶의 성찰은 공허한 담론이 될 수 있다. 대학은 이 둘을 연결해야 한다.

생성형 AI 시대, 대학이 다시 붙들어야 할 것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 논의를 더 절박하게 만든다. 이제 학생은 과제를 작성할 때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논문을 요약하고, 개념을 설명받고, 발표문을 만들고, 코드를 작성하고, 외국어 문장을 다듬고, 면접 답변을 준비할 수 있다. AI는 학습의 보조도구가 될 수 있고, 창작과 탐구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 대학은 AI를 금지하는 방식만으로는 이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AI가 많은 답을 빠르게 만들어낼수록, 대학은 “무엇이 인간의 학습인가”를 더 깊이 물어야 한다. 학생이 AI가 만든 답안을 제출하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단지 부정행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학생이 자기 안에서 질문을 붙들고, 자료와 씨름하고, 판단하고, 수정하고, 실패하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건너뛸 수 있기 때문이다. 학습의 결과물은 남지만, 학습의 노동은 사라질 수 있다.

좋은 삶에 관한 질문은 이 점에서 AI가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AI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철학적 답변을 정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설명하고, 공리주의의 효용 개념을 비교하고, 유교의 수양론과 불교의 고통 이해를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에게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답은 외주화할 수 없다. AI가 대신 쓴 문장은 있을 수 있지만, AI가 대신 살아준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AI 시대의 대학은 지식 전달 기관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지식 전달만으로 대학의 역할을 설명하려 한다면, 대학은 점점 더 강력한 기술과 경쟁해야 한다. 더 빠르게 설명하고, 더 많이 요약하고, 더 친절하게 답변하는 AI와 경쟁하는 대학은 불리하다. 그러나 대학이 학생에게 지식을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경험을 제공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학은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없는 느린 사유의 장, 타인과 함께 질문을 견디는 장, 자기 삶의 답을 스스로 구성하는 장이 될 수 있다.

AI 시대의 교육은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더 깊은 판단을 요구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학생이 AI가 생성한 답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답이 전제하는 가치와 관점을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해 다시 묻고, 타인과 토론하며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교양교육은 이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다. 기술을 사용하는 법만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삶과 노동과 관계와 의미를 어떻게 바꾸는지 묻는 교육이 필요하다.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AI를 잘 쓰는 능력만이 아니다. AI가 만들어낸 답에 압도되지 않고, 자기 질문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는 능력이다. 빠른 답변의 편리함 속에서도 느린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것이야말로 AI 시대 대학이 길러야 할 새로운 교양이다.

한국 대학에서 교양교육은 자주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대학은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학생에게는 전공보다 덜 중요한 과목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학생에게 교양은 학점을 채우기 위한 선택지이고, 어떤 학생에게는 비교적 부담이 적은 과목이며, 어떤 학생에게는 졸업요건을 맞추기 위한 영역이다. 물론 모든 대학과 모든 교양수업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교양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대학과 교수자도 많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교양교육이 대학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양교육이 다시 살아나려면 몇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교양교육은 ‘기초지식 전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글쓰기, 의사소통, 디지털 역량, 기초과학, 인문사회 이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기능 훈련이 되어서는 부족하다. 글쓰기는 자기 생각을 구성하는 훈련이어야 하고, 의사소통은 타인을 설득하고 이해하는 윤리적 과정이어야 하며, 디지털 역량은 기술을 사용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 성찰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둘째, 교양교육은 학생의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 좋은 삶, 행복, 죽음, 사랑, 노동, 돈, 실패, 공동체, 신앙, 과학기술, 생태, 정의, 돌봄 같은 주제는 너무 크고 추상적이어서 수업에서 다루기 어렵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의 삶은 이미 이런 질문들 한가운데 있다. 학생은 취업을 준비하면서 노동의 의미를 묻고, 인간관계에서 사랑과 인정의 문제를 경험하고, 가족과 사회 속에서 책임과 자유의 갈등을 겪고, 경제적 불안 속에서 돈과 존엄의 관계를 체감한다. 교양교육은 이런 삶의 질문을 학문적 언어와 연결해 주어야 한다.

셋째, 교양교육은 정답형 시험보다 토론과 성찰의 구조를 강화해야 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교육은 단순 암기식 평가와 잘 맞지 않는다. 학생이 서로 다른 관점을 접하고, 자신의 전제를 발견하고, 글로 정리하고, 타인의 반론을 듣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효율적이지 않을 수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평가가 까다롭고, 수업 운영도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림과 불편함이 교육의 핵심일 수 있다.

넷째, 교양교육은 특정 이념이나 가치의 주입이 아니라 다원적 성찰이어야 한다. 대학이 좋은 삶을 가르친다고 할 때 가장 큰 우려는 가치관의 강요다. 이 우려는 정당하다. 따라서 대학은 하나의 삶의 방식을 정답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대신 여러 사상과 전통, 다양한 삶의 사례,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을 함께 검토하게 해야 한다. 학생이 자기 답을 만들 수 있도록 충분한 재료와 안전한 토론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다섯째, 교양교육은 전공교육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공학도에게 좋은 삶의 질문은 추상적 인문학이 아니라 기술의 책임과 연결된다. 의학과 보건계열 학생에게는 생명, 고통, 돌봄, 죽음의 문제와 연결된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돈, 조직, 노동, 윤리의 문제와 연결된다.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표현, 고통, 아름다움, 사회적 책임의 문제와 연결된다. 교양은 전공 밖의 별도 영역이 아니라, 전공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는 다리여야 한다.

대학이 삶의 의미를 묻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학생들이 그런 수업에 관심을 가질지 의심할 수 있다. 학생들은 취업에 바쁘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과목을 원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학점과 취업에 민감하다. 수강신청에서 부담이 적은 과목을 찾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과목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학생들이 삶의 질문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은 너무 자주 혼자 그 질문을 감당하고 있다.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혼란, 실패하면 끝이라는 두려움, 부모와 사회의 기대를 충족해야 한다는 압박, 친구들과 비교하며 느끼는 열등감,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 이런 감정들은 대학 밖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대학생활 한가운데서 생긴다.

학생들은 이미 묻고 있다. 다만 그 질문을 대학의 공식 언어로 말하지 못할 뿐이다. “좋은 삶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장으로 말하지 않을 뿐,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취업하면 괜찮아질까”,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한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남들처럼 살지 못하면 나는 틀린 건가”라는 방식으로 묻고 있다. 대학은 이 질문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상담실의 문제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

물론 모든 학생이 같은 방식으로 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어떤 학생은 진로의 언어로 묻고, 어떤 학생은 우울과 불안의 언어로 묻고, 어떤 학생은 무기력의 언어로 묻고, 어떤 학생은 냉소의 언어로 묻는다. 어떤 학생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대학은 이 다양한 질문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대학이 학생의 삶을 대신 설계해줄 수는 없다. 대학이 할 수 있는 것은 학생이 자신의 삶을 더 잘 들여다보도록 돕는 일이다. 좋은 질문을 제공하고, 다양한 관점을 열어주고, 실패와 고통을 해석할 언어를 제공하고, 타인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일이다. 학생이 자기 삶의 저자가 되도록 돕는 일이다.

대학의 오래된 사명은 낡지 않았다

대학이 좋은 삶을 묻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다. 오히려 대학의 아주 오래된 전통에 속한다. 철학은 처음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었다. 동서양의 사상 전통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욕망과 절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질문해 왔다. 대학은 한때 이런 질문을 지식인의 사유와 시민의 형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현대 대학은 점점 더 복잡한 요구 속에 놓였다. 전문직업교육, 연구성과, 산학협력, 지역혁신, 국제경쟁력, 재정지원사업, 취업률, 대학평가, 학령인구 감소 대응. 대학이 감당해야 할 현실적 과제는 많고 무겁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삶”을 말하는 것은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당장 학생을 취업시켜야 하고, 학과를 유지해야 하고, 재정을 확보해야 하는 대학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교육은 우선순위 밖으로 밀리기 쉽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이 필요하다. 대학이 생존을 위해 실용성만을 강조할수록, 대학의 고유한 존재 이유는 더 흐려진다. 직업훈련은 대학 밖에서도 가능하다. 온라인 플랫폼도 기술을 가르칠 수 있고, 기업도 직무교육을 할 수 있으며, AI도 지식을 설명할 수 있다. 대학이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대학은 학생이 전문지식과 더불어 인간과 사회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것이 사라질 때 대학은 더 비싼 직업훈련기관으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다.

대학의 오래된 사명은 낡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직업의 형태가 바뀌고, 사회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더 중요해진다. 한 직업의 기술은 몇 년 만에 낡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삶을 성찰하는 능력, 타인과 협력하는 능력, 고통을 해석하는 능력,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능력, 공동체 안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능력은 쉽게 낡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대학이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오래가고 깊은 역량이다.

우리는 이것을 ‘살아갈 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살아갈 힘은 단순한 정신력이나 긍정적 태도가 아니다. 무조건 버티라는 말도 아니다. 살아갈 힘은 자기 삶을 이해하는 힘이고, 실패해도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힘이며, 타인과 관계 맺는 힘이고, 선택의 기준을 세우는 힘이며,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거나 새롭게 구성하는 힘이다. 이 힘은 취업역량표의 한 칸에 넣기 어렵지만, 학생의 삶에서는 결정적인 역량이다.

대학은 무엇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대학은 무엇을 해야 할까. 거창한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 “교양교육을 혁신하겠다”, “학생성공을 지원하겠다”는 문장은 이미 많은 대학의 계획서에 들어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 교육과정과 수업 경험이 바뀌는 일이다.

우선, 대학은 신입생 교육에서부터 삶의 질문을 다루어야 한다. 대학생활 안내, 학사제도 설명, 진로탐색, 학습법 교육도 필요하지만, 신입생에게 대학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왜 공부하는가. 대학에서 만나는 지식은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은가. 실패와 비교 속에서 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런 질문은 입학 초기에 매우 중요하다.

둘째, 전 학년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교양 경험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각자 흩어져 쉬운 교양과목을 선택하는 구조만으로는 대학 공동체의 지적 경험을 만들기 어렵다. 대학마다 자신의 교육철학을 담은 핵심 교양과목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 과목은 특정 사상을 주입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삶에 대한 큰 질문을 함께 다루는 시간이어야 한다. 대학의 건학이념, 지역적 맥락, 전공 구성, 학생 특성을 반영해 다양한 모델이 가능하다.

셋째, 상담과 교양교육의 연결이 필요하다. 상담센터는 학생의 위기를 다루고, 교양교육은 학생의 성찰을 다룬다. 두 영역은 분리되어 있지만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상담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학생들의 어려움은 교육과정의 주제가 될 수 있다. 불안, 비교, 실패, 관계, 자기이해, 정서조절, 진로혼란, 가족과 독립의 문제는 교양교육 안에서도 학문적·성찰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물론 상담 내용을 수업으로 가져오라는 뜻은 아니다. 학생들의 삶에서 반복되는 주제를 교육적으로 재구성하자는 의미다.

넷째, 교수자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좋은 삶에 관한 수업에서 교수자는 정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조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학생들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고, 서로 다른 관점이 충돌할 때 그것을 학습의 기회로 전환하고, 감상적 위로에 머물지 않도록 학문적 깊이를 제공해야 한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교수자에게도 새로운 교수법과 지원체계가 필요하다.

다섯째, 평가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 학생이 어떤 입장을 선택했는지보다, 그 입장을 어떻게 검토했고, 어떤 자료와 경험을 통해 수정했으며, 타인의 관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중요하다. 성찰적 글쓰기, 토론 기록, 포트폴리오, 프로젝트, 자기평가와 동료평가 등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다. 삶의 질문을 객관식 시험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취업률 너머의 대학 성과

이제 대학은 스스로에게 더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학생을 취업시키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가만이 아니라, 학생이 살아갈 힘을 얻도록 돕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학생은 대학을 다니며 자신과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가. 실패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는가. 타인의 삶을 더 넓게 이해하게 되었는가. 기술과 자본과 경쟁의 언어만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와 의미의 언어를 갖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대학평가 지표로 만들기 어렵다. 그러나 어렵다고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이 지표화하기 어려운 가치를 스스로 붙들 수 있을 때, 대학은 시장의 요구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을 수 있다. 취업률은 중요하지만, 취업률만으로 대학의 성과를 설명할 수는 없다. 졸업생의 첫 직장이 대학 교육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대학 교육의 진짜 결과는 때로 졸업 직후가 아니라 10년 뒤, 20년 뒤, 삶의 위기와 선택의 순간에 드러난다.

학생이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은 시간이 지나며 바뀔 수 있다. 첫 직장은 이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산업구조도 변하고, 직무도 바뀌며, 기술도 낡는다. 그러나 대학에서 배운 질문은 오래 남을 수 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돈과 성공은 내 삶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 실패한 사람을 사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기술은 인간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이런 질문을 붙들어 본 학생은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완전히 잃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학이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완성된 답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좋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일 수 있다. 쉽게 답하지 않고, 남이 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삶으로 검토하고, 타인과 함께 다시 생각하는 능력일 수 있다. 이것은 느리고 불편한 교육이다. 그러나 대학이 아니면 어디에서 이 느린 교육을 감당할 수 있을까.

다시, 대학은 무엇을 위한 곳인가

취업은 삶의 중요한 일부다. 그러나 삶 전체는 아니다. 직업은 인간에게 소득과 역할과 정체성을 제공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의 삶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좋은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 외로울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관계에서 상처받을 수 있고, 방향을 잃을 수 있다. 반대로 원하는 취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삶 전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대학은 학생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대학이 취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취업 너머를 보지 못하는 대학도 충분하지 않다.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취업률로 환산되는 성공만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모두 통과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단기간의 취업특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좋은 수업, 깊은 독서, 진지한 토론, 안전한 관계, 성찰적 글쓰기, 실패를 허용하는 경험, 다양한 삶의 관점과 만나는 시간을 통해 조금씩 형성된다.

생성형 AI 시대의 대학은 더 이상 지식의 독점자로 남을 수 없다. 지식은 이미 넘쳐난다. 답도 넘쳐난다. 문제는 어떤 답을 믿을 것인지, 어떤 지식을 삶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 어떤 기술을 어떤 가치 아래 사용할 것인지다. 이 질문 앞에서 대학은 여전히 필요하다. 아니, 어쩌면 이전보다 더 필요하다.

대학은 학생에게 일자리를 준비시키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대학은 학생에게 삶을 준비시키는 곳이어야 한다. 취업률 너머에서 학생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붙들고 버틸 것인지, 누구와 함께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지 묻는 곳이어야 한다.

이제 대학은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학생들은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떠나는가. 그들은 직업을 얻을 준비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갈 힘도 함께 얻고 있는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대학만이 AI 시대에도 대학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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