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인공지능(AI) 정책은 흔히 산업 경쟁력 강화나 차세대 기술 패권의 문제로 설명된다. 그러나 2026년 1월 22일 시행된 AI 기본법과 함께 본격화된 국가 AI 전략을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산업보다 먼저 대학과 연구기관, 그리고 인재 양성 체계가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능 GPU 확보,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국가 AI 연구소 설립, 공공 부문의 AI 전환은 모두 대학과 연구 현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실행될 수 없는 과제들이다. 이번 정책 전환은 기술 도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지식 생산 시스템 전반을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에 가깝다.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 투입이 있다. 정부는 2026년 AI 예산으로 전년 대비 약 3배 증가한 9.9조 원을 편성하며 글로벌 AI 3대 강국(G3) 도약을 공식화했다. AI 관련 예산 사업 수 역시 738개로 확대되면서, AI는 더 이상 특정 부처나 연구 분야의 실험적 정책이 아니라 정부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국가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산업과 공공, 생활 영역 전반에 AI를 적용하는 이른바 ‘AX(AI 전환)’ 부문이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점은, 향후 AI 정책의 무게중심이 연구실을 넘어 행정과 교육, 공공 서비스 전반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같은 전략이 실제로 작동하는 무대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GPU 배분의 주요 수요처는 대학과 출연연이며, 독자 AI 모델 개발 역시 민간 기업 단독이 아닌 대학·연구기관과의 협업을 전제로 설계돼 있다. 국가과학AI연구소와 국가범용인공지능연구소 설립 계획 또한 연구 생태계 전반을 AI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결국 ‘AI G3’라는 국가 목표는 산업 정책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성패는 대학과 연구 현장이 이 전략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지에 달려 있다.
역대 최대 9.9조 원, 대학과 연구 현장으로 향하는 AI 예산의 흐름
2026년 AI 예산 9.9조 원은 단순한 증액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을 전제로 편성된 예산이다. 전체 738개 AI 관련 사업은 기술개발, 인프라·연구기반 조성, AX, 인재양성, 생태계 조성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증가 폭을 보인 부문은 산업·생활·공공 전반에 AI를 적용하는 AX 부문이다. AX 관련 예산은 2025년 본예산 0.6조 원에서 2026년 2.4조 원으로 급증하며, 정부가 AI를 개별 연구개발 사업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반의 작동 방식으로 확산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러한 예산 구조는 대학과 연구기관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확대시킨다. AX는 단순한 기술 구매가 아니라 기존 업무와 시스템을 AI 기반으로 재설계하는 작업을 포함하기 때문에, 알고리즘 개발과 모델 학습, 데이터 활용 경험을 갖춘 연구 주체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대학과 출연연은 산업 현장과 공공 부문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서, AI 기술의 실증과 검증, 인력 공급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AI 예산의 증가가 곧바로 대학 재정 확대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정책의 실행 부담은 대학과 연구 현장으로 이전되는 구조다.
AI 인프라 예산의 확대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정부는 2028년까지 총 5만2천 장 이상의 GPU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2026년부터 그 배분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정부 구매 GPU와 슈퍼컴퓨터 6호기, 국가 AI 컴퓨팅센터 구축을 통해 고성능 연산 자원을 확충하겠다는 구상인데, 이 자원의 주요 활용 주체로 상정된 곳 역시 대학과 산·학·연 연구기관이다. 문제는 GPU 확보 자체보다, 이를 어떻게 배분하고 어떤 연구와 교육 목적에 우선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다. 연산 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대학 간, 연구 분야 간 경쟁이 심화될 경우, AI 예산 확대가 연구 생태계의 불균형을 키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AI 기본법’ 시행, 행정의 작동 방식을 바꾸겠다는 선언
2026년 1월 22일 시행된 AI 기본법은 단순한 산업 진흥 법률이 아니라, 국가 운영 전반을 AI 환경에 맞게 재설계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국회입법조사처는 AI 기본법 시행을 계기로 기존 행정 시스템에 AI를 덧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AI 활용을 전제로 행정 체계를 설계하는 ‘AI by Design’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전자정부 이후 수십 년간 유지돼 온 업무 흐름과 의사결정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고서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AI는 이미 다양한 행정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현행 제도는 단년도 예산, 품목별 조달, 부처 단위 책임 구조에 묶여 있어 AI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AI를 한 번 구매해 사용하는 ‘물품’으로 취급하는 기존 조달 방식은,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학습이 필요한 AI의 특성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반복된다. 이 때문에 정부는 AI를 서비스 형태로 도입하고 구독할 수 있는 AI as a Service(AIaaS) 기반 조달 체계를 새로운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행정의 AI 전환은 곧 거버넌스 문제로 이어진다. AI 정책은 과학기술, 산업, 교육, 행정안전, 재정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할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오래된 과제로 지적돼 왔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처 간 칸막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예산과 인사 조정권을 가진 국가 최고기술책임자(CTO) 중심의 통합 거버넌스 구축을 제안했다. AI를 특정 부처의 사업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핵심 인프라로 다루기 위해서는, 정책 결정과 집행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기술 도입이 곧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전략 뒤편의 변수들
대규모 예산 투입과 제도 정비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지만, AI 전략의 성패를 가를 변수들은 기술 바깥에 놓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산 자원 활용의 문제다. 정부는 2028년까지 5만2천 장 이상의 GPU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2026년부터는 그 배분이 본격화된다. 그러나 연산 자원의 절대량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기준으로, 어떤 영역에, 어떤 방식으로 배분하느냐다. 활용 수요와 맞지 않는 배분 구조가 고착될 경우, GPU 확보는 곧바로 또 다른 비효율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AI 인프라의 지속 가능성 역시 간과하기 어려운 변수다. 대규모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서버 가동과 냉각 시스템 운영을 전제로 하며, 이는 곧 막대한 전력 소비로 이어진다. 최근 수년간 전기 요금 인상과 전력 공급 불안정성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AI 인프라 확대가 장기적으로 감당 가능한 구조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 고품질 학습 데이터의 고갈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연산 자원 확보만으로는 AI 성능과 활용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AI 경쟁력은 GPU 숫자가 아니라 데이터와 운영 환경의 조합에서 결정된다는 점이 다시 부각되는 대목이다.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둘러싼 논쟁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글로벌 모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목표는 분명하지만, ‘독자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성능을 어떤 기준으로 검증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일부 개발 과정에서는 해외 기술 활용 여부를 둘러싼 해석 차이가 드러났고, 성능 평가 방식이 일관되지 않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결국 핵심은 모델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실제 활용 환경에서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에 있다.

9.9조 원은 무엇을 바꾸는가, 이제 남은 질문들
이번 AI 전략의 핵심은 ‘얼마를 썼는가’보다 ‘무엇을 바꾸려 하는가’에 있다. AI 기본법 시행과 함께 편성된 9.9조 원의 예산은 기술 개발을 넘어 행정, 공공 서비스, 연구와 산업 구조 전반을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이 자동적으로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연산 자원과 데이터, 제도와 거버넌스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않는다면, 대규모 투자는 오히려 새로운 비효율을 고착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AI를 도입하는 것과 AI가 작동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이 이번 전략의 시험대가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는 것이 성과 관리와 민간 확산이다. 정부는 AI 혁신펀드를 통해 민간 투자를 유도하고, 공공 부문에서의 AI 활용 성과를 산업 전반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재정 투입이 민간 투자와 인재 유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단년도 예산 구조와 불확실한 평가 기준, 부처 간 조정 실패가 반복된다면, AI 정책은 단기 성과 중심의 사업 나열로 소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AI G3’ 전략은 기술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에 대한 선택에 가깝다. AI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선언은 이미 충분히 반복돼 왔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 선언을 뒷받침할 제도와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느냐는 것이다. 9.9조 원이라는 숫자가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 투자가 국가 경쟁력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 여부는, AI를 어떻게 설계하고 관리하며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정부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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