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력·전문직 고령자 급증 속, UBRC가 제시하는 미래형 시니어 모델
‘노인은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2025년 현재 한국 사회는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노인들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 세대라는 점이다. 같은 나이라도, 청년기를 어떤 산업과 교육 환경 속에서 보냈는지에 따라 그들의 노동 이력과 생계 방식, 나아가 삶의 방식까지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국회미래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 『고령층의 세대교체, 다른 노인이 온다』는 이러한 인식 변화를 구체적 통계와 함께 짚어내며, 기존의 일률적인 노인정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기의 중심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이 주목받고 있다. 단지 청년 교육의 장소가 아니라, 고령자와 지식, 경험이 교차하는 새로운 복합 공간으로서 대학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UBRC(University-Based Retirement Community)가 있다. 이는 단순한 노인 주거단지를 넘어, 고령자가 대학 캠퍼스 안에서 배움과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새로운 주거 공동체 모델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이미 100곳 이상이 운영 중이며, 이 모델은 노인의 삶을 바꾸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대학에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달라진 고령층, ‘같은 나이, 다른 노인’
한국 사회에서 노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인식은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다. 과거의 노인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저학력에 단순노무직 경험이 많았고, 자녀 부양에 기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령층에 진입하고 있는 세대는 이와는 분명히 다르다. 산업화와 도시화, 교육 기회의 확대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고학력과 다양한 직업 경험을 바탕으로 노년기를 맞이하고 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청년층의 60% 이상이 중졸 이하였지만, 2025년 현재 청년층의 절반 이상은 전문대졸 이상 학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이 비율이 60%를 넘는다. 노동시장 경험도 달라졌다. 과거의 고령층이 농업이나 단순 제조업에 주로 종사했던 것과 달리, 현재 고령자에 진입하는 세대는 서비스업, 지식산업, 공공부문 등에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노후관도 변화하고 있다. 2023년 통계에 따르면, 고령자의 70% 이상이 스스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자녀에게 생활비를 의존한다는 응답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자녀와의 동거를 희망하는 비율 역시 감소하고 있다. 이는 고령층이 더 이상 가족에 의존하기보다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학력과 경력, 삶의 태도가 달라진 고령층은 기존의 일률적인 노인정책으로는 포괄하기 어려운 새로운 사회적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고령층을 바라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자리 정책의 미스매치, 고령층 정책의 한계
현행 노인일자리 정책은 주로 단기 공공근로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대표적인 노인일자리 사업은 연간 약 100만 명에게 월 30~40만 원의 보수를 지급하며, 그 대부분이 공익형 단순노무직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고령층의 생계 일부를 보조하는 데는 기여할 수 있으나, 고학력과 다양한 경력을 가진 새로운 고령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2040년경에는 약 170만 명의 고도의 전문직 경력을 가진 고령 인구가 노동시장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기존처럼 단순한 공공일자리에 투입된다면, 경력 단절과 숙련 사장의 문제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고령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인적 자원 낭비라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노인 정책은 단순한 복지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령층의 경력과 숙련, 전문성을 사회적 자산으로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시장 중심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대학이라는 공간이다. 고령층이 보유한 지식과 경험은 대학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후속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고, 이는 세대 간 연결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
UBRC의 등장 – 고령자와 대학, 새로운 공존의 모델
UBRC(University-Based Retirement Community)는 대학 캠퍼스 안이나 인근에 조성되는 은퇴자 공동체로, 미국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운영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소규모 실험으로 출발했지만, 고령층의 교육 욕구와 사회참여 욕구가 확대되면서 빠르게 확산되었고, 2025년 현재 100개 이상이 운영 중이다.
이 모델의 핵심은 ‘배움과 삶의 통합’이다. UBRC 입주자는 대학 강의에 청강생 또는 정식 수강생으로 참여할 수 있고, 도서관, 체육시설, 문화공간 등 캠퍼스 인프라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일부 공동체는 입주자의 전문성을 대학에 연계하여 강의나 멘토링, 연구 보조 등의 활동으로 연결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애리조나주립대의 ‘미라벨라(Mirabella at ASU)’, 플로리다주립대의 ‘오크 해먹(Oak Hammock)’, 스탠퍼드대의 ‘클래식 레지던스(Classic Residence)’ 등이 있다. 이들 공간은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고령자와 대학생이 공존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UBRC는 대학에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학령인구 감소로 재정난을 겪고 있는 많은 대학들이 UBRC를 통해 유휴 공간을 활용하고, 장기적 임대수익을 확보하는 동시에 지역사회 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UBRC 도입 움직임이 시작됐다. 부산의 동명대학교는 국내 최초로 UBRC를 조성 중이다. 캠퍼스 인근에 1000명 규모의 기숙사와 UBRC 단지를 조성하는 이 프로젝트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동명대는 반려동물학과, 언어청각재활학과, 간호학과 등 고령자의 관심이 높은 분야와 연계해, 입주 고령자에게 특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로써 은퇴 이후에도 학습과 자아실현, 지역사회 기여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대학은 이 UBRC 단지를 민간 사업자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연간 200억 원 수준의 수익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부동산 수익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학이 고령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며, 동시에 지역 내 고령자 복지 생태계를 혁신할 수 있는 기회로도 작용할 수 있다.
‘왜 대학인가?’ – UBRC가 주목받는 이유
UBRC가 단순한 고령자 주택단지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이라는 공간의 특성에 있다. 대학은 단지 교육기관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 문화와 세대가 만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고령자에게 배움과 성찰, 교류와 활동의 기회를 제공한다.
기존의 시니어타운이 폐쇄적이고 의료·복지 중심이었다면, UBRC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다. 대학생과의 세대 간 교류가 가능하고, 교직원 및 지역사회와의 연계도 자연스럽다. 노년의 삶이 고립되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연결되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과정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대학은 이미 강의실, 도서관, 실험실, 문화공간 등 다양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고령자 복지시설로의 전환 비용도 상대적으로 낮다. 특히 지방대학은 학령인구 감소로 유휴 자원이 증가하고 있어, UBRC는 대학과 지역사회가 함께 살 길을 모색하는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다. UBRC는 결국 고령자 개인의 욕구와 대학, 지역사회, 국가의 구조적 과제를 동시에 풀 수 있는 통합적 해법이다. 고령사회 한국에서 대학이 새로운 역할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방대학들은 학령인구 감소라는 구조적 위기 앞에 서 있다. 신입생 충원이 어려워지고, 이에 따라 등록금 수입이 줄어들며, 교육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인프라 투자 또한 제한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타개책으로 정부의 재정지원과 구조조정이 논의되지만, 보다 근본적인 생존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때 주목해야 할 해법이 바로 고령층과의 공생 모델, 그 중심에 있는 UBRC다.
UBRC는 단순히 유휴 부지를 활용해 고령자 주거시설을 짓는 개발 사업에 그치지 않는다. 대학이 가진 고유한 자산인 ‘지식’과 ‘공공성’을 활용해, 고령자와 대학생, 교수진, 지역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입체적 관계를 형성한다. 고령자는 대학을 통해 계속해서 배우고, 사회와 연결되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대학은 이들에게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재정적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교육과 연구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실제 미국의 여러 UBRC 사례들은, 단지 캠퍼스 내에 아파트를 짓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령 입주자가 대학 강의에 참여하거나 학생들과 함께 문화 행사에 참여하고, 경우에 따라 프로젝트에 자문을 제공하기도 한다. 지식을 주고받는 일방향이 아니라, 세대 간 역동적인 순환 구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지방대학들도 이러한 UBRC 모델을 본격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초고령 사회의 수요와 지역사회 활성화를 동시에 꾀할 수 있다. 고령층은 단순한 수요자가 아니라, 대학의 또 다른 구성원으로 편입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대학과 고령층은 단순한 ‘공존’을 넘어 ‘공생’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고령자 = 약자”라는 인식을 버려야
정책 설계의 근간에 있는 인식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고령층을 항상 복지 수혜자, 보호 대상, 노동시장 외부의 사람들로 간주하는 관행은 이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실제로 2023년 조사에 따르면, 고령자 대부분은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려 하고 있으며,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의지도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정책은 여전히 저임금·단순노무 중심의 일자리만을 제공하는 데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실은 경력 단절을 초래하고, 숙련과 전문성을 사회적으로 재활용할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2040년경에는 고도의 전문직 경력을 보유한 고령 인구가 약 17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단기 공공근로에 머물게 된다면 이는 사회적 손실이다. 결국 고령층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성과 실효성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령층 정책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첫째, 이들의 경력과 숙련을 유지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맞춤형 일자리를 설계해야 한다. 대학에서의 멘토링, 지역 산업과 연계한 컨설팅, 공공기관의 프로젝트 자문 등 경력 유지형 일자리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둘째, 고령 인력의 특성과 수요를 반영한 데이터 기반 정책이 필요하다. 산업별·지역별 매칭 시스템과 인력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수요와 공급이 효과적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중장기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령층은 단기 일자리 정책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집단이다. 재교육, 직무 전환 지원, 지역 내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등을 포함한 체계적 로드맵이 마련되어야 하며, 대학은 이 계획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UBRC, ‘고령사회의 실험실’이 될 수 있다
고령사회는 더 이상 미래의 이슈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이며,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향후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UBRC는 단순한 고령자 주거 대안이나 대학 재정 모델을 넘어, 한국 사회가 고령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험실로 기능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같은 나이, 다른 노인’의 시대에 들어섰다. 동일한 65세라도, 누군가는 첨단 기술 기반의 경력을 쌓은 사람이고, 또 누군가는 학문적 열정을 품고 대학 강의실을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UBRC는 이러한 다양한 고령층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학은 단지 젊은이를 위한 곳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고령층을 주로 ‘돌봐야 할 대상’으로 규정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 일하고, 함께 배워야 할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 UBRC는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지방대학의 재도약, 지역사회 활성화, 세대 간 연대라는 더 큰 파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실험을 누가 먼저,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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