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대졸 신입직을 압축한다면 대학의 위기는 강의 대체가 아니라 경력 형성 구조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매슈 F. 윌슨의 ‘2031년 고등교육 위기’는 예측 보고서가 아니다. 2024년부터 2026년까지 나타난 인구·재정·노동시장 변화를 토대로, 인공지능의 발전이 미국 고등교육에 어떤 연쇄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지를 그려본 시나리오다. 저자 역시 문서 첫머리에서 이를 미래에 대한 확정적 전망이 아니라 대학 경영자와 정책결정자를 위한 사고실험이라고 밝힌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대학 폐교 숫자나 등록자 감소율 때문만은 아니다. 보고서가 대학과 노동시장의 관계에서 그동안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취약점을 정확히 짚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없애는 것은 직업 전체가 아니라 경력에 진입하는 첫 번째 단계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학은 오랫동안 교육기관이면서 노동시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학생과 가정은 등록금과 시간을 투자하고, 대학은 지식과 학위를 제공하며, 기업은 졸업생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했다. 졸업생은 조직의 가장 아래에서 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며 경험을 쌓고, 점차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자리로 이동했다. 대학 졸업장이 가치 있었던 것은 학위 자체가 지식을 증명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학위가 신입사원, 주니어 연구원, 수습 변호사, 회계법인 1년 차 직원, 초급 개발자와 같은 ‘경력의 첫 자리’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가장 먼저 흡수하는 업무는 상당 부분 신입사원이 담당하던 일이다. 자료 조사, 문서 요약, 데이터 정리, 기초 코딩, 계약서 검토, 보고서와 발표자료 작성은 오랫동안 초급 인력이 조직과 산업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기업이 경험 많은 직원 한 명과 여러 개의 AI 에이전트를 활용해 과거 신입사원 여러 명이 수행하던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기업이 채용하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업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업무를 배우기 위해 조직에 들어가는 자리는 감소한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는 단순한 청년고용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주니어 변호사가 줄어들면 미래의 파트너 변호사는 어디서 성장하는가. 신입 분석가를 채용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의 선임 분석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초급 개발자가 실제 프로젝트에서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다면 누가 복잡한 시스템에 책임을 지는 시니어 개발자가 되는가. AI는 현재의 일자리를 압축하는 동시에 미래의 전문가를 길러내던 견습구조까지 약화시킬 수 있다.
AI학과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다
대학은 변화가 나타날 때 새로운 학과와 교육과정을 만든다. 인공지능학과, AI융합전공, 데이터사이언스 과정, 생성형 AI 활용교육이 빠르게 확대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필요한 변화이기도 하다. 이제 학생이 AI를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한다면 대부분의 직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러나 AI 활용법을 가르치는 것과 AI 시대에 필요한 사람을 기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윌슨의 시나리오는 AI 리터러시가 일정 기간에는 희소한 능력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타이핑이나 인터넷 검색처럼 보편적인 역량이 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AI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성장한 세대에게 프롬프트 작성이나 모델 활용은 별도의 고가 학위과정을 통해 습득해야 하는 전문지식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AI 도구의 사용법만 필요하다면 대학보다 짧고 저렴한 교육이 유리하다. 온라인 강좌와 기업교육, 단기 인증과정은 대학보다 빠르게 기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학의 질문은 “학생들에게 AI를 가르칠 것인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AI가 생산한 결과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결과가 잘못됐을 때 누가 책임질 것인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경험이 부족한 학생이 어떻게 실제 문제를 다루며 전문가로 성장할 것인가. 대학이 답해야 할 것은 도구의 사용법이 아니라 판단과 책임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대학이 견습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신입 일자리가 줄어드는 시대에는 대학이 노동시장에 학생을 넘겨주기 전에 더 많은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지금까지 대학은 지식을 가르치고 학위를 수여한 뒤, 실제 직무경험의 상당 부분을 기업에 맡겼다. 기업은 신입사원의 낮은 생산성을 감수하면서 업무를 가르쳤고, 그 과정에서 미래의 숙련인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기업이 더 이상 대규모 신입교육을 부담하지 않으려 한다면 대학이 담당해야 할 범위도 달라진다.
수업에서 몇 차례 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발표자료를 만드는 수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생이 실제 문제를 장기간 맡고, 고객이나 지역사회, 기업, 공공기관과 협력하며, 실패와 수정의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 연구실, 현장실습, 캡스톤디자인, 임상실습, 창업 프로젝트, 지역문제 해결, 스튜디오 교육은 교육과정의 부가적인 활동이 아니라 학위의 중심이 돼야 한다. 학생은 졸업할 때 성적표만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판단했고, 어떤 결과를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책임을 맡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AI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도 답이 아니고, AI가 만든 결과물을 그대로 제출하게 하는 교육도 답이 아니다. 학생이 AI를 활용해 더 높은 수준의 문제에 도전하되, 결과의 정확성과 타당성에 대해서는 자신이 설명하고 책임지게 해야 한다.
대학이 제공해야 할 첫 번째 가치는 더 이상 정보의 독점이 아니다. 아직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실제 문제를 다뤄볼 수 있도록 보호된 경험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AI 시대 대학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비판적 사고, 창의성, 소통, 윤리, 인격 형성이 자주 등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거의 모든 대학이 이미 오래전부터 같은 말을 해왔다는 데 있다.
대학의 설립이념과 인재상에는 비판적 사고와 공동체 정신이 포함돼 있지만, 실제 교육과정은 여전히 지식 전달과 시험, 학점 취득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대학이 취업 성과를 강조하면서도 상황이 불리해지면 갑자기 ‘인간을 형성하는 교육기관’이라고 주장한다면 학생과 학부모를 설득하기 어렵다.
형성은 강의 한 과목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학생이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과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정답이 없는 문제를 검토하며,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경험해야 한다. 교수는 답을 전달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학생의 판단 과정을 살피고, 질문하고, 반박하며,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AI도 윤리적인 문장을 작성하고 인생의 의미에 관한 답변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AI는 그 답변에 따라 살아가지 않으며,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지도 않는다.
대학이 제공해야 할 것은 ‘AI가 말하지 못하는 답’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답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도록 훈련하는 관계와 공동체다.

한국 대학도 이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윌슨의 시나리오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높은 사립대학 등록금과 대규모 학생대출, 전문대학원의 교차보조 구조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대학에는 더 직접적인 압력이 존재한다. 학령인구 감소 속도가 빠르고, 대학 선택에서 취업 가능성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특히 지역대학은 입학생 감소와 지역 청년 유출, 산업기반 약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모든 대학이 AI학과를 만들고 모든 전공에 AI를 붙이는 것만으로 차별화하기는 어렵다. AI융합이라는 명칭이 대학의 미래전략을 대신할 수도 없다. 각 대학은 자신이 학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경험이 무엇인지부터 답해야 한다.
어떤 대학은 지역산업과 연결된 직무교육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다. 어떤 대학은 보건·의료·돌봄처럼 면허와 현장실습이 중요한 분야에 집중할 수 있다. 어떤 대학은 기초연구와 첨단산업 연구에서 역할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대학은 소규모 공동체와 밀도 높은 교육, 인문적 성찰을 중심으로 존재 이유를 세울 수 있다.
모든 대학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더 위험한 선택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기존 학과와 조직에 AI 교과목 몇 개를 추가하고 변화했다고 믿는 것이다.
AI 시대에도 대학은 필요하다. 다만 과거와 같은 이유로 당연히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학 진학이 안정적인 화이트칼라 일자리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약해지면, 대학은 학생에게 새로운 약속을 제시해야 한다. 그 약속은 단순히 “AI가 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겠다”는 선언이어서는 안 된다.
학생이 실제 문제를 만나도록 하겠다는 약속, 실패하면서 배울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 AI의 결과를 검증하고 자신의 판단을 설명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어야 한다. 학생을 익명의 학번으로 처리하지 않고, 한 사람의 성장을 장기간 관찰하고 평가하겠다는 약속이어야 한다. 대학이 지식을 전달하는 곳에 머문다면 AI와 온라인 교육보다 느리고 비싼 기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지식과 경험, 관계와 책임을 결합하는 곳으로 바뀐다면 대학은 여전히 대체하기 어려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첫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다면 대학은 학생에게 더 좋은 입장권을 판매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학생이 실제로 올라설 수 있는 첫 번째 칸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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