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회사가 아니다 – 위기의 시대, 고등교육에 필요한 ‘어리석은 희망’

재정 압박, 학령인구 감소, AI 충격 속에서 대학이 붙들어야 할 것은 효율이 아니라 교육의 고유한 목적이다

대학이 어렵다는 말은 이제 새롭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현실이었고, 등록금 의존도가 높은 대학일수록 그 압박은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부 재정지원사업은 대학의 생존 전략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되었고, 취업률과 충원율, 유지충원율, 연구비 수주액, 산학협력 실적 같은 지표는 대학 운영의 언어가 되었다. 여기에 온라인 교육의 확산과 생성형 AI의 등장은 대학 교육의 방식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들고 있다.

미국 고등교육을 다룬 엘리자베스 스티스의 글 「A Fool’s Hope for Higher Education」은 이런 상황에서 대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글은 전통적 고등교육이 온라인 교육, 재정 변화, 인구구조 변화, 생성형 AI로 인한 학업 부정행위 문제까지 겹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가 더 본질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위기의 목록이 아니다. 대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학 안에 남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대학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미국 대학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 대학 역시 유사한 압박 속에 있다. 신입생 충원은 지역 대학의 존립을 가르는 지표가 되었고, 대학의 교육과정은 취업 가능성과 산업 수요라는 이름으로 계속 재편되고 있다. 대학은 더 민첩해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더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효율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대학의 본질이 효율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대학은 재정을 외면할 수 없지만, 재정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관이다. 대학은 노동시장에 인력을 공급하지만, 단지 인력 공급 장치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은 사회 변화에 응답해야 하지만, 변화의 속도에 맞춰 스스로의 존재 이유까지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 대학에 필요한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무엇으로 살아남을 것인가”이다. 대학이 살아남더라도 대학다움을 잃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생존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대학을 기업처럼 운영하려는 유혹

위기의 시기에는 기업의 언어가 강해진다. 조직은 구조조정을 말하고, 구성원은 생산성으로 평가되며, 학문 단위는 수익성과 수요로 설명된다. 학생은 학습자이면서 고객으로 불리고, 교육과정은 상품처럼 포장되며, 대학의 성공은 브랜드 가치와 시장 경쟁력으로 환산된다. 물론 대학도 조직이다. 예산을 관리해야 하고, 변화에 대응해야 하며, 무책임한 운영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대학이 기업의 도구를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를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스티스는 대학에 기업 세계의 직함과 지표를 이식하는 흐름이 대학 모델과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주주 이익과 수익 극대화를 중요한 목표로 삼지만, 대학 총장과 대학의 리더십은 주주가 아니라 학생, 교수, 직원, 동문, 그리고 대학 자체의 교육적 사명을 향해 책임을 져야 한다. 대학이 비영리기관이거나 공공성을 지닌 기관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법적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이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대학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낯설지 않다. 대학은 점점 더 기업의 전략기획실처럼 움직이고, 구성원은 각종 평가와 인증, 재정지원사업의 지표를 맞추기 위해 움직인다. 대학 본부의 언어는 교육보다 관리에 가까워지고, 학과와 교수는 학문 공동체라기보다 실적 단위처럼 다루어질 때가 있다. 학생 지원도 때로는 학생 한 사람의 성장보다 지표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획된다. 대학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체계적인 행정과 전략을 갖추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행정과 전략이 교육의 목적을 대신할 때, 대학은 본래의 방향을 잃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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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대학을 회사처럼 운영하자는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대학은 회사가 아니다. 대학의 성과는 분기별 실적표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대학의 교육은 졸업 직후의 임금만으로 평가될 수 없고, 대학의 연구는 당장의 시장성만으로 판단될 수 없다. 대학이 길러내는 것은 특정 직무에 즉시 투입될 인력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판단하고 토론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 역할은 느리고, 복잡하며,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비효율처럼 보이는 시간이 대학 교육의 핵심일 수 있다.

현대 대학의 위기는 재정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상상력의 문제다. 대학이 어려워질수록 리더십은 더 과감한 전환을 말한다. 혁신 캠퍼스, 미래형 교육, 새로운 수익 모델, 산업 연계 플랫폼, 글로벌 허브 같은 표현들이 대학의 미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시도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학은 시대와 단절되어 존재할 수 없고, 교육 방식도 사회 변화에 맞게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대학의 미래를 말하는 많은 언어가 정작 대학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은 문제다.

스티스는 일부 대학 리더들이 대학을 전혀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한다고 비판한다. 대학이 대학으로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오히려 대학을 대학이 아닌 다른 조직처럼 만들려는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대학을 살리겠다며 오히려 대학을 태워 없애는 방식의 전환을 경계한다. 전통적 학문과 교육의 자리를 줄이고, 혁신과 수익의 이름으로 대학의 정체성을 바꾸려는 시도가 정말 대학을 살리는 길인지 묻는다.

한국 대학의 현실에서도 이 질문은 중요하다. 대학들은 생존을 위해 학과 구조조정과 교육과정 개편을 반복한다. 인문사회계열은 취업률과 충원율의 압박 속에서 방어적 위치에 놓이고, 기초학문은 재정 논리 앞에서 설 자리를 잃기 쉽다. 반대로 첨단산업, 반도체, AI, 바이오, 모빌리티, 이차전지 같은 분야는 대학 전략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물론 사회가 필요로 하는 분야를 대학이 외면할 수는 없다. 문제는 대학이 특정 산업 수요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게 하는 학문적 기반을 주변부로 밀어낼 때 발생한다.

대학은 기술 훈련기관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학은 직업교육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대학의 존재 이유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대학은 산업과 협력해야 하지만, 산업의 즉각적 필요가 대학 전체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대학이 사회 변화에 응답하려면 오히려 더 넓은 지적 토대가 필요하다. AI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기술만이 아니라 윤리, 법, 인간 이해, 노동의 변화, 지식의 생산 방식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첨단산업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도 단기 기술 습득을 넘어 문제를 정의하고 판단하며 협력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대학이 단순한 직무 훈련소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이 단어는 대학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좋은 교육은 언제나 깔끔하지만은 않다. 학생은 계획표대로 성장하지 않고, 학문은 성과지표의 속도대로 진전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중요한 배움은 때로 수업계획서 바깥에서 일어나고, 한 권의 책을 읽는 시간, 한 번의 토론, 한 명의 교수와 나눈 대화 속에서 형성된다. 이런 것들은 측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좋은 대학은 수익 모델이 아니라 사람을 길러내는 장소다

대학이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말은 옳다. 빚에 짓눌린 대학, 학생을 모집하지 못하는 대학, 시설과 인력을 유지할 수 없는 대학은 좋은 교육을 지속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학의 경영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경영이 교육의 목적을 섬기는 수단인지, 교육의 목적을 대체하는 기준인지에 있다. 스티스는 번성하는 대학을 이윤 극대화나 수익 다변화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건강한 대학은 잘 형성되고 교육받은 개인을 길러내며, 공동선에 기여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비영리 지위를 갖고, 사람들은 대학에 기부하며, 사회는 대학을 단순한 사업체와 다르게 대우한다.

이 대목은 한국 대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학의 성과는 취업률로만 설명될 수 없다. 취업률은 중요하지만, 대학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대학의 성과는 연구비 수주액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연구비는 필요하지만, 연구의 의미가 금액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대학의 성과는 신입생 충원율로만 설명될 수 없다. 충원율은 대학의 생존 지표이지만, 충원된 학생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좋은 대학은 학생을 통계 속 숫자로만 보지 않는다. 좋은 대학은 학생을 입학, 재학, 졸업, 취업의 흐름으로만 관리하지 않는다. 좋은 대학은 학생이 어떤 질문을 갖고 들어왔는지, 대학 안에서 어떤 지적 자극을 받았는지, 졸업 후 어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고민한다. 그것은 느리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대학이 이 일을 포기한다면, 대학은 스스로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를 내려놓는 셈이다.

특히 생성형 AI의 확산은 대학에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제를 대신 작성하고, 요약문을 만들고, 코드와 보고서를 생성하는 도구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대학은 평가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AI의 등장이 대학의 역할을 축소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은 학생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보다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는지를 더 깊이 확인해야 한다. 지식의 전달이 쉬워질수록, 지식을 다루는 태도와 기준은 더 중요해진다. 표절을 잡아내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학은 학생이 왜 스스로 읽고 써야 하는지, 왜 타인의 생각을 정직하게 다루어야 하는지, 왜 자신의 언어로 사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런 교육은 회사의 성과관리 방식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대학 교육은 비용 대비 효과의 계산만으로 설계될 수 없다. 대학은 학생에게 더 빠른 길만 제시하는 곳이 아니라, 때로는 돌아가더라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끄는 곳이어야 한다. 회사는 실패 비용을 줄이려 하지만, 대학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시간을 허용해야 한다. 회사는 즉각적인 성과를 요구하지만, 대학은 나중에야 의미가 드러나는 배움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 대학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구호가 아니다

한국 대학은 이미 수많은 구호를 갖고 있다. 혁신, 융합, 창의, 글로벌, 지역상생, 미래인재, 디지털 전환, 산학협력은 거의 모든 대학의 비전 문서에 등장한다. 문제는 구호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구호들이 대학의 구체적인 교육 경험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 구호들이 대학의 본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가, 아니면 대학의 본질을 가리는 장식어로 쓰이고 있는가다.

지역 대학의 위기는 특히 이 질문을 날카롭게 만든다. 학령인구 감소 속에서 지역 대학은 생존을 위해 지역산업과 연결되고,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며, 평생교육과 외국인 유학생 유치, 성인학습자 교육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 대학이 단순히 지역 인력 공급 기관으로만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 대학은 지역 청년이 세계를 이해하는 창이고, 지역사회가 지적·문화적 활력을 유지하는 기반이며, 지역의 문제를 장기적으로 사유하는 공적 기관이다. 지역 대학의 소멸은 단지 학교 하나가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할 기반을 잃는 문제다.

수도권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규모와 브랜드가 대학다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학생, 더 많은 재정, 더 높은 순위가 곧 더 좋은 대학을 뜻하지 않는다. 대학이 크고 강해질수록 오히려 스스로의 교육 철학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 대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다면, 그 영향력은 더 높은 입시 점수와 더 많은 재정 수주만이 아니라 어떤 인간을 길러내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학에는 다른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학 리더는 경영을 알아야 하지만 경영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예산을 다루어야 하지만 숫자의 언어만으로 대학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산업 변화를 읽어야 하지만 산업의 속도에 대학 전체를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대학 리더는 학문을 존중해야 하고, 학생의 성장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대학이라는 제도가 왜 사회에 필요한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사랑해야 하고, 직원은 대학 행정이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학생은 대학을 단순한 자격 취득의 통로로만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 지금 대학이 처한 현실은 낭만적 언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등록금은 제한되어 있고, 재정은 부족하며, 학생 수는 줄어든다. 그러나 현실이 어렵다는 이유로 대학의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다. 대학이 회사가 되겠다고 해서 더 강한 회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다움을 버린 대학이 더 매력적인 교육기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리석은 희망’이 필요한 이유

스티스의 글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옹호다. 고등교육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대학이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람, 대학을 전혀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떠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남아야 할 사람은 대학이라는 제도의 고유한 선을 믿고, 특정한 대학이 가진 장소성과 전통과 사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성공하는 대학은 고등교육의 고유한 가치와 각 기관의 독특한 전통을 받아들이는 곳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 말은 한국 대학에도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대학 안에는 정말 대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대학을 단순히 직장으로만 보는 교수, 학생을 민원인으로만 보는 행정, 학문을 실적으로만 보는 평가, 대학을 사업 수주 기관으로만 보는 리더십이 커질 때 대학은 서서히 비어간다. 건물은 남고 조직도는 유지되지만, 대학을 대학답게 만드는 정신은 약해진다.

대학에는 어리석은 희망이 필요하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말은 현실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알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학생이 한 학기 수업으로 완전히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의실에 들어가는 일, 당장의 취업과 무관해 보이는 책을 읽히는 일, 성과지표에 잘 잡히지 않는 상담과 토론과 피드백을 계속하는 일, 지역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을 다시 설명하는 일은 모두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은 그런 어리석음 위에서 유지되어 왔다.

대학은 회사가 아니다. 대학은 공장도 아니고 플랫폼도 아니며, 단순한 자격증 발급기관도 아니다. 대학은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방식이다. 더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길, 더 효율적으로 기술을 익히는 길, 더 즉각적으로 성과를 내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대학이라는 제도를 유지해온 이유는 인간의 성장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대에 대학은 변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바꾸는 것이 혁신은 아니다. 바꾸어야 할 것은 낡은 관행이지 대학의 본질이 아니다. 줄여야 할 것은 무책임한 비효율이지 깊은 배움의 시간은 아니다. 강화해야 할 것은 관리의 언어가 아니라 교육의 신뢰다. 대학이 다시 질문해야 할 것은 “우리는 얼마나 기업처럼 민첩한가”가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대학인가”이다.

대학을 살리는 힘은 거창한 구호보다 깊은 신념에서 나온다. 대학이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믿음, 학문이 사회를 지탱하는 느린 힘이라는 믿음, 학생 한 사람의 변화가 공동체의 미래와 연결된다는 믿음이 사라지면 대학은 껍데기만 남는다. 반대로 그 믿음이 남아 있다면, 대학은 위기 속에서도 다시 자신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냉소가 아니라 분별력 있는 희망이다. 대학이 모든 것을 예전처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대학은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대학이 회사가 되는 방식으로 달라져서는 안 된다. 대학은 더 대학다워지는 방식으로 달라져야 한다. 그 길은 느리고, 손해처럼 보이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지켜온 힘은 언제나 그런 어리석은 희망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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