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침묵과 학문적 독립 사이에서 다시 묻는 고등교육의 역할
미국 대학가에서 다시 ‘중립’ 논쟁이 커지고 있다. 전쟁과 캠퍼스 시위, 반유대주의 논란,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을 둘러싼 충돌, 정부의 고등교육 압박, 기부자와 정치권의 영향력 문제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대학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질문 앞에 서 있다. 대학은 사회적·정치적 쟁점에 대해 기관 명의로 입장을 밝혀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은 교육과 연구라는 본래 기능에 집중하고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가. 헨리 지루는 CounterPunch에 기고한 글에서 ‘제도적 중립성’이라는 언어가 학문의 자유를 지키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관계를 가리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적 정치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그 질문은 미국 대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학은 정말 정치로부터 떨어진 공간일 수 있는가. 중립은 대학을 지키는 원칙인가, 아니면 대학이 져야 할 책임을 미루는 언어인가.
미국 대학 논쟁의 배경에는 1967년 시카고대학의 ‘칼번 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는 대학을 “비판자들의 집이자 후원자”로 보면서도, 대학 자체가 비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쉽게 말해 교수와 학생은 자유롭게 주장하고 논쟁할 수 있어야 하지만, 대학이라는 기관이 특정 정치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오랫동안 미국 고등교육에서 제도적 중립성 논의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해왔다. 대학이 특정 정파나 운동의 대변자가 될 경우,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탐구와 발언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여기에 담겨 있다. 대학 본부가 어떤 사안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는 순간, 그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교수와 학생은 자신의 견해가 주변화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도적 중립성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학문 공동체 내부의 다원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이 기관 명의로 입장을 내지 않는다는 원칙이 언제나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은 아무 판단도 하지 않는 추상적 공간이 아니다. 교육과정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선택한다. 연구비 배분은 어떤 지식을 더 중요하게 볼 것인가를 결정한다. 교수 채용은 어떤 학문 분야와 방법론을 제도 안으로 들일 것인가를 가른다. 학생 징계는 어떤 표현과 행동을 허용 가능한 것으로 볼 것인가를 판단한다. 기부금을 받을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특정 기업이나 정부기관과 협력할 것인지, 지역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도 모두 가치 판단을 포함한다. 이런 선택들이 반복되는 곳에서 대학이 완전히 비정치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
대학이 정당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대학이 가치 판단 없는 기관이어야 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대학은 선거운동을 하는 조직이 아니며, 특정 정당의 이념을 교육과 연구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학은 진실과 허위, 자유와 억압, 존엄과 차별, 학문적 정직성과 권력의 압박 사이에서 아무 기준도 갖지 않아야 하는 기관도 아니다. 대학은 공론장의 일부이며, 지식 생산을 통해 사회가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중립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오히려 진짜 질문은 대학이 어떤 종류의 중립을 지켜야 하며, 어떤 종류의 침묵을 경계해야 하는가에 있다.
중립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정파적 중립이다. 대학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과 연구의 방향이 흔들리고, 대학이 권력의 요구에 따라 특정 역사 해석이나 사회 인식을 강요한다면 학문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대학 본부가 특정 정치 진영의 언어를 그대로 반복하거나, 구성원에게 하나의 입장만을 사실상 정답처럼 요구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 의미에서 중립은 필요하다. 대학은 정파적 충성의 장이 아니라 논쟁과 검증의 장이어야 한다. 서로 다른 견해가 충돌할 수 있어야 하고, 불편한 질문도 제기될 수 있어야 하며, 소수의 견해가 다수의 압력 때문에 침묵당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책임 회피로서의 중립이다. 이것은 전혀 다르다. 대학이 인권 침해, 학문의 자유 침해, 차별, 폭력, 역사 왜곡, 민주주의의 후퇴와 같은 문제 앞에서도 “우리는 중립”이라고 말하며 어떤 판단도 하지 않겠다고 할 때, 그 중립은 학문적 독립이 아니라 제도적 회피에 가까워질 수 있다. 특히 권력이 한쪽 방향으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을 때, 침묵은 실제로는 현상 유지에 힘을 보탤 수 있다.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는 말은 겉보기에는 공정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작동 중인 불균형을 그대로 두겠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중립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미국 대학에서 제도적 중립성 논쟁이 격화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미국 대학들은 전쟁과 국제정치, 캠퍼스 시위, 표현의 자유, 혐오표현, 인종과 젠더 문제, 기부자와 정치권의 압박이 뒤얽힌 복잡한 상황에 놓였다. 일부 대학은 사회적 쟁점에 대한 기관 차원의 입장 표명을 줄이거나 제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대학이 본래의 교육·연구 기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이 모든 국제적 사건과 정치적 쟁점에 대해 입장을 내기 시작하면, 학문기관이 아니라 정치기관처럼 보일 수 있다는 우려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이런 중립 언어가 현실의 권력관계를 가리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대학이 어떤 목소리는 ‘표현의 자유’로 보호하고, 다른 목소리는 ‘질서 위반’으로 징계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은 한국 대학에도 낯설지 않다. 한국 대학은 미국 대학과 제도와 역사, 정치 환경이 다르지만, 대학이 사회적 쟁점 앞에서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동일하게 존재한다. 대학은 정부 재정지원사업, 대학평가, 등록금 규제, 취업률, 연구비, 기부금, 지역 정치, 학생 민원, 언론 보도, 온라인 여론 등 수많은 압력 속에서 움직인다. 대학이 어떤 사안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대학 본부의 한 문장이 곧장 정치적 논란으로 번지고, 구성원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외부 평가와 평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입장에서 ‘침묵’은 때로 가장 안전한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전한 선택이 언제나 교육적으로 옳은 선택은 아니다. 대학이 모든 갈등을 피하고, 모든 논쟁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모든 민감한 질문을 ‘불필요한 정치화’로 밀어내기 시작하면 대학의 공공성은 약해진다. 대학은 단순히 학위를 발급하고 취업률을 높이는 기관이 아니다. 대학은 사회가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을 탐구하는 곳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불평등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역사적 기억은 왜 중요한지, 시장의 논리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인간의 존엄은 어떤 제도 속에서 지켜질 수 있는지를 묻는 곳이다. 이런 질문들은 필연적으로 사회적이며, 때로는 정치적이다. 대학이 이 질문들을 회피한다면, 대학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축소하게 된다. 고등교육의 위기는 종종 재정의 언어로 설명된다. 학령인구 감소, 등록금 동결, 재정지원사업 의존, 연구비 경쟁, 지역소멸, 취업률 압박, 대학 간 서열화가 대학을 압박한다. 이 진단은 맞다. 그러나 재정 위기만으로 대학의 위기를 설명하면 중요한 것이 빠진다. 대학이 어떤 지식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시민을 길러낼 것인지, 어떤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사라진다. 대학이 생존을 위해 평가 지표를 관리하고, 정부사업에 맞춰 조직을 바꾸고, 취업률과 충원율과 재정지표에 집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대학이 비판적 사고와 공적 책임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대학은 살아남더라도 대학다움을 잃을 수 있다.
헨리 지루의 글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여기에 있다. 대학의 위기는 교수와 학생이 너무 정치적이어서 생긴 것인가, 아니면 대학을 시장과 권력의 논리에 맞추어 재편해온 구조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 질문은 미국 대학 논쟁을 넘어 고등교육 일반에 적용될 수 있다. 대학이 점점 더 시장의 언어로 설명될수록, 지식은 상품이 되고 학생은 소비자가 되며 연구는 수익성과 성과지표로 환산된다. 이 구조 안에서 인문학, 기초학문, 비판적 사회과학, 예술, 시민교육은 쉽게 ‘비효율’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대학이 사회를 성찰하는 기능보다 시장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기능으로만 이해될 때, 중립은 때로 편리한 명분이 된다. “우리는 정치적 논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는 현재의 평가체계와 시장질서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말로 바뀔 수 있다.
물론 대학이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학 본부가 지나치게 자주 정치적 성명에 나서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기관의 공식 입장이 구성원 전체의 견해처럼 받아들여지고, 반대 의견을 가진 구성원이 위축될 수 있다. 또한 대학의 입장이 충분한 숙의 없이 발표될 경우, 학문적 판단이 아니라 평판관리나 여론 대응으로 보일 위험도 있다. 대학은 신중해야 한다. 모든 사건에 즉각 반응하는 것은 대학의 방식이 아닐 수 있다. 대학은 속보 경쟁을 하는 언론도 아니고, 정치적 동원을 목표로 하는 단체도 아니다. 대학의 언어는 보다 깊고, 검증 가능하며, 열린 토론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 발언도 아니고 무조건적 침묵도 아니다. 대학은 정파적 동원과 공적 책임을 구분해야 한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대학의 역할이 아니다. 그러나 학문의 자유가 침해되고, 구성원의 존엄이 훼손되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지식의 독립성이 외부 권력에 의해 위협받을 때 대학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대학의 역할이 아니다. 대학의 발언은 정파적 구호가 아니라 학문적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그 원칙은 자유로운 탐구, 표현의 자유, 차별받지 않을 권리,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직성, 폭력에 대한 비판, 인간 존엄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대학의 중립성은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중립은 가치 없음이 아니다. 중립은 권력 앞에서 몸을 낮추는 기술도 아니다. 중립은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독립의 원칙이어야 한다. 동시에 중립은 모든 가치 판단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은 정파적으로는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학문적 자유와 인간 존엄,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중립적일 수 없다. 대학이 지켜야 할 것은 무색무취의 침묵이 아니라, 권력과 여론과 시장의 압력 속에서도 질문할 수 있는 자유다.
한국 대학의 현실에서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대학들은 이미 강한 외부 의존 구조 안에 있다. 정부 재정지원사업은 대학의 전략과 조직을 크게 좌우한다. 대학평가 지표는 대학의 행정 언어와 정책 우선순위를 바꾼다. 학령인구 감소는 대학을 생존경쟁으로 몰아넣는다. 지역대학은 지역소멸의 위기와 함께 흔들리고, 수도권 대학도 글로벌 경쟁과 재정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조건에서 대학이 사회적 의제에 대해 독립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질문은 더 중요해진다. 대학이 재정지원사업의 수행기관으로만 기능하고, 평가 지표의 관리조직으로만 움직이며, 사회적 논쟁 앞에서는 늘 침묵한다면 고등교육은 점점 행정체계 안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대학은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학생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배우는 곳이다. 학생은 대학에서 전공 지식만 배우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한 질문인지, 어떤 주장에 근거가 필요한지, 서로 다른 의견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권위 있는 말도 검증될 수 있는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 다수의 상식이 언제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운다. 이러한 배움은 정치적 선동과 다르다. 오히려 민주사회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기본 역량이다. 대학이 이것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회피한다면, 대학 교육은 직무 훈련으로 축소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학이 학생에게 특정한 답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만들어가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점이다. 대학이 민주주의를 말한다고 해서 특정 정파를 지지하라는 뜻은 아니다. 대학이 인권을 말한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쟁점에 하나의 결론만 허용하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대학은 복잡한 문제를 복잡한 상태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전쟁과 평화,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 역사적 책임과 현재의 갈등, 안보와 인권, 시장과 공공성 같은 문제는 단순한 구호로 정리되지 않는다. 대학은 바로 그런 문제를 견디고 토론하는 훈련의 공간이어야 한다. 침묵이 아니라 숙의가 대학의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대학은 종종 숙의보다 관리를 선택한다. 갈등이 생기면 토론의 장을 열기보다 사안을 축소하고, 문제 제기를 제도 밖으로 밀어내며, 구성원의 불만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정하는 데 집중한다. 물론 모든 갈등을 공개 토론으로 풀 수는 없다. 대학 행정에는 질서 유지와 피해 예방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대학이 갈등을 오직 리스크로만 바라보면, 비판적 문제 제기도 함께 사라진다. 대학 안에서 불편한 말이 사라진다고 해서 대학이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문이 사라진 대학은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조용함은 지적 활력의 부재일 수 있다.
대학의 중립성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대학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대학을 단순한 교육서비스 기관으로 본다면 중립은 비교적 간단하다. 고객인 학생에게 필요한 교육상품을 제공하고, 정치적 논란을 피하며, 취업과 자격 취득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된다. 그러나 대학을 공적 지식기관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학은 사회가 아직 합의하지 못한 문제를 연구하고, 권력이 불편해하는 질문도 제기하며, 당장의 효율성으로 환산되지 않는 지식을 보존해야 한다. 이때 중립은 침묵의 기술이 아니라 독립의 조건이다. 대학이 권력에도, 시장에도, 대중 여론에도 완전히 종속되지 않을 때 비로소 대학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대학이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위험하게 들릴 수 있다. 그래서 표현을 더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대학은 정파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학은 공적이어야 한다. 대학은 선거정치의 하위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조건을 가르치고 지키는 일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대학은 특정 이념의 확성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학문적 사실과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힘 앞에서 침묵을 원칙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이 구분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모든 공적 발언을 정치화로 몰아가거나, 반대로 모든 정치적 주장을 대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양극단에 빠질 수 있다.
대학의 침묵은 때로 필요하다.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 서둘러 말하지 않는 신중함은 대학의 덕목이다. 그러나 침묵이 반복되어 원칙이 되면, 그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무책임이 될 수 있다. 대학이 말해야 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기준은 편의가 아니라 원칙이어야 한다. 그 기준은 대학의 핵심 기능과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연구와 교육의 독립성이 훼손될 때, 구성원의 안전과 존엄이 침해될 때,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진실이 정치적 압력으로 왜곡될 때, 대학은 침묵만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다. 그 순간 대학의 발언은 정치적 편향이 아니라 제도적 책무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기준은 한국 고등교육에도 절실하다. 대학이 정부와 시장의 압력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의 생존 전략이 대학의 사명 자체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대학은 취업률을 높여야 하지만, 취업률만으로 대학의 가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 대학은 재정을 확보해야 하지만, 재정 확보가 학문적 독립을 잠식해서는 안 된다. 대학은 사회적 신뢰를 얻어야 하지만, 신뢰를 이유로 불편한 질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대학은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 하지만, 안정이 곧 침묵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대학의 중립성 논쟁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학은 이미 선택하고 있다. 무엇을 가르칠지 선택하고, 무엇을 평가할지 선택하고, 어떤 연구를 장려할지 선택하고, 어떤 갈등을 드러낼지 감출지 선택한다. 그러므로 대학이 “우리는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더 정직한 질문은 이것이다. 대학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선택을 어떤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대학의 결정은 권력과 시장의 편의를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학문과 공공성의 기준을 지키고 있는가. 대학이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구성원의 자유를 넓히는가, 아니면 책임을 피하는가.

고등교육의 보편적 사명은 사회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대학은 사회의 거울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실험실이다.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곳이다. 이 역할은 결코 중립적인 기술만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지식은 현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교육은 언제나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대학이 시민을 길러낸다는 말은 오래된 표현이지만, 오늘날 오히려 더 절실하다. 정보는 넘치지만 판단은 약해지고, 의견은 많지만 숙의는 줄어들며, 기술은 발전하지만 공적 책임은 흐려지는 시대에 대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대학은 어디까지 중립적일 수 있는가. 답은 단순하지 않다. 대학은 정파적 이해관계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진실과 허위 사이에서, 자유와 억압 사이에서, 존엄과 차별 사이에서, 학문의 독립과 권력의 통제 사이에서 완전히 중립적일 수는 없다. 대학의 진짜 중립은 침묵이 아니라 독립이다. 대학의 진짜 책임은 모든 쟁점에 성명을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압력 속에서도 질문할 수 있는 조건을 지키는 것이다. 대학은 정치적 구호를 생산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사회의 핵심 가치가 흔들릴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기관이 되어서도 안 된다. 결국 대학의 중립은 다시 써야 한다. 그것은 정치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정파성으로부터의 독립이어야 한다. 그것은 갈등을 피하는 행정적 안전장치가 아니라 자유로운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공적 원칙이어야 한다. 그것은 대학을 조용하게 만드는 언어가 아니라, 대학이 권력과 시장과 여론의 압력 속에서도 학문적 정직성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침묵이 언제나 중립은 아니다. 때로 침묵은 선택이며, 그 선택은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대학이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중립은 책임 회피의 말이 아니라 학문적 독립의 언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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