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만드는 대학은 왜 스스로 바뀌지 못하나

대학의 다음 경쟁력은 ‘혁신’이 아니라 적응역량…사명은 지키되 구조는 다시 물어야 한다

대학은 사회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관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질병의 치료법을 연구하며, 인공지능과 첨단산업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기업가와 과학자, 교사와 의료인, 예술가와 공공의 지도자를 길러내는 곳도 대학이다. 그런데 정작 대학 자신의 제도와 조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대학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면서도 학과 구조, 학기제, 학위체계, 교원평가, 의사결정 방식과 같은 내부 시스템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진 관행을 유지한다. 혁신을 가르치고 만들어내는 기관이 스스로를 혁신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데이비드 로소스키 애리조나주립대 총장 선임고문은 최근 포브스 기고문에서 이 역설을 지적하며, 대학의 다음 과제는 ‘혁신’이 아니라 ‘적응역량(Adaptive Capacity)’이라고 주장했다. 혁신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면, 적응은 그 가능성을 실제 제도와 운영에 반영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대학은 전자에는 익숙하지만 후자에는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진단이다.

대학이 변화에 느린 이유를 단순히 관료주의나 보수성에서만 찾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대학은 애초에 빠르게 변하도록 설계된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은 지식을 보존하고, 비판적 사고를 계승하며, 세대와 세대를 넘어 학문과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치권력의 변화나 경기 변동, 기술 유행에 따라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대학의 중요한 가치였다. 짧은 성과보다 장기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당장의 효율보다 충분한 검토와 숙의를 중시해 왔다.

대학이 수백 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속성 덕분이다. 따라서 대학의 느림은 반드시 결함이라고만 볼 수 없다. 오히려 오랜 시간 지식과 가치를 지켜온 대학의 핵심적인 힘이었다. 문제는 대학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너무나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는 데 있다. 오랜 시간 지식을 보존하는 데 최적화된 조직이 이제는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제도까지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과거 대학은 시대와 시대 사이에서 변화했다. 중세 대학에서 근대 연구대학으로, 소수 엘리트를 위한 교육기관에서 대중 고등교육 체제로, 국가와 지역을 위한 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연결된 연구기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수십 년, 때로는 여러 세대가 필요했다.

지금 대학에 주어진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다. 인공지능, 인구구조 변화, 노동시장 재편, 학습 방식의 다양화, 대학에 대한 사회적 기대 변화가 차례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대학이 하나의 변화에 대응하는 동안 다음 변화가 이미 시작되는 시대다.

사명과 구조를 구분해야 한다

적응역량은 대학의 전통과 정체성을 버리는 능력이 아니다. 모든 기술 유행을 따라가거나 대학을 기업처럼 운영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오히려 적응역량의 출발점은 대학의 사명과 그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를 구분하는 데 있다. 대학의 교육과 연구, 진리 탐구와 인재 양성은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될 목적이다. 그러나 학과의 경계, 학기 운영 방식, 학위 구성, 교수의 보상체계, 위원회와 거버넌스, 학생과 대학의 관계는 그 목적 자체가 아니다. 특정한 시대적 조건에서 대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단이다.

광고
대학

문제는 대학이 때때로 목적과 수단을 동일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기존의 학과 구조를 지키는 것이 학문을 지키는 일로 간주되고, 오랫동안 유지된 학사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이 대학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일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제도를 보호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명이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대에 맞지 않는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 대학이 지키고자 했던 교육과 연구의 목적이 약화될 수도 있다.

대학이 계속 물어야 할 질문은 명확하다.

오늘의 제도는 여전히 대학의 오래된 사명을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가.

지금 대학을 처음부터 설계한다면 지식을 현재와 같은 학과 단위로 나눌 것인가. 지금과 같은 학기제를 운영할 것인가. 학위를 같은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가. 교수의 교육·연구·사회기여를 현재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답은 반드시 ‘아니다’일 필요가 없다. 오랜 제도 가운데에는 지금도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있고, 충분히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전통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유지하거나,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사명에 필수적이고 무엇이 과거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관행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이다.

변화의 속도보다 판단의 정확성이 중요하다

적응하는 대학을 단순히 변화가 빠른 대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변화의 횟수나 속도가 적응역량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은 사회의 유행을 그대로 따라가는 기관이 아니다. 충분한 검토와 토론, 학문공동체의 합의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다. 빠르게 바꾸는 것보다 제대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숙의가 변화하지 않기 위한 명분이 돼서도 안 된다. 대학의 전통은 보호할 가치가 있지만, 오래됐다는 사실만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제도의 존속기간이 그 제도의 효과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적응역량이 높은 대학은 모든 것을 바꾸는 대학이 아니라 무엇을 바꾸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대학이다. 동시에 대학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를 바꿀 수도 있어야 한다.

한국 대학에도 이 구분은 중요하다. 학령인구 감소와 인공지능 확산, 전공 간 경계의 변화와 성인학습 수요 확대를 앞에 두고 많은 대학이 학과 개편과 교육과정 혁신, 무전공 선발, 마이크로디그리와 같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운 사업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적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 구조 위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계속 얹는 방식은 혁신처럼 보일 수 있지만, 대학의 운영방식과 의사결정 구조가 그대로라면 변화는 주변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사업을 얼마나 많이 시작했는가보다 그 경험을 통해 대학 자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구조를 수정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학생만 배우는 대학에서 대학도 배우는 조직으로

대학은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라고 가르친다. 기존의 가정을 의심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키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대학 조직은 이러한 요구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하고 있는가.

학생에게 평생학습을 강조하면서 대학은 과거의 운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연구자에게 기존 이론을 비판하라고 요구하면서 조직 내부의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는 어렵게 만든다면 대학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로소스키는 미래 대학이 단순히 학습이 일어나는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대학 자체가 학습하는 조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한 제도와 사업을 평가하고, 구성원의 경험을 축적하며, 변화한 환경에 맞게 조직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대학이 ‘박물관’이자 ‘생태계’가 돼야 한다고 비유한다. 박물관은 인류의 지식과 기억을 보존한다. 생태계는 환경 변화에 따라 자신을 조정하고 진화한다. 대학은 지식을 지키는 박물관의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생태계처럼 지속적으로 갱신돼야 한다.

대학의 미래 경쟁력은 순위와 재정 규모, 학생 수, 연구비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다시 설계할 수 있는 대학이 변화의 시대를 견딜 가능성이 높다.

대학이 지켜야 할 것은 과거의 제도가 아니라 대학의 사명이다. 기존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사명을 지키는 일인지, 오히려 사명을 약화시키는 일인지 묻는 데서 변화는 시작된다.

혁신을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학은 자신이 만들어낸 변화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학생에게 배우는 법을 가르쳐 온 대학이 이제는 스스로 배우는 법을 증명해야 할 때다.

#대학혁신 #적응역량 #고등교육 #대학구조개혁 #학사제도 #대학거버넌스 #AI시대대학 #학령인구감소 #스포트라이트유

Social Share

More From Author

전남대, 서남권 반도체 인재양성 협력회의 개최… 대학·기업·교육부·지자체 70여 명 참석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