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바뀌었는데 입시는 그대로… 고교학점제의 충돌

선택형 교육 확대에도 수능·내신 경쟁 유지… 한국교육개발원, 제도 간 비정합성이 현장 혼란 키운다고 진단

학생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과목 선택을 확대하겠다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 첫해부터 입시 현실과의 충돌을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교육개발원이 4월 9일 발행한 브리프 「고교학점제 이상과 현실: 고교학점제 성공적 안착을 위한 정책조합 탐색」은 고교학점제가 교육과정, 학생평가, 대입제도, 고교체제가 함께 맞물릴 때 비로소 작동하는 정책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 네 축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짚었다. 선택형 교육을 표방한 제도였지만 학생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여전히 입시 중심 구조에 묶여 있다는 점이 이번 분석의 핵심이다. 고교학점제는 애초 학생의 과목 선택권 확대와 절대평가 확대, 학생의 다양한 학습 경험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대입제도, 일반고 중심의 수평적 다양화를 전제로 설계됐다. 그러나 정책 이행 과정에서는 상대평가 병기 과목이 오히려 늘었고, 수능 중심 정시 기조도 이어졌으며, 외고·국제고·자사고 존치가 결정되면서 제도적 정합성이 흔들렸다는 진단이 제시됐다.

고교학점제의 가장 큰 명분은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흥미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학업 경로를 설계하도록 돕는 데 있다. 실제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학생선택 과목 비중은 51.7%까지 확대됐다. 수치만 놓고 보면 학교는 분명 달라진 셈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과목 수가 늘어난 것이 곧 실질적 선택권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확인됐다. 학생들의 과목 선택이 흥미와 적성보다는 수강 인원, 대학·전공별 권장과목, 수능 과목 여부, 대입 유불리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이 제시하는 권장과목이 학생들에게는 사실상 필수처럼 작동한다는 지적은 고교학점제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도는 선택을 말하지만, 학생들은 선택의 자유보다는 선택의 위험을 먼저 계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분화된 과목 체계 역시 모든 학생에게 기회가 되기보다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도 제기됐다. 결국 학교 안의 교육과정은 다양해졌지만, 학생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폭은 입시 논리에 의해 다시 좁아지고 있는 셈이다.

내신 완화의 기대, 경쟁 완화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학생평가 영역에서도 충돌은 선명하다. 2028학년도 대입 개편안에 따라 내신은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바뀌지만, 예체능·교양·탐구융합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과목에 상대평가 결과가 병기된다. 형식상 절대평가 요소가 확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여전히 등급 확보에 유리한 이른바 ‘안전한 조합’을 찾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는 고교학점제가 의도한 과목 선택의 자율성이 평가 체계 앞에서 왜곡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고교학점제 전면 적용 첫해를 경험한 학생들은 5등급제로 바뀐 이후에도 상위권 내신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평가 자체에 대한 부담도 계속되고 있었다. 제도가 바뀌면서 경쟁의 형식은 조정됐지만, 경쟁의 구조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다. 고교학점제가 성장 중심 교육과 평가 혁신을 지향한다고 해도 대입에서의 변별 요구가 강하게 유지되는 한, 학교 현장의 평가는 다시 선발 중심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드러난 대목이다.

대입제도는 이번 분석에서 가장 첨예한 충돌 지점으로 제시됐다. 고교학점제가 학생의 3년간 학습 과정과 성취를 폭넓게 반영하는 방향을 지향한다면, 대입 역시 그에 맞춰 조정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수능 위주 정시 비율이 유지되고 있고, 학생부 중심 전형에서도 수능 최저기준이 작동하면서 수능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과 수능 준비를 성격이 다른 두 종류의 학습으로 인식하며, 이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고교학점제의 구조적 한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학교는 학생에게 자기주도적 선택과 진로 맞춤형 설계를 요구하지만, 입시는 여전히 정해진 시험을 중심으로 변별을 수행한다. 학생 입장에서는 학교 안의 선택형 교육과 학교 밖의 수능 중심 경쟁을 함께 떠안아야 한다. 맞춤형 교육과 선발형 입시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제도의 취지는 학교 현장에서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비교과를 줄였더니 세특 경쟁이 교실 안으로 몰렸다

학생부 기재 항목 축소 역시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외부 스펙 경쟁을 줄이고 수업과 학교생활 중심으로 대입을 준비하게 하겠다는 방향은 일정 부분 긍정적 효과를 낳은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자율동아리, 개인봉사, 수상경력, 독서활동 등 비교과 요소의 축소는 학교 수업과 학생부 기록 중심의 준비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 문제는 경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동했다는 데 있다.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이른바 세특의 비중이 커지면서 탐구보고서 과잉과 교과 세특 경쟁 과열이 나타났고, 학생의 수준이나 과목 위계에 맞지 않는 과목 개설까지 이어지는 현상도 확인됐다. 공정성 강화를 위해 바뀐 제도가 교실 안에서 새로운 압박을 낳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입시 제도 개편이 단순히 항목을 줄이고 늘리는 문제에 그치지 않으며, 그 변화가 학교 수업과 기록, 평가의 방식까지 연쇄적으로 흔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교학점제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지역 격차 문제에서도 확인된다. 농산어촌이나 소규모 학교는 교원 수와 과목 개설 여건 자체가 부족해 고교학점제 운영에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이들 학교 학생들에게 공동교육과정과 온라인학교는 부가적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필수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실제 공급은 현장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역별 최소 개설 인원, 학교별 수강 인원 제한, 타학교 학생 비율 제한 같은 조건이 겹치면서 필요한 과목을 듣지 못하는 사례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고교학점제가 모든 학생에게 같은 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 체감은 학교 규모와 지역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뜻한다. 누군가에게는 다양한 과목 중 선택하는 제도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개설된 과목 안에서 겨우 버티는 제도일 수 있다. 선택권의 확대를 핵심 가치로 내세운 정책이라면, 그 선택권이 누구에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보장되는지부터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가 여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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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보고서가 던진 가장 큰 시사점은 고교학점제의 혼란을 단순히 학교 현장의 준비 부족이나 운영 미숙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교육과정은 선택과 다양성을 향해 가는데, 학생평가는 상대평가 병기를 유지하고, 대입제도는 수능의 영향력을 크게 줄이지 못했으며, 고교체제 역시 일반고 중심 재편이 아니라 특목고·자사고 존치로 방향을 틀었다. 이처럼 제도의 여러 축이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이면, 학교는 바뀌어도 학생과 학부모가 체감하는 입시 질서는 그대로 남게 된다. 한국교육개발원은 해법으로 온라인 공동교육과정 확대, 절대평가의 점진적 확대, 평가 결과의 근거자료 제공을 통한 고교-대학 신뢰 구축, 세특 기재 방식 개선, 수능 영향력 축소와 학생부 중심 전형 강화, 수시·정시 일원화, 미래 사회 변화에 대응한 고교체제 재구조화 등을 제안했다. 방향은 비교적 분명하다. 다만 관건은 제도 하나만 손보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교육과정과 평가, 대입과 학교체제를 함께 보지 않으면 고교학점제의 취지는 계속 현실과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고교학점제는 학교를 바꾸는 정책이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가 체감하는 교육 현실은 여전히 입시가 결정한다. 학교가 먼저 달라졌다면, 이제는 입시가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가 남은 질문이다. 고교학점제의 성패를 가를 기준도 결국 그 지점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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