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실험 – 지역 소멸과 고등교육 체제 재설계 ② ] 연구중심대인가, 지역혁신 허브인가

거점국립대의 선택이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

거점국립대학을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은 단순히 재정을 얼마나 투입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 정책의 핵심에는 거점국립대학이 어떤 유형의 대학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연구 경쟁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연구중심대학을 목표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역 산업과 공공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기능하는 지역 혁신의 허브를 지향하는 것인지에 따라 정책의 방향과 성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다. 이 선택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방향 없는 확장으로 흐를 위험을 안게 된다.

정책 문서와 정부의 공식 설명에서는 두 목표가 동시에 언급된다. 한편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 경쟁력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 전략산업과의 연계, 산학연 협력, 정주형 인재 양성을 핵심 과제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두 목표는 동일한 언어로 병기될 수 있을지언정, 동일한 전략으로 달성되기는 어렵다. 연구중심대학과 지역 혁신 허브는 요구하는 조직 구조와 투자 우선순위, 성과 평가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이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정책이 추진될 경우, 거점국립대학은 어느 쪽에서도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중간 지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이 회차에서는 거점국립대학이 처한 이 전략적 갈림길을 중심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는 특정 대학의 성공 여부를 넘어, 한국 고등교육 체제가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적 수준 연구중심대학이라는 목표

거점국립대학을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은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가장 직관적인 목표처럼 보인다. 연구 경쟁력을 기준으로 할 때, 서울대학교와 주요 거점국립대학 사이에는 여전히 뚜렷한 격차가 존재하며, 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대규모 재정 투입과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정책의 출발점에 자리 잡고 있다. 국제 학술지 논문 실적, 대형 연구과제 수주, 박사급 인력 양성 능력 등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상위 대학군 확장을 통한 입시 병목 완화 역시 실현되기 어렵다는 논리다. 그러나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은 단순히 연구비를 늘린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연구중심대학은 특정 학문 분야에서 국제적 인지도를 갖춘 연구자 집단과 안정적인 대학원 파이프라인, 그리고 장기간 축적된 연구 문화 위에서 형성된다. 이는 단기 성과를 목표로 한 재정 지원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다. 연구 성과는 일정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전제로 하며, 성과가 가시화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거점국립대학이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할 경우, 정책은 또 다른 형태의 경쟁과 중복 투자를 낳을 수 있다. 제한된 재원을 동일한 목표에 분산 투입할 경우, 어느 대학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연구중심대학이라는 목표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모든 거점국립대학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

지역 중심 연구거점대학이라는 대안

거점국립대학을 반드시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전제에 대해, 정책 내부에서도 다른 가능성이 함께 제시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역 중심 연구거점대학이라는 모델이다. 이 접근은 국제적 학문 경쟁에서 최상위권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지역의 전략산업과 공공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연구와 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방점을 둔다. 연구의 질을 낮추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연구의 목적과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르게 설정하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지역 중심 연구거점대학 모델에서 중요한 것은 학문적 성취 그 자체보다도, 연구가 지역 사회와 산업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가이다. 예를 들어 지역의 주력 산업, 보건·의료, 환경, 에너지, 교통과 같은 공공 영역과 연계된 연구는 국제 학술지 성과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단기간의 논문 실적보다는 중장기적 문제 해결 능력과 현장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연구 성과를 둘러싼 보상 체계와 대학 내부의 평가 문화 전반에 변화를 요구한다. 이 모델은 거점국립대학이 지역 혁신의 허브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 목표인 지역 소멸 완화와도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지역 산업과 연계된 연구와 인재 양성이 정주형 일자리로 이어질 경우, 대학은 지역에 사람을 붙잡아 두는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역할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이 요구하는 국제 경쟁과는 다른 종류의 역량을 필요로 하며, 두 모델은 동일한 전략과 지표로 동시에 추진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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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모델을 동시에 추구할 때 발생하는 문제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과 지역 중심 연구거점대학이라는 두 모델은 정책 문서상에서는 병렬적으로 제시되지만, 실제 운영 단계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의 선택을 요구한다. 연구중심대학은 국제 학술 경쟁력을 기준으로 학문 분야를 선별하고, 제한된 분야에 연구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을 필요로 한다. 반면 지역 중심 연구거점대학은 지역 산업과 공공 수요를 기준으로 학문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연구 성과를 지역 사회에 환류시키는 구조를 중시한다. 두 모델은 투자 우선순위, 인력 배치, 성과 평가 방식에서 서로 다른 논리를 갖고 있으며, 이를 동시에 추구할 경우 정책의 초점은 쉽게 흐려진다.

이러한 전략적 모호성은 재정 투입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위험이 크다. 제한된 예산을 모든 목표에 분산 투입할 경우, 어느 영역에서도 임계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연구중심대학을 목표로 할 경우 필요한 것은 대형 연구 인프라와 국제적 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집중 투자이지만, 지역 혁신 허브를 지향할 경우에는 산학연 협력 구조와 현장 중심 교육을 강화하는 데 자원이 배분되어야 한다. 정책 목표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을 경우, 투자와 성과 사이의 연결 고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성과 평가의 충돌 역시 중요한 문제다. 연구중심대학은 국제 학술지 논문 실적과 연구비 수주 규모 같은 정량 지표를 중심으로 성과를 판단하는 반면, 지역 중심 연구거점대학은 지역 기여도, 기술 이전, 공공 문제 해결과 같은 정성적 요소를 중시한다. 동일한 대학에 이 두 가지 기준을 동시에 적용할 경우, 대학 내부에서는 어떤 성과를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교수와 연구자의 행동을 왜곡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정책에 대한 내부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정책은 선택을 회피하고 있는가

정책 문서에서 연구중심대학과 지역 혁신 허브라는 두 목표가 동시에 제시되는 이유는 단순한 혼선이라기보다, 의도된 전략적 모호성에 가깝다. 특정 모델을 명확히 선택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반발과 갈등을 피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동시에 설득하려는 정책적 계산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연구중심대학을 전면에 내세울 경우 지역 기여가 약화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고, 지역 혁신을 강조할 경우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가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 회피는 정책 집행 단계에서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목표가 모호할수록 대학은 스스로의 방향을 정하기 어려워지고, 정부 역시 성과를 평가할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기 힘들어진다. 정책 초기에는 유연성이 장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의 소재가 흐려지고, 성과 부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반복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정책일수록, 목표의 불명확성은 정책에 대한 신뢰를 빠르게 잠식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의 내부 변화다. 대학은 외부에서 제시된 모호한 목표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대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관성과 이해관계가 우선될 가능성이 높다. 명확한 선택 없이 모든 방향을 열어둔 정책은,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채 기존 구조를 유지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책이 의도한 체제 전환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호함이 아니라 선택이 필요하다.

이번회차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성패는 재정 규모나 사업 수의 문제가 아니라 거점국립대학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과 지역 중심 연구거점대학은 모두 의미 있는 목표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동시에 달성될 수 있는 목표는 아니다. 정책이 이 둘 사이에서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거점국립대학은 어느 쪽에서도 충분한 성과를 내기 어려운 구조에 놓일 수 있다. 이 선택은 단순히 대학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할 경우, 고등교육 체제는 다시 국제 경쟁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며, 지역 간 격차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될 수 있다. 반대로 지역 혁신 허브를 선택할 경우, 대학의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과 사회적 기대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는 한국 고등교육이 무엇을 가치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러한 선택이 실제 정책 설계와 재정 지원 구조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거점국립대학에 대한 집중 지원이 어떤 방식으로 책무성과 연결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구조가 과거 대학재정지원 정책의 한계를 반복하고 있는지 여부를 분석할 예정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또 하나의 재정 사업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체제 전환의 출발점이 될 것인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된다.

[연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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