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너무 많은 대학, 무엇이 사라졌나 ? 성적 인플레이션 논쟁이 다시 묻는 ‘학생 학습’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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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에서 A 학점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지 오래다. 일부 대학에서는 전체 성적의 절반 이상이 A 범위에 속한다는 통계도 낯설지 않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크게 향상된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현상을 ‘학습의 진보’로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다. 오히려 성적 인플레이션은 대학 교육의 난이도와 평가 기준이 전반적으로 완화됐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되는 경우가 더 잦다. 성적이 상승하는 동안 학생들이 실제로 무엇을 얼마나 배우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이 문제를 다시 전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2025년 가을 미국 연방정부가 발표한 ‘고등교육 학문적 탁월성 컴팩트(Compact for Academic Excellence in Higher Education)’였다. 이 정책 문서는 성적 인플레이션을 단순한 평가 관행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 학습(student learning)의 붕괴와 직결된 사안으로 규정했다. 이후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AEI)는 해당 컴팩트의 쟁점을 확장하는 보고서를 통해 성적 인플레이션을 고등교육 구조 전반의 문제로 재정의했다.

성적 인플레이션은 왜 ‘학습 문제’인가

AEI 보고서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성적은 학생이 과목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역량을 반영해야 하며, 비학문적 이유로 상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 이 원칙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A 학점의 비율이 꾸준히 상승해온 지난 수십 년 동안, 표준화 학력 평가나 기초 학문 역량 지표는 오히려 하락하거나 정체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성적 상승이 학생의 지적 능력 향상이나 학습 성과의 누적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보고서는 성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대학 내부에서 찾는다. 강의평가, 학생 만족도, 등록률, 학과 존속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과목 난이도는 점진적으로 낮아지고, 평가 기준은 느슨해진다. 특히 교양 교육과 인문사회 계열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고전 텍스트와 이론 중심의 강독이 일반적이었지만, 현재는 주제 중심·현대 문화 중심 과목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교육 내용의 현대화라는 명분을 갖지만, 동시에 학습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해왔다.

성적 인플레이션은 개별 교수의 평가 관대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보고서는 학과 간 경쟁이라는 구조적 요인을 지적한다. 학생 수가 곧 재정과 직결되는 환경에서, 학과는 ‘어려운 전공’보다는 ‘선택하기 쉬운 전공’으로 인식되길 원하게 된다. 성적 분포가 엄격한 학과는 상대적으로 기피 대상이 되고, 이는 곧 학과 축소나 통폐합 압력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교수 개인은 성적 인플레이션을 거부하기 어렵다. 엄격한 평가를 유지할 경우 강의평가 하락, 학생 불만, 행정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이 지점에서 “개별 교수나 학과에 자율을 맡겨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성적 인플레이션은 개인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공개’라는 해법, 성적 분포를 드러내다

미국 정부의 컴팩트와 AEI 보고서가 제시하는 첫 번째 해법은 성적 분포의 공개다. 대학과 학과가 다년간의 성적 분포를 외부에 공개하고, 동종 기관과 비교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다. 이는 직접적인 규제가 아니라 ‘공시를 통한 압박’에 가깝다. 보고서는 이를 일종의 ‘샴(shame)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학문적 탁월성을 표방하는 대학이 실제로는 과도하게 높은 A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명성과 신뢰도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접근은 평가 기준을 중앙에서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학 자율성을 일정 부분 존중한다. 동시에 성적 인플레이션을 은폐해온 관행을 깨뜨리는 효과를 노린다. 다만 성적 분포 공개만으로 학습의 질이 자동적으로 개선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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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보고서는 성적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또 다른 수단으로 대학 랭킹을 언급한다. 예컨대 U.S. News & World Report와 같은 주요 랭킹 기관이 성적 분포를 평가 요소에 포함할 경우, 대학은 인위적인 성적 상승 전략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성적 인플레이션이 많을수록 감점 요인이 되는 구조가 형성되면, 대학의 선택지는 제한된다. 또 하나의 경로는 주정부 차원의 개입이다. 일부 주에서는 교양 교육의 최소 기준을 법률로 규정해 특정 유형의 과목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교육과정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교육 내용에 대한 정치적 개입이라는 논란을 불러오지만, 보고서는 ‘학습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평가한다.

성적 인플레이션 문제는 미국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한국 대학 역시 절대평가 확대, 강의평가 중심 문화, 취업 중심 교육과정 재편 속에서 유사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성적은 높아졌지만, 학습 부담은 줄었다는 학생들의 인식은 이미 널리 공유되고 있다. 그럼에도 성적 분포와 평가 기준을 둘러싼 공개적 논의는 제한적이다. 미국의 사례가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적 인플레이션을 ‘학생 보호’나 ‘만족도 관리’의 문제로만 다루는 접근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성적이 학습을 대변하지 못하는 순간, 대학 교육의 신뢰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 논쟁의 핵심은 성적을 낮추는 데 있지 않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평가하며, 그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정의하는 데 있다. 성적 인플레이션은 그 과정에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대학이 학습의 질을 다시 전면에 놓지 않는다면, 성적 분포 공개나 랭킹 조정과 같은 외부 압력도 일시적 처방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A가 너무 많은 대학’이라는 질문은 결국 대학이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 기관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귀결된다. 성적이 아니라 학습을 말할 수 있는 대학, 그 조건을 둘러싼 논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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