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랜드 연방지법, 교육부의 반(反)DEI 행정지침 무효화… 학교·대학 다양성 프로그램 ‘숨통’
미국 메릴랜드 연방지방법원이 2025년 8월 14일(현지시간),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학교와 대학의 다양성·형평성·포용(DEI, Diversity, Equity, Inclusion) 프로그램 금지 행정지침을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이번 결정은 미국 교육 현장에서 오랫동안 유지돼 온 포용 정책을 지키려는 움직임에 중요한 승리를 안겨줬다. 판결 직후 미국 전역의 학교와 대학들은 중단 위기에 놓였던 DEI 프로그램을 계속 운영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했고, 교육자와 학생 모두에게 한숨 돌릴 시간을 제공하게 됐다.
트럼프 행정부 교육부는 2025년 들어 불과 두 달 간격으로 두 차례의 강경한 행정지침을 내놓았다. 2월에 발표된 첫 번째 지침은 연방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학교와 대학이 DEI 전담 직원을 고용하거나, 다양성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거나, 형평성과 포용을 주제로 한 위원회를 설치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4월에 이어진 두 번째 지침은 그 범위를 더욱 확대해, 인종·성별·민족·성적지향과 같은 요소를 고려한 입학, 채용, 승진 절차를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특히 이를 위반하는 경우 해당 교육기관에 대한 연방 교육기금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덧붙여, 사실상 DEI 정책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두 지침 모두 헌법상 평등보호조항 준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학교 현장에서 다양성과 포용을 증진하기 위해 운영돼 온 프로그램들을 일괄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국 보수 진영은 DEI를 역차별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폐지를 주장해왔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정치적 기조를 교육 현장에 직접 반영하려 했다. 그러나 반대 측에서는 교육의 질과 기회의 형평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 조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연방법원 판결 요지 – 절차 위반과 권한 남용 지적
메릴랜드 연방지방법원의 판사는 이번 사건에서 행정절차법(Administrative Procedure Act)을 핵심 판단 근거로 삼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교육부는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공개 의견수렴 절차와 법률 검토 절차를 생략했다. 이는 행정기관이 법률로 위임받은 권한을 초과해 자의적으로 정책을 강행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민주주의 제도의 기본 원칙을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됐다.
또한 법원은 해당 지침이 학교와 대학의 교육 자율성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교육 제도에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은 중요한 수단이지만, 이를 이용해 교육기관의 프로그램 운영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는 것은 연방 의회의 입법 권한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은 단순히 DEI 정책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행정권력의 범위와 한계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 소송은 전국교원협회(NEA), 미국사회학회(ASA), 일부 주 정부 교육청, 그리고 학생과 교수 개인이 공동으로 제기했다. 원고들은 두 가지 점에서 지침의 문제를 강조했다. 첫째, 지침이 시행되면 학생 멘토링과 튜터링 프로그램이 대폭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소수인종 학생과 저소득층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던 학업 지원 프로그램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둘째, 교사 연수와 직무교육에서 다양성과 포용 관련 내용이 제거되면 교원들의 전문성이 저하되고, 학생들과의 상호 이해 수준이 낮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원고 측은 지침이 단순히 행정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장애학생 지원센터와 같은 특수 지원 조직의 운영이 중단될 가능성, 캠퍼스 내 문화다양성 행사 축소 등도 부정적인 파급효과로 언급됐다. 이들은 DEI 프로그램이 단지 형식적인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소수자와 취약계층이 동등한 기회를 얻는 데 필수적인 장치라고 주장했다.
캘리포니아, 뉴욕, 일리노이 등 민주당 주 정부들은 지침이 발표된 직후부터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경우 주법에 DEI 프로그램 지원을 의무화하는 조항이 있어, 연방 지침을 그대로 따를 경우 주법을 위반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주 정부와 연방정부 간의 법적 충돌 가능성이 현실화됐다. 캘리포니아주 교육국 관계자는 LA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연방 지침이 “교육 현장의 다양성을 후퇴시키는 정치적 결정”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발언은 단순한 정책 비판을 넘어, DEI 문제를 둘러싼 연방과 주 간 권력 대립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주 정부들은 연방 지원금이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DEI 프로그램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법정 다툼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판결의 파급효과 – 교육 현장의 즉각적인 변화
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직후, 미국 전역의 공립학교와 대학은 DEI 프로그램 운영 계획을 다시 정비하기 시작했다. 당초 예산 삭감과 프로그램 폐지를 준비하던 기관들은 즉각 중단 결정을 번복했고, 가을학기에 예정된 다양성 세미나와 워크숍 일정을 재확정했다. 일부 대학은 지침의 위법성 판결을 계기로, 오히려 DEI 프로그램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이번 판결은 교육기관뿐 아니라 관련 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DEI 전문 강사와 컨설턴트, 프로그램 기획자들은 계약 연장이 불확실했던 상황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학생 단체들도 판결을 환영하며, 이를 계기로 DEI의 중요성을 학생 사회에 더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DEI는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 교육과 기업, 공공기관에 걸쳐 빠르게 확산돼 왔다. 그러나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역차별’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폐지를 요구해왔다. 특히 공화당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DEI 축소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면 민주당은 DEI를 포용과 형평성의 상징으로 보고, 유지와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단순히 교육 정책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미국 정치에서의 양당 대립 구도를 다시금 뚜렷하게 드러냈다. 법원의 결정이 항소심이나 대법원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남아 있는 만큼, DEI 문제는 선거 국면에서 더욱 격렬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한국은 미국처럼 DEI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진 않지만, 대학과 학교에는 다문화학생 지원센터, 장애학생 지원센터, 성평등·인권센터 등 유사한 기능을 하는 조직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예산 구조가 미국처럼 연방정부-주정부-교육기관으로 층층이 연결돼 있지 않아, 정책 변화가 현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판결은 한국 교육계에도 함의를 준다. 특히 정권 변화에 따라 교육 현장의 포용정책이 크게 변동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취약집단을 위한 프로그램이 언제든 축소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판결 직후 항소 의사를 밝혔다. 법률 전문가들은 행정절차법 위반이라는 절차적 결함을 보완한 새로운 지침이 다시 발표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또다시 법적 다툼을 불러올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대법원의 판단을 받게 될 공산이 크다. 원고 측은 항소심에서 불리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번 판결이 DEI의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법적 투쟁과 병행해, 대중적 지지 확보를 위한 홍보와 교육 활동을 강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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