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초보직무를 대체하고 기업은 경력을 찾는다. 졸업은 더 이상 첫 일자리의 티켓이 아니다. 이제 대학은 ‘배우는 곳’을 넘어 ‘일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사라진 첫 일자리, 흔들리는 공식
미국의 가을 학기는 여전히 활기찼다. 약 1,900만 명의 대학생이 캠퍼스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한 가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졸업 후 정말 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The Hechinger Report』가 2025년 11월 10일자 칼럼에서 전한 이 장면은 단순한 일시적 불안이 아니라, 고등교육이 오랫동안 지탱해온 사회적 공식을 뒤흔드는 징후였다. 칼럼의 저자 브루노 비. 만노(Bruno V. Manno)는 “졸업 → 입사 → 경력”으로 이어지던 전통적인 경로가 이제는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AI 기술의 급속한 확산은 이 공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거에는 신입사원이 회사에 들어가 보고서를 쓰고, 자료를 정리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며 업무를 배우는 과정이 ‘경력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단순·반복 업무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면서, 기업이 굳이 신입을 뽑아 훈련시킬 이유가 줄어들었다. ‘초보자에게 주어지던 훈련의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그 결과, 과거에는 졸업자에게 열려 있던 ‘entry-level job’들이 이제 2~3년의 실무 경험을 요구하는 중간직급의 형태로 바뀌었다. 칼럼은 이를 ‘경험격차(experience gap)’라고 불렀다. 경력이 없으면 일을 시작할 수 없고, 일을 하지 못하면 경력을 쌓을 수 없는 모순적 구조가 젊은 세대의 사회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들은 여전히 ‘신입’ 채용을 유지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채용 공고에는 인턴 경험이나 관련 자격, 포트폴리오를 요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신입이지만 이미 경력자여야 하는 이 구조는 사실상 첫 일자리를 없애고 있다. 대학 졸업자는 늘지만, 사회로 나아가는 입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학위의 가치’보다 ‘실무 경험’이 중요해진 시대, 청년들은 이제 대학이 아닌 현장에서 배워야 하는 현실 앞에 서 있다.
‘경험격차’라는 새로운 불평등
Hechinger Report 칼럼은 이 현상을 단순한 경기 불황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구조적 변화였다. AI 기술이 기업의 조직 구조를 바꾸었고, 자동화가 생산성을 높이면서 인간이 수행하던 초급 업무의 자리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 결과, ‘훈련 가능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었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단순히 기업 내부의 효율성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 전체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이 생겨나고 있다. ‘경험격차’는 경제적 자산만큼이나 강력한 장벽이 된다. 이미 실무 경험을 쌓은 사람은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처음 진입하려는 사람은 출발선조차 밟지 못한다. 대학 졸업장 하나로 사회 진입이 가능하던 시절이 지나면서, ‘경험’이 새로운 자산이자 특권이 되었다. 이 불평등은 특히 청년층 내부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취업 준비에 필요한 인턴십이나 해외 연수, 자격증 취득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학생에게 훨씬 유리하다. 경험을 쌓을 기회가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인턴십은 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달하고, 무급 인턴십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인턴 경험이 있는 학생이 취업에서 유리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기회를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경험의 기회’가 새로운 불평등의 지표로 작용하며, 고등교육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다.
대학 교육의 사회적 약속은 단순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이 깨질 때, 대학의 신뢰는 빠르게 흔들린다. Hechinger Report는 미국 내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4년제 학위가 비용 대비 가치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56%에 달했다고 전했다. 이는 2013년 조사 이후 최저치였다. 이 현상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안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학자금 대출을 감당하며 졸업한 청년들이 ‘경험이 없어 채용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듣는 현실에서, 학위의 상징적 가치는 점점 퇴색한다. 학위는 여전히 필수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이 아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대학은 점점 ‘사회적 약속의 균열’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학생들은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이 현실의 노동시장과 맞닿아 있지 않다고 느낀다. 교실에서 배우는 지식이 현장에서 요구되는 역량과 괴리되면서, 대학 교육은 ‘추상적 학문’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괴리만큼, 대학이 사회적 신뢰를 잃는다.

경험이 교육의 일부가 될 때
그렇다면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에 있을까. Hechinger Report는 몇 가지 구체적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는 ‘일하며 배우는 제도(earn-and-learn)’의 확산이다. 이는 전통적인 도제제도를 현대화한 방식으로, 대학 교육과 근로 경험을 병행하게 하는 제도다. 미국에서는 청소년 도제, 사전도제, 등록도제, 학위연계형 도제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단순히 직업훈련이 아니라, 대학 교육 과정 속에 실무 경험을 내재화하는 새로운 모델이다.
둘째는 ‘역량 중심 채용(skills-based hiring)’이다. 구글, IBM, 애플 등 대형 IT 기업은 이미 학위보다는 실질적 기술과 역량을 중시하는 채용 방식을 확대하고 있다. 학위를 대신할 수 있는 마이크로 자격증이나 산업별 인증, 포트폴리오가 중요한 신호로 작용한다. 셋째는 대학과 기업 간의 긴밀한 협력이다. 미국의 노스이스턴대나 드렉셀대는 ‘코업(co-op)’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학기 중에 기업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일정 기간 현장 근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이런 경험은 단순한 실습이 아니라, 교육과 노동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형 학습으로 기능한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모델은 이미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LINC 3.0’ 사업, ‘산학일체형 도제대학’, ‘IPP형 현장실습제도’ 등이 그 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이 대부분 ‘사업단 단위의 한시적 운영’에 그친다는 점이다. 대학이 경험을 교육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런 프로그램이 정규 학사제도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실습은 부수적 경험이 아니라, 학위 취득의 필수 구성요소가 되어야 한다.
학위의 무게보다 중요한 것은 ‘일할 준비’
Hechinger Report의 칼럼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의 학생들은 여전히 교육과 노력이 기회로 이어지는 세상을 꿈꾼다.” 그 문장은 대학 교육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든다. 대학의 목적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사회적 기회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이 직면한 과제도 같다. 고등교육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학문과 노동’의 이분법을 넘어야 한다. 교실 안에서의 배움이 사회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대학이 학생에게 지식을 주는 곳에서, ‘일할 준비를 설계하는 곳’으로 바뀔 때 비로소 학위의 의미는 다시 살아난다. 그 변화는 단순한 취업률 제고를 넘어, 고등교육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역량의 체화, 평가가 아니라 경험의 축적, 학위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 대학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대학이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학위의 권위는 더 이상 다음 세대에게 신뢰받지 못할 것이다.
AI가 일자리를 바꾸고, 기업이 경력을 요구하는 시대. 이제 대학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의 졸업장은 학생을 어디로 이끄는가?” Hechinger Report가 보여준 미국의 경험은 한국 대학에도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학위의 의미를 지켜내기 위해, 대학은 다시 사회와 연결되어야 한다. ‘경험의 시대’에 교육은 더 이상 교실 안에 머물 수 없다. 대학이 스스로를 ‘현장과 연결된 지식의 플랫폼’으로 재정의할 때, 청년들은 다시 배움의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배우는 것과 일하는 것이 단절되지 않는 교육, 그것이 앞으로의 대학이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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