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경주기행」, 아이를 죽인 자를 죽인 엄마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

피해자가 납득하지 못한 판결, 끝나지 못한 가족의 8년
죽은 딸을 붙잡은 엄마와 살아 있는 엄마를 붙잡아야 했던 세 딸
사적 복수를 심판하기 전, 실패한 공적 심판의 책임을 묻다

아이를 죽인 범죄자가 8년 만에 세상으로 돌아온다. 법이 정한 형기를 마쳤으니 가해자에게 사건은 끝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잃은 가족에게는 그렇지 않다. 딸이 없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범죄가 남긴 상처도 끝나지 않았다. 국가는 판결로 사건을 종결했지만 가족의 시간은 8년 전 그날에 그대로 멈춰 있다. 김미조 감독의 영화 「경주기행」은 바로 그 간극에서 시작한다. 막내딸 경주를 잃은 엄마 옥실은 가해자 백상현의 출소를 기다리며 8년 동안 복수를 준비한다. 출소일이 다가오자 옥실은 세 딸 장주·영주·동주와 함께 노란 봉고차를 타고 경주로 향한다. 목적은 가족여행이 아니다. 경주를 죽인 사람을 죽이기 위한 여행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사적 복수를 다룬 범죄극이다. 그러나 「경주기행」이 던지는 질문은 ‘복수는 옳은가’에 머물지 않는다.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판결로 사건을 서둘러 끝낸 사회가, 끝내 자신의 손으로 사건을 끝내려 한 엄마에게 다시 죄를 물을 자격이 있는가. 영화는 그 불편한 질문을 가족의 상실과 애도, 그리고 뒤늦게 드러나는 세 딸의 상처 속으로 밀어 넣는다.

판결은 끝났지만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경주를 죽인 백상현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다. 국가의 언어로 그는 죗값을 치른 사람이다. 그러나 옥실에게 8년은 딸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딸은 돌아오지 않는데 가해자에게는 다시 살아갈 미래가 주어진다. 피해자의 삶은 사건이 일어난 날부터 무너져 있는데, 가해자의 삶에는 법이 정한 종료 시점이 존재한다. 「경주기행」은 이 불균형을 옥실의 복수심을 통해 드러낸다. 가해자의 사정과 교화 가능성에는 세심한 언어를 부여하면서도, 피해자의 회복 불가능한 상실에는 충분한 무게를 두지 않는 사법적 관대함은 또 하나의 상처가 된다. 판결이 법률적으로 확정됐다고 해서 피해자에게까지 사건의 종결을 명령할 수는 없다.

물론 판결이 피해자의 감정과 언제나 일치할 수는 없다. 형량이 오직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결정돼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적어도 범죄의 중대성과 피해의 회복 불가능성을 충분히 반영해, 사회 역시 이 죽음을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는 있어야 한다. 그 믿음마저 무너질 때 피해자는 법이 자신을 대신해 정의를 실현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잃는다. 옥실이 원한 것은 어쩌면 백상현의 죽음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딸의 생명이 결코 8년이라는 형량으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이었다는 확인, 경주의 죽음 앞에서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었을지 모른다.

복수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복수극의 마지막에 흔히 등장하는 이 명제는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자의 복수심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간단하다.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옥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옥실이 복수를 원하는 것은 딸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법이 충분히 짊어지지 않은 경주의 죽음을 자신이 끝까지 짊어지려는 것이다. 사회가 온전히 확인해주지 않은 딸의 생명과 죽음의 무게를 가해자에게 직접 돌려주려는 몸부림이다. 그렇다면 영화 앞에서 물어야 할 것은 “복수가 옥실을 치유했는가”만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옥실에게 복수하지 않고도 애도를 시작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주어진 적이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공적 심판이 피해자의 신뢰를 얻지 못한 자리에서 사적 복수는 시작된다. 그렇다고 영화가 사적 제재를 하나의 정의로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옥실의 선택은 또 다른 죽음을 만들고, 그 결과 옥실은 다시 법정에 선다. 법은 사람을 죽인 옥실에게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옥실의 죄만을 심판하는 것으로 이 사건의 정의가 완성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죽은 딸을 붙잡은 엄마, 살아 있는 엄마를 붙잡은 딸들

「경주기행」이 복수의 정당성만을 다루는 영화였다면 이야기는 옥실과 백상현 사이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복수를 위해 떠난 네 모녀의 여정 속에서 장주·영주·동주가 지난 8년 동안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하나씩 드러낸다.옥실이 막내딸 경주를 잃은 엄마라면, 세 딸 역시 동생을 잃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드러낼 여유가 없었다. 엄마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세 딸은 엄마가 무너지지 않도록 가족의 일상을 떠받치고, 엄마의 복수심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가족 전체를 삼키지 않도록 버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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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장주는 무너진 엄마를 대신해 가족을 책임졌다. 자신도 동생을 잃었지만 슬퍼하기보다 남은 가족의 일상을 지키는 사람이 돼야 했다. 둘째 영주는 복수가 불러올 현실적 결과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엄마를 외면할 수 없어 냉정한 판단과 가족에 대한 연대 사이에서 흔들린다. 셋째 동주는 죽은 경주에게 품었던 복잡한 감정 때문에 자신의 슬픔마저 의심하며 죄책감을 견딘다. 엄마에게는 죽은 막내딸만 보였을지 모르지만, 엄마 곁에는 살아 있는 세 딸도 있었다. 옥실은 죽은 딸을 잊지 않기 위해 복수에 매달렸고, 세 딸은 살아 있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슬픔을 뒤로 미뤘다.

그렇다고 옥실을 죽은 딸만 바라보느라 살아 있는 딸들을 돌보지 않은 엄마라고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 옥실 역시 감당할 수 없는 상실과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 속에 방치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한 사람의 상처가 사회적으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을 때, 그 고통과 책임이 가족 안에서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가깝다.

옥실은 복수를 책임지고, 장주는 가족의 일상을 책임진다. 영주는 현실적 판단을 맡고, 동주는 말하지 못한 죄책감을 떠안는다. 사회가 받아내지 못한 피해자의 고통을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으로 대신 감당한 셈이다.

같은 경주를 잃었지만 같은 슬픔은 아니었다

네 사람은 같은 가족을 잃었지만 서로 같은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았다. 엄마가 잃은 딸과 언니들이 잃은 동생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다. 경주와 각자가 맺었던 관계가 다른 만큼 그 죽음 뒤에 남은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옥실의 슬픔과 복수라는 압도적인 목표 앞에서 세 딸의 감정은 쉽게 말해지지 못한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조차 죽은 동생을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들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같은 슬픔과 같은 복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8년 동안 그 차이를 드러내기는 어려웠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여행에서 비로소 감춰뒀던 감정들이 터져 나온다. 가족을 떠받쳐온 부담,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원망, 동생에게 품었던 복잡한 감정, 복수를 멈추고 싶으면서도 엄마를 외면할 수 없었던 갈등이 서로에게 전달된다.

복수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복수를 향해 가는 동안, 가족은 옥실의 슬픔 뒤에 가려져 있던 세 딸의 상처를 처음으로 마주한다. 이들의 이해는 “우리 모두 똑같이 아팠다”는 확인이 아니다. 같은 사람을 잃고도 서로 다르게 아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기행」은 경주라는 도시를 향한 여행이면서 죽은 경주에게 다가가는 여행이고, 동시에 서로의 고통을 알지 못했던 가족이 뒤늦게 서로에게 도착하는 여행이다.

영화의 무거운 주제와 달리 네 모녀의 여행은 시종일관 비장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나선 가족은 끼니를 챙기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 앞에서 허둥댄다. 복수극과 로드무비, 블랙코미디가 뒤섞이며 비극의 한가운데서도 웃음이 나온다. 이 웃음은 경주의 죽음을 가볍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깊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도 밥을 먹고 농담을 하며,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가족과 싸운다. 비극 이후에도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의 유머는 그 모순을 억지로 봉합하지 않고 한 화면에 놓는다.

그 과정에서 이정은·공효진·박소담·이연은 각기 다른 상처와 역할을 지닌 가족을 생활감 있게 만들어낸다. 특히 네 모녀가 주고받는 말과 표정에는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만의 친밀함과 피로, 애정과 원망이 동시에 묻어난다. 복수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사건의 현실성보다 인물과 관계의 현실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장르를 오가는 과정에서 범죄극의 긴장감이 다소 느슨해지고, 후반부의 감정과 상징이 비교적 익숙한 방식으로 수렴한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사법적 판단의 구체적인 과정이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채 짧은 형량이 복수의 전제로 기능한다는 점도 영화가 던진 질문에 비해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복수를 통쾌한 응징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그 이전과 이후에 남겨진 가족의 시간을 바라본다는 점은 분명하다.

엄마의 죄만 묻는 것으로 정의는 완성되는가

옥실이 가해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다면 법은 그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사람을 죽인 행위를 피해자의 슬픔만으로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옥실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것과, 그를 오직 또 한 명의 살인자로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경주를 죽인 범죄와 옥실의 복수는 법률상 같은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두 행위가 발생한 맥락과 그 안에 놓인 책임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옥실의 행위를 판단하려면 그가 딸을 잃은 뒤 어떤 판결을 받았고, 사회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으며, 왜 8년 동안 복수 외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엄정한 판결이 경주를 되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옥실과 세 딸의 상처를 모두 치유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경주의 죽음을 그 생명의 무게에 합당하게 받아들였다는 믿음을 주었다면, 옥실은 복수에 남은 삶을 걸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장주와 영주, 동주 역시 무너진 엄마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슬픔을 그토록 오래 미루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경주기행」은 아이를 죽인 자를 죽인 엄마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엄마의 죄를 심판하기 전에 묻는다. 한 아이의 죽음을 충분히 무겁게 다루지 못해 엄마를 복수자로 만들고, 남은 딸들에게 가족의 삶을 떠맡긴 사회의 책임은 누가 물을 것인가.

옥실은 법정에 서지만, 그 법정에 함께 서야 할 것은 옥실만이 아니다.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판결로 사건을 끝낸 사법제도와, 남겨진 가족이 무너지는 동안 그 고통을 가족 내부의 몫으로만 남겨둔 사회 역시 심판의 대상이어야 한다. 결국 「경주기행」이 보여주는 것은 복수가 애도를 완성하는 순간이라기보다, 제대로 된 공적 심판이 부재한 자리에서 한 가족이 너무 오랫동안 애도를 시작하지 못한 시간이다. 네 모녀가 경주로 향한 ‘죽이는 여행’은 가해자를 죽이기 위해 시작됐지만, 그 길의 끝에서 이들이 비로소 마주한 것은 서로가 홀로 견뎌온 상처였다.

경주로 가는 길은 죽은 경주에게 돌아가는 길이었고, 동시에 살아남은 가족이 서로에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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