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이 3천 년 전 귀향 서사에서 다시 꺼낸 사랑과 기억, 유한한 삶의 의미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고 극장을 나선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뜻밖에도 거대한 바다나 괴물, 트로이 목마 같은 장대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20년 동안 집으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 그를 기다리는 페넬로페,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아들 텔레마코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주인을 알아보는 늙은 개 아르고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그의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영화는 신과 괴물, 전쟁과 모험이 뒤섞인 고대의 대서사시를 압도적인 스케일로 펼쳐놓지만, 거의 세 시간에 걸친 항해를 따라간 끝에 마음속에 남기는 것은 의외로 소박한 질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왜 그토록 이타카로 돌아가려 했을까.
그가 왕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이타카는 그의 왕국이고, 그가 없는 사이 궁전은 구혼자들에게 침탈당했으며, 왕좌를 되찾는 것은 영웅 오디세우스에게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왕좌는 점점 이야기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 통치해야 할 영토가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페넬로페가 있고, 텔레마코스가 있으며,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놀란의 「오디세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영웅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서 오랫동안 길을 잃었던 한 남자가 다시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인 인간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원전을 알고 보면 더 잘 보이는 영화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전혀 모르는 관객에게 마냥 친절한 작품은 아니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텔레마코스가 누구인지,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가 왜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지, 키르케와 칼립소, 폴리페모스와 같은 이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영화에 진입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다. 이야기는 하나의 모험이 끝나고 다음 모험으로 넘어가는 단순한 직선 구조만을 따르지 않는다. 이타카의 현재와 오디세우스의 기억, 전쟁과 표류의 시간들이 교차하며 전개되기 때문에 원전의 기본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는 한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 그 앞뒤의 맥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초반부가 다소 낯설고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오디세이아』를 읽고 가야만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놀란은 신화의 세부를 모두 설명하지 않는 대신 감정의 중심을 비교적 분명하게 놓는다. 한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곳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이 있다. 이 단순한 정서적 축을 붙잡으면 신화 속 모든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오디세우스의 긴 항해를 따라갈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놀란은 수천 년 된 복잡한 신화적 세계를 거대한 스크린 위에 되살려놓고도 관객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을 인간에게 가장 오래된 감정에서 찾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해주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다.
원전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영화가 더 재미있는 이유도 단순히 ‘아는 장면이 나와서’만은 아니다. 놀란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꾸었는지, 익숙한 신화를 어떤 인간적인 이야기로 다시 배열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지략과 기지로 위기를 돌파하는 영웅이라면, 놀란의 오디세우스에게 그 영리함은 때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다. 전쟁의 승리는 그의 영광인 동시에 상처이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자랑인 동시에 살아남은 자가 짊어져야 할 기억이 된다. 영웅을 영웅답게 만들었던 능력이 그를 괴롭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오래된 영웅담을 그대로 숭배하기보다 그 안에 살았을 한 인간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왕보다 남편, 영웅보다 아버지
오디세우스는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트로이 목마를 생각해낸 지략가이고, 수많은 위기를 영리함과 기지로 돌파해온 왕이다. 하지만 놀란의 영화가 그에게서 끝까지 붙잡는 정체성은 의외로 사적이다. 왕이기 이전에 페넬로페의 남편이며, 전쟁 영웅이기 이전에 텔레마코스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전쟁에 승리한 영웅은 보통 개선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에게 전쟁의 끝은 귀환의 시작이 되지 못한다. 그는 계속 표류한다. 살아남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영웅이라는 이름은 얻었지만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관계에서는 점점 멀어진다. 왕이지만 자신의 나라에 없고, 아버지지만 아들의 성장과 함께하지 못하며, 남편이지만 아내를 홀로 남겨둔 채 긴 시간을 떠돈다. 그런 그를 끝까지 움직이게 하는 것은 더 큰 영광이나 새로운 정복이 아니다. 이타카다.
그렇기 때문에 오디세우스의 충성은 단순히 고국에 대한 애국심으로만 볼 수 없다. 그는 이타카라는 장소에 충성하는 동시에 그곳에 남아 있는 관계에 충성한다. 페넬로페에 대한 충성이고, 아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책임이며,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다. 바다는 끊임없이 그를 다른 곳으로 밀어내고 새로운 삶을 제시하지만 그는 결국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여기서 그 이름은 전쟁 영웅의 칭호가 아니다. 페넬로페의 남편, 텔레마코스의 아버지라는 관계 속의 이름이다.

놀란은 오디세우스를 무결한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전쟁에서 했던 선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가 떠나기 전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영리했고 용감했지만 때로 잔혹했고,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의 오디세우스는 승리와 죄책감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디세이」는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와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뛰어난 지성이 거대한 승리를 만들어냈지만, 그 승리의 결과를 바라본 뒤 이전과 같은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인물은 닮아 있다.
그러나 「오디세이」가 《오펜하이머》와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오디세우스에게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지울 수는 없지만, 남은 삶을 어디에서 누구와 살아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영화의 귀향은 그래서 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상처와 잘못을 지닌 채 다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선택에 가깝다.
페넬로페, 기다림으로 완성한 또 하나의 항해
오디세우스의 20년만큼 중요한 것이 페넬로페의 20년이다. 오디세우스가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면 페넬로페는 이타카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간은 정반대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트로이에서 바다로,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고, 여자는 같은 장소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사라진 왕국에서 페넬로페는 자신의 자리와 집을 지켜야 한다. 남편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언제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구혼자와 압박 속에서 그녀는 시간을 견딘다. 그래서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수동적인 정절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의 삶과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능동적인 행위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는 20년 동안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 사람은 돌아가기 위해 버텼고, 한 사람은 돌아올 자리를 지키기 위해 버텼다. 오디세우스의 항해가 바다를 건너는 움직임이었다면 페넬로페의 항해는 한곳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귀향’이라는 말의 중요한 조건이 숨어 있다. 돌아오는 사람만으로는 귀향이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으로 다시 가는 것은 단순한 이동일 수 있지만, 누군가가 긴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돌아감이 된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의 귀환만큼이나 페넬로페의 기다림에 의해 완성되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페넬로페가 강하게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영웅이 모험을 끝내고 돌아와 차지하는 보상이 아니다. 오디세우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간을 살아낸 또 하나의 주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때 중요한 것은 ‘영웅이 아내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20년을 버텨온 두 사람이 마침내 다시 같은 시간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아들과 멘토, 그리고 오디세우스를 기억하는 존재들
텔레마코스에게 오디세우스는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전설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기억보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오디세우스를 위대한 전쟁 영웅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최고의 지략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들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아마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정말 내 아버지인가’, ‘나는 어떤 사람의 아들인가’라는 질문이 텔레마코스의 여정을 움직인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두 개의 항해가 있다. 오디세우스는 아들에게 돌아가고,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서로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반대편에서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 멘토와 같은 인물들이 그 과정에서 남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부재한 시간 동안 그의 가족과 왕국은 완전히 멈춰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떠받치고 있었다.
놀란의 영화에서 늘 중요했던 ‘시간’은 여기서 유난히 잔인하게 느껴진다. 20년이라는 숫자는 단지 긴 세월을 뜻하지 않는다. 그 사이 어린아이는 어른이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잃는다. 아내와 남편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삶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다. 아무리 이타카에 돌아간다고 해도 그 20년은 되찾을 수 없다. 《인터스텔라》에서도 놀란은 비슷한 상실을 그렸다. 우주의 시간 차이로 인해 아버지는 딸의 성장 시간을 잃는다. 다시 만났을 때 사랑은 남아 있지만 시간은 이미 지나가 있다.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 역시 돌아왔다고 해서 텔레마코스의 어린 시절을 다시 살 수 없다. 귀향은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다시 만나는 이유는 잃어버린 시간을 복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을 함께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놀란은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는 위안을 주지 않는다. 대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나간 20년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그 이후의 시간을 누구와 살아갈 것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가장 작고 오래 남는 장면, 아르고스
그런 의미에서 늙은 개 아르고스는 영화 전체에서도 특별하게 남는 존재다. 전쟁 영웅의 귀환을 확인하는 데 거대한 의식이나 왕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린 개 한 마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 이야기의 본질을 단순하게 보여준다.
20년 만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떠날 때의 모습과 다르다. 전쟁과 표류, 세월이 그의 몸과 얼굴을 바꾸었다. 그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밝힐 수도 없다.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르고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주인을 알아본다.
아르고스가 알아보는 것은 트로이를 무너뜨린 영웅도, 이타카의 왕도 아니다. 자신의 주인이다. 그래서 그 짧은 장면은 영화가 끊임없이 묻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한 인간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유명한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였는가일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다. 직업을 말하고, 지위를 말하고, 업적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나를 오래 기억한 누군가가 아무 설명 없이 나를 알아볼 때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이 확인되기도 한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해도 ‘당신은 당신’이라고 알아보는 존재가 있다는 것. 아르고스는 오디세우스에게 바로 그런 존재다.
그리고 자신이 기다렸던 주인을 알아본 뒤 그의 시간이 끝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더욱 강하다. 20년이라는 시간을 견뎌온 기다림이 한 번의 알아봄으로 완성된다. 수많은 괴물과 거대한 전투보다 늙은 개 한 마리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우스의 법칙, 힘보다 먼저 존재하는 질서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또 하나의 축은 제우스가 관장하는 환대의 법칙, 크세니아(Xenia)다.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오래된 풍습 정도로 들릴 수도 있지만 『오디세이아』의 세계에서 환대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질서다. 주인은 찾아온 손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아야 하고, 손님 역시 자신을 받아준 집의 질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 이 규칙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권력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왕이라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손님이라고 해서 주인의 집을 자기 것처럼 차지할 수도 없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타카를 점유한 구혼자들의 행동이 단순히 무례한 청혼 경쟁을 넘어 심각한 질서의 파괴가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들은 손님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주인의 집을 소비하고, 부재한 왕의 가족을 압박하며, 환대받는 사람에게 허용된 선을 넘어선다. 영화 속 신들의 세계가 아무리 낯설어도 이 문제만큼은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필요하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도 자신을 제한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놀란의 영화가 오디세우스 역시 이 질서 밖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그의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영웅의 지략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승리를 위해 인간을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것 역시 윤리적인 질문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오디세이」에서 제우스의 법은 단순히 악인을 벌하는 신화적 장치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보다 앞서 존재하는 질서가 있다는 선언에 가깝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제우스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손님을 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힘을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해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신화가 오래 살아남는 것은 괴물이 매력적이어서만이 아니라, 그 괴물들 사이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선에 관한 질문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생을 거절한 남자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선택 가운데 하나가 칼립소의 섬에서 이루어진다. 오디세우스 앞에 놓인 것은 단순한 사랑의 유혹이나 안락한 삶이 아니다. 인간이 가장 오래 꿈꾸어온 것, 죽지 않는 삶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왜 떠나야 할까. 더 이상 늙지도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면, 고통스러운 바다를 다시 건너 굳이 이타카로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답은 생각만큼 자명하지 않다.
오디세우스도 이타카로 돌아간다고 해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은 아니다. 페넬로페와 함께하지 못한 20년이 돌아오지 않고, 텔레마코스의 어린 시절을 다시 볼 수도 없다. 기다리다 늙어버린 아르고스를 젊게 만들 수도 없다. 이타카에는 죽음이 있다. 자신도 늙고 페넬로페도 늙으며 언젠가는 서로를 잃게 된다. 반대로 칼립소가 주는 삶에는 끝이 없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끝이 있는 쪽을 선택한다.
이 선택을 단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만 설명하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절반만 보게 된다. 영생을 선택하는 순간 오디세우스가 잃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관계다. 그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점점 누구의 남편도 아니고 누구의 아버지도 아니게 된다. 이타카의 왕이라는 이름 역시 의미를 잃는다. 시간은 무한하지만 그 시간을 함께 기억해줄 인간은 사라진다.
반대로 이타카로 돌아가면 그의 시간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페넬로페의 남편으로 살 수 있고 텔레마코스의 아버지로 살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가 선택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가 선택하는 것은 관계 속의 유한한 삶이다. 이 장면을 지나고 나면 「오디세이」가 묻는 질문 역시 조금 달라진다. ‘영원히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가 아니다. ‘영원히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삶과, 언젠가 끝나지만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이며 친구로 살아가는 삶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더 가깝다.
오디세우스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는 영원을 버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선택한다.
영원히 사는 것과 기억되는 것은 다르다
여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불멸을 거부했지만 우리는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는 영원히 살지 않았는데 그의 이야기는 살아남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해 수많은 세대를 지나왔고, 21세기에 놀란이라는 감독에 의해 다시 거대한 스크린 위에 등장했다. 그가 거절한 육체적 불멸 대신 다른 종류의 불멸을 얻은 셈이다.
기억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과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전자는 시간의 문제지만 후자는 관계와 이야기의 문제다. 아무리 오래 존재하더라도 아무에게도 의미가 없는 삶이 있을 수 있고, 짧게 살았지만 누군가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
영화가 끝난 뒤 아르고스가 계속 떠오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트로이 목마를 만든 위대한 지략만이 아니다. 자신을 20년 동안 기다린 개가 있다는 사실, 자신이 돌아오기를 포기하지 않은 아내가 있다는 사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길을 떠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구성한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은 그래서 하나의 고유명사를 넘어선다. 그 이름 안에는 관계가 들어 있다. 인간의 이름도 그렇다. 우리는 독립된 개인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자녀이고, 배우자이며, 부모이고 친구다. 직장에서는 어떤 직함으로 불리고 사회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지만, 삶을 오래 돌아본 뒤 남는 이름은 어쩌면 훨씬 사적인 것들일지 모른다. 누구의 남편이었고, 누구의 엄마였으며, 누구에게 좋은 친구였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못지않게 누구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한 인간의 삶을 설명한다.
칼립소가 제공하는 영생의 가장 큰 대가는 바로 그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없는 시간을 얻는 대신 자신을 자신이게 했던 사람들을 잃는다.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선택하는 것

놀란에게 시간은 늘 중요한 주제였다. 《메멘토》에서는 기억이 시간의 순서를 무너뜨렸고, 《인셉션》에서는 꿈의 깊이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의 시간이 가족을 갈라놓았고, 《덩케르크》에서는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이 한순간으로 수렴했다. 《테넷》은 시간의 방향 자체를 뒤집었다. 「오디세이」역시 시간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여기에서 놀란이 보여주는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소박하고 그래서 더 냉혹하다.
시간은 그냥 지나간다. 20년은 20년이다. 되돌릴 방법이 없다. 텔레마코스는 이미 성장했고 페넬로페도 늙었다. 아르고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 자신도 더 이상 트로이로 떠났던 젊은 왕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귀향은 중요해진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없으니 남은 시간을 선택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에게서 벗어나는 선택도 결국 같은 방향으로 읽힌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그 시간을 살아가느냐다.
칼립소는 무한한 시간을 줄 수 있다. 이타카는 유한한 시간을 준다. 하지만 이타카의 시간에는 페넬로페가 있고 텔레마코스가 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시간이 반드시 더 좋은 삶일까. 「오디세이」가 내놓는 답은 분명해 보인다. 삶의 가치는 시간의 총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끝이 있기 때문에 선택은 의미를 가진다. 무한한 시간이 있다면 오늘 돌아갈 이유도, 지금 사랑한다고 말할 이유도, 이 순간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할 이유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에는 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유한성은 인간의 가장 큰 약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삶에 의미를 주는 조건일 수도 있다.
돌아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놀란은 그렇다고 귀향을 낭만적인 완성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의 땅을 밟는 순간 모든 고난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없는 20년 동안 집은 변했고 왕국의 질서는 흔들렸다. 페넬로페를 둘러싼 구혼자들은 궁전을 사실상 자신들의 공간처럼 사용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폭력과 마주한다. 구혼자들을 처단하는 장면은 전통적인 영웅담의 문법이라면 빼앗긴 왕권을 되찾는 통쾌한 복수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장면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트로이 전쟁을 통과한 남자가 자신의 집 안에서 다시 피를 흘린다는 사실이 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화는 또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전쟁터에서 배운 폭력은 전쟁이 끝나면 끝나는가. 정의를 위한 폭력은 이전의 폭력과 완전히 다른 것인가. 올바른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전쟁 이전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과거를 가지고 돌아온다. 영웅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이 했던 선택과 죽음의 기억을 함께 가지고 온다. 그래서 귀향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에 가깝다.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자신이 했던 일을 없앨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억과 함께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뿐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거대한 항해는 현대인의 삶과도 묘하게 맞닿는다. 누구도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실수한 일이 있고 놓친 시간이 있으며,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다시 돌아간다고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귀향은 과거를 없애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를 가진 채 다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선택일 수 있다.
결국 《오디세이》를 보고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타카라는 장소다. 오디세우스는 왜 그토록 이타카로 돌아가려 했는가. 그곳이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하면 가장 간단하다. 그러나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이타카는 지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곳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왕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존재가 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이타카는 반드시 태어난 지역이나 오래 살았던 집을 뜻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타카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거대한 영화다. 넓은 바다와 거친 자연, 전쟁과 항해를 대형 화면에 밀어붙이는 힘은 확실히 극장에서 경험할 가치가 있다. 실재하는 공간과 사물의 질감을 중시해온 놀란의 연출 방식도 고대 신화를 추상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인간이 직접 걸어가고 견뎌야 하는 물리적인 세계처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정작 오래 남는 것은 그 거대한 화면 속에 놓인 작은 관계들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개. 집을 떠난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우리의 삶에서 폴리페모스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거나 키르케의 섬에 표류할 일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칼립소가 영원한 삶을 제안할 일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비슷한 선택을 한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쓸 것인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 어떤 관계를 지킬 것인지, 마지막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선택한다.
오디세우스는 영생을 거절했다. 끝나지 않는 시간을 버리고 언젠가 끝날 삶을 택했다. 그것이 의미 있는 선택인 이유는 그가 돌아가야 할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신을 기다리는 페넬로페가 있었고, 아버지를 찾는 텔레마코스가 있었으며, 20년이 지나도 그를 알아보는 아르고스가 있었다. 그는 영원히 존재하는 무명의 존재가 되는 대신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인 오디세우스로 살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보고 나면 ‘불멸’이라는 말도 조금 다르게 들린다.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영생은 끝없이 살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떠난 뒤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으로 남는 것일까. 오디세우스는 죽음을 피하는 불멸을 포기했지만 그의 이름은 3천 년을 건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그가 페넬로페에게 돌아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어쩌면 놀란의 「오디세이」가 끝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인간적인 불멸인지도 모른다.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돌아간다. 유한하기 때문에 기다린다. 유한하기 때문에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삶이 끝난 뒤 우리가 남기는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누구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20년 동안 바다를 떠돈 오디세우스가 결국 찾아간 것은 영원한 생명도, 더 큰 영광도 아니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놀란의 「오디세이」는 거대한 모험영화인 동시에 아주 오래된 인간의 이야기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지고 우리가 아무리 먼 곳까지 갈 수 있게 되어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돌아갈 곳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곳을 고향으로 만드는 것은 땅이나 왕좌가 아니라 결국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가 그랬듯, 우리에게도 언젠가 모든 항해 끝에 돌아갈 이름 하나쯤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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