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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지식불신·재정위기, 세 개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고등교육의 역할을 다시 묻다
지금 세계는 세 가지 위기의 동시다발적 충격 속에 있다. 첫 번째는 기후위기다. 기후 변화는 더 이상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이며, 지구 평균기온 상승과 탄소농도 증가가 인류 사회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두 번째는 지식에 대한 신뢰의 위기다. 허위정보 확산과 과학·전문성에 대한 불신이 사회적 합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 세 번째는 재정위기다. 국가 재정은 고령화, 사회복지 지출 증가, 생산성 정체, 기후위기 대응 비용 증가로 인해 지속가능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 세 가지 위기는 서로 얽혀 있으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다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등교육이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HEPI가 발표한 『A Call for Radical Reform: Higher Education for a Sustainable Economy』는 이러한 문제들을 독립된 사안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적 위기로 바라보며, 고등교육을 지속가능한 경제 전환의 핵심 축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보고서의 출발점은 분명하다. 기후위기와 지식 불신, 그리고 경제·재정 불안정이 결합된 시대에 고등교육은 단순히 노동시장의 자격증을 제공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회의 지식 기반을 재건하고 지속가능성을 설계하는 핵심 자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의 고등교육 모델은 이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낡았고, 비효율적이며, 구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문제의식도 함께 제기된다.
한국의 상황은 이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 지역대학 위기, 고등교육재정의 불안정, 대학의 사회적 신뢰 하락, 기후위기 대응 연구 부족 등 다양한 문제가 결합되어 있으며, 대학의 방향성과 사회적 역할을 묻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HEPI의 이번 보고서는 단순한 영국 고등교육 개혁안이 아니라, 한국 고등교육이 미래 구조개혁을 논의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지침서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고등교육이 지속가능한 경제 전환의 중심에 서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고, 필요한 개혁 방향을 분석한다.

기후위기 – 지속가능한 경제 없이 미래는 없다
보고서가 제시하는 첫 번째 출발점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이다. 기후위기는 이미 가속화 단계에 있으며, 탄소 배출량 감축 시나리오에 따라 2050년 이후의 지구 환경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보고서에 실린 탄소 배출·농도 시나리오 그래프는 지금의 선택이 회복과 파국 중 어느 경로로 향할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전 세계적 탄소 농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미 여러 기후 모델은 북극 해빙 붕괴, 해수면 상승, 생태계 붕괴와 같은 임계점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즉, 인류는 더 이상 ‘미래의 위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문턱에 서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고서는 기후위기를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지속가능성 문제’로 바라본다. 경제 활동은 자연자원, 생태계, 사회 인프라라는 기반 자산(assets)에 의존하며, 이 자산이 훼손되면 경제 자체가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국 경제학자 디터 헬름(Dieter Helm)의 ‘자산 접근법’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자연환경·기초 인프라·지식·교육 같은 사회의 주요 자산은 현재 세대가 유지비용을 책임져야 하며, 개선을 위한 추가적 비용(투자)은 미래 세대가 감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의 에너지·소비·교육 체제는 이 원칙을 따르고 있지 않으며, 미래 세대에게 유지와 복구 비용을 떠넘기는 구조라고 비판한다.
특히 대학은 ‘자산(asset)’으로 볼 때 미래 세대에게 돌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투자 대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등교육 체제는 투자보다는 소비적 성격이 강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예를 들어, 연구·교육 기반의 지식 생산은 사회적 자산을 확장하는 투자로 볼 수 있지만, 고비용의 전통적 기숙형 학부 프로그램은 오히려 소비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소비 중심 모델이 확대될수록 고등교육 체제는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하게 되고, 재정 압박은 미래 세대로 전가된다. 즉, 대학이 지속가능한 경제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적과 구조, 그리고 재정의 흐름이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관점이다.
지식 불신의 시대 – 고등교육의 ‘지식공동체(knowledge commons)’ 재건 역할
현대 사회가 직면한 또 하나의 심각한 위기는 지식에 대한 신뢰의 붕괴다. 보고서는 이를 “epistemological crisis”, 즉 지식의 위기라고 명명한다. 과거에는 과학·전문가·언론이 사회적 합의의 기반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기능했지만, 오늘날의 정보 환경은 완전히 다르다. 사회적 미디어의 확산, 정치적 양극화, 알고리즘 기반 정보 강화 현상은 허위정보와 음모론이 빠르게 확산되는 토양을 만들었다. HEPI 보고서가 인용한 Edelman Trust Barometer의 최신 자료에서도, 영국을 포함한 다수 국가에서 “정부와 기업 리더는 대중을 의도적으로 오도한다”는 항목에 70% 이상이 동의했다. 이는 단순한 여론의 문제를 넘어,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합의가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 극단주의와 과학 불신을 촉진하고, 공공정책 형성을 어렵게 만들며, 사회 전체의 민주적 토대를 약화시킨다.
HEPI 보고서는 이 지식 위기를 단순히 외부 요인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고등교육이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지식의 저장소이자 생산자”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교육 수준에 따른 인식 차이는 일관되게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 이민, 경제 리스크, 사회적 불평등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학위를 소지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의견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환경과 사회 정의 문제에 더 민감한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경제 불안·범죄·지역 공동체 붕괴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문제는 이 차이가 단순한 관점의 다양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식 생태계’를 통해 정보를 소비하고 해석하는 구조적 분열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분열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적대감을 강화하며, 허위정보가 사회 전반을 잠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보고서는 이 지점에서 고등교육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지식공동체(knowledge commons)의 재건”이라고 명확히 정의한다. 지식공동체란 단지 전문가들의 담론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이 공통의 사실 기반 위에서 토론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공적 기반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대학은 세 가지 원칙—증거에 대한 존중, 비판적 검토의 개방성, 지식의 투명한 설명 가능성—을 사회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강조한다. HEPI는 이를 “epistemic responsibility(지식적 책임성)”이라고 부르며, 대학과 학생·졸업생이 공공영역에서 발언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기준으로 제안한다. 즉, 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식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기반 시설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뢰받는 지식의 규범’을 사회 전반에 확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 공공성의 회복 없이 기후위기나 경제위기 같은 장기적 구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통적 고등교육 모델의 한계 – ‘풀타임 학부 중심 체제’의 구조적 지속 불가능성
HEPI 보고서는 전통적 고등교육 모델—즉, 3~4년 풀타임 기숙형 학부 모델—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 모델은 근본적으로 ‘엘리트 교육’ 체제가 확장된 형태로, 대중적 고등교육 체제로 전환된 이후에도 본질적 구조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고등교육이 대중화되면서 더 많은 학생을 수용하게 되었지만, 비용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강의·시설·기숙사·학생서비스 등 기존의 조직형태도 그대로 남았다. 문제는 이 모델이 대규모 학생을 대상으로 운영되기에는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고, 교육의 목적과 방식도 변화된 사회적 환경과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특히 영국 대학의 재정 위기를 지적하며, 현재의 구조를 유지할 경우 고등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라 고비용 소비서비스”가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 모델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고비용 구조다. 기숙형·전일제 학위는 교육 그 자체보다 ‘라이프스타일’과 ‘사회적 경험’의 비중이 큰 경우가 많으며, 이는 고등교육 투자를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현재의 소비’로 만드는 요소다. 보고서는 이렇게 소비 성격이 강한 지출은 원칙적으로 현재 세대가 부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상당 부분이 학생 대출이나 국가 채무로 전가되고 있으며, 이는 미래 세대에게 그대로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가 된다. 둘째, 노동시장과의 부조화 문제다. 3~4년짜리 대형 학위는 과도한 사전 학습을 요구하며, 실제 직무능력과 연결되지 않거나 지나치게 범위가 넓어 비효율을 초래한다. 현대 산업에서 요구하는 역량은 점점 세분화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오래된 학위 모델은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셋째, 접근성 문제다. 풀타임 학위는 사회적·지리적·경제적 여건이 충분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구조이며, 성인학습자·저소득층·지방거주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모델이다. 이는 지식 격차를 확대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보고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등교육 모델의 근본적 전환을 제안한다. 전일제 학위를 중심으로 한 구조에서 벗어나 단기 자격, 모듈형 학습, 평생학습 기반의 다중경로 교육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Lifelong Learning Entitlement(LLE) 정책과도 맞물리며, 한국이 추진 중인 평생교육체제·마이크로학위·학점은행제 확장과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HEPI는 특히 전일제 학사의 비중을 “과감히 줄이고” 기존보다 훨씬 다양한 학습경로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지속가능한 경제로의 전환은 경제정책·산업정책·기후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체제의 구조 개편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는 메시지다.
지식공동체의 회복 – 대학이 ‘지식의 기준’을 사회에 다시 세워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허위정보와 지식 불신이 확대되는 이유는 단순히 기술 때문이 아니라, 고등교육이 지식의 공적 권위와 책임성을 충분히 사회에 확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HEPI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지식공동체(knowledge commons)’ 개념을 제시한다. 지식공동체는 시민들이 공통의 사실 기반 위에서 토론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지식 인프라로, 신뢰 가능한 근거·검증·투명성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보환경에서 이러한 기반은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다. HEPI는 대학이 자신의 학술적 기준을 공공영역에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보며, 이를 위해 ‘epistemic responsibility(지식적 책임성)’이라는 개념을 제도화할 것을 제안한다. 지식적 책임성은 단순히 정직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 기반 주장, 개방적 비판 수용, 명확한 설명 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지식 생산과 토론의 기본 규칙으로 삼는 것이다.
보고서는 대학이 미디어·정치·공공토론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지식적 책임성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학자들이 사회적 이슈에 의견을 내는 것이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지식의 기준을 유지하고 확산시키는 고유한 사회적 역할이라는 의미다. 또한 학생들 역시 학문적 지식뿐 아니라 ‘지식적 책임성’을 대학 교육의 필수 역량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지식의 해석과 판단을 둘러싼 역량이며, 허위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시민들이 자신의 판단을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민주적 방어력이다. HEPI는 이러한 지식적 책임성을 제도화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기준 설정—예를 들어 ‘학술 지식의 공통 규범’을 확립하는 새로운 코드—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식공동체의 회복은 고등교육 참여 확대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현재 고등교육 참여 여부는 사회 인식·정치적 태도·사회적 신뢰 수준을 가르는 주요 변수로 작동한다. 보고서는 지식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허위정보가 더 쉽게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교육 수준이 높으니 허위정보에 덜 속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지식적 관점을 형성하는 사회적 경험의 차이가 커질수록 공통 기반이 약화되고 사회적 분열이 심해지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HEPI는 고등교육 접근성을 확대해 학위·비학위 경로를 포괄하는 ‘보편적 고등교육 참여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 위기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고등교육을 ‘선택적 서비스’가 아니라 ‘지식공동체의 기반 인프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 참여 확대는 단지 노동시장 적응력 향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적 생태계를 복원하는 핵심 조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경제를 위한 교육 개혁 – 커리큘럼·제도·거버넌스의 재설계
HEPI 보고서의 핵심 주장은 “지속가능한 경제 전환은 고등교육 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지속가능경제는 단순히 친환경 기술 개발이나 탄소 배출 감소에 그치지 않으며, 경제 전반이 탄소중립·자원 순환·생태 기반 산업 구조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고등교육이 제공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보고서는 이를 위해 고등교육의 커리큘럼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환경 관련 과목을 늘리는 차원이 아니라, 전 분야 학문에서 탄소감축·지속가능성·순환경제 등 핵심 가치가 내재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영학에서는 지속가능한 회계·지속가능경영 지표·탄소 회계가 기본 교육이 되어야 하며, 공학 분야에서는 탄소중립 기술·에너지 효율 설계가 필수 요소가 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에서도 기후리스크·환경정책·지속가능 복지체계 같은 주제가 기본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또한 HEPI는 고등교육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면서도, 국가 재정을 과도하게 늘리지 않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운영하는 방법”이라는 의미다. 생산성 향상은 AI·디지털 교육 도구·학습 분석 기술 도입과 깊이 연결된다. 보고서는 AI 기반 학습 도우미, 디지털 평가 자동화, 하이브리드 강의 플랫폼 등이 교육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핵심 도구라고 말한다. 이는 한국 대학들에서도 중요하게 받아들일 논의다. 특히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대학이 ‘확대’가 아닌 ‘효율·혁신’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기술 기반 생산성 향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요건이다. 대규모 딜리버리 모델에서 소규모 맞춤형 교육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AI 기술은 필수적 자원으로 작동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HEPI는 고등교육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재 영국의 고등교육 규제 체계는 복잡한 절차와 다양한 규제 기관이 얽혀 있는 구조이며, 이는 대학이 장기적 전략보다는 단기적 지표 충족에 집중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보고서는 이를 간소화해 중앙·지역 단위의 ‘commissioner(감독관)’ 기반 체계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대학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국가적 우선순위—예를 들어 지속가능성, 탄소감축, 보편적 교육 참여—를 전략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구조다. 이러한 제안은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현재 한국 고등교육 거버넌스 역시 평가·인증·재정지원·규제 시스템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대학이 구조적 혁신보다 ‘평가 지표 관리’에 치중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HEPI의 모델은 대학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면서도 국가적 목표를 종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대안적 거버넌스로 참고할 만하다.

지속가능한 미래는 대학 개혁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HEPI 『Radical Reform』 보고서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재편해야 한다. 이는 고등교육이 경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기술·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핵심 기반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허위정보가 사회적 대립을 격화시키며 경제구조가 급변하는 시대에, 대학이 기존의 방식대로 운영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대학은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의존하는 지식 인프라이며,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사실 기반의 공론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사회적 책임이 크다. 따라서 전통적인 학위 중심 모델에서 벗어나고, 학습을 생애 전반으로 확장하며, 커리큘럼과 거버넌스를 지속가능성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단지 선택적 개혁이 아니라 필연적 변화다.
한국의 고등교육 역시 같은 전환점에 서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이 소멸 위기를 맞고 있고, 지역 대학과 수도권 대학간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으며, 대학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흔들리고 있다. 동시에 기후위기 대응·디지털 전환·산업구조 재편 등 국가적 과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재·지식·연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HEPI가 제시한 고등교육 개혁 방향은 한국에도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구조적 개혁의 틀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히 영국의 특수한 사정을 다룬 보고서가 아니라, 글로벌 고등교육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를 분석하고 미래형 고등교육 체제를 설계하기 위한 실질적 로드맵이다.
결국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것은 정부의 정책이나 기업의 기술혁신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시민들이 사실 기반의 지식을 공유하고, 산업이 지속가능한 구조로 전환되며, 사회가 미래를 준비하는 역량을 갖추는 과정에서 고등교육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HEPI 보고서는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대학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한국의 고등교육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 대학·정부·지역사회가 함께 지속가능한 지식 기반 사회를 설계하는 일이다. 기후위기와 기술혁신이 빠르게 맞물리는 시대, 고등교육이 변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지속가능한 경제를 향한 여정은 결국 대학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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