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은 예외가 아니라 상태가 되었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Global Risks Report 2026』은 지금의 세계를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한다. 불확실성은 더 이상 일시적 위기 국면에서만 등장하는 예외가 아니라,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상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향후 2년과 10년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인식이 모두 부정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세계가 ‘격동적’이거나 ‘폭풍우 치는’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고 전망했고, 안정적인 미래를 예상한 응답은 사실상 통계적으로 의미 없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 같은 인식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니라, 지난 10여 년간 누적되어 온 구조적 변화에 대한 평가에 가깝다.
중요한 점은 불확실성을 특정 사건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정학적 분쟁, 팬데믹, 기후 위기, 기술 가속화는 각각 독립적인 위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증폭시키며 작동해 왔다. 세계경제포럼이 이미 몇 해 전부터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26년판 보고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복합위기가 더 이상 관리 가능한 범주에 있지 않으며, 국제 질서의 기본 작동 원리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변화의 핵심에 놓인 개념이 바로 ‘경쟁의 시대(Age of Competition)’다. 경쟁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보고서가 말하는 경쟁의 시대란, 국가 간 이해 충돌이 심화되었다는 수준을 넘어, 협력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와 신뢰의 기반이 구조적으로 약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경쟁이 강화된 것이 아니라 협력이 작동하지 않는 환경이 일상화되었다는 진단이다.
다자주의의 후퇴, 협력 질서의 균열
보고서는 2026년 글로벌 리스크를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다자주의의 후퇴’를 제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 질서는 규칙과 제도를 통해 경쟁을 관리하는 구조였다. 무역 분쟁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규범 안에서 다뤄졌고, 금융 위기는 국제 공조를 통해 완화되었으며, 기술과 지식은 비교적 개방된 환경 속에서 교류되었다. 이 질서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경쟁이 충돌로 비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완충 장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보고서가 그려내는 현재의 풍경은 이와 다르다. 규칙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규칙을 지킬 유인이 약화되었고, 규칙을 강제할 수단은 더욱 제한되고 있다. 국제기구에 대한 신뢰는 하락했고, 규범 위반에 대한 제재는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그 결과 국가들은 점점 더 ‘제도 안의 협력’보다 ‘자국 중심의 대응’을 선택하게 되었다. 보고서는 이를 다자주의의 위기라기보다, 다자주의가 더 이상 국제 질서를 조직하는 중심 원리가 아니게 된 상태로 규정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외교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무역, 투자, 기술, 공급망, 심지어 지식 교류까지도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협력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신뢰에 기반한 상호 개방의 형태가 아니라, 조건부·선별적 협력으로 전환되고 있다. 보고서가 말하는 ‘경쟁의 시대’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지정학에서 지경학으로, 갈등의 중심축 이동
『Global Risks Report 2026』에서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단기 글로벌 리스크 1위로 ‘지경학적 대립(Geoeconomic confrontation)’이 올라섰다는 점이다.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아닌, 경제 수단을 활용한 국가 간 대립이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의미다. 관세 인상, 제재, 수출 통제, 투자 제한, 기술 봉쇄는 더 이상 예외적인 조치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지경학적 대립은 지정학적 갈등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군사적 충돌보다 먼저, 혹은 그에 앞서 경제 영역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양상을 보인다. 무력 충돌이 국제적 비난과 즉각적인 비용을 동반한다면, 경제적 조치는 상대적으로 낮은 정치적 비용으로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이 점이 지경학적 대립을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지적한다. 경제 수단의 무기화는 그 파급 범위 또한 광범위하다. 특정 국가를 겨냥한 조치가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흔들고, 제3국과 민간 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보고서가 지경학적 대립을 단순한 국가 간 분쟁이 아니라 ‘시스템 리스크’로 분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는 더 이상 갈등의 완충 장치가 아니라, 갈등을 증폭시키는 매개가 되고 있다.
지경학적 경쟁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전통적인 전쟁과 달리 명확한 시작과 끝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군사적 충돌은 선언과 휴전, 혹은 승패라는 형태로 국면이 전환되지만, 경제를 매개로 한 경쟁은 일상 속에 스며든다. 관세는 일시적으로 부과되었다가 철회되지 않고, 기술 규제는 예외가 아닌 기본 조건이 되며, 공급망 재편은 단기간에 되돌릴 수 없는 구조 변화를 남긴다. 이 과정에서 경쟁은 특정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 세계 경제 전반의 작동 방식을 바꿔놓는다. 특히 공급망은 이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안보의 문제로 다뤄진다. 팬데믹과 지정학적 긴장을 거치며 각국은 안정적인 조달보다 ‘통제 가능한 조달’을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비용 증가나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자국 중심의 생산과 유통 구조를 구축하려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글로벌 분업 체계는 느슨해지고, 특정 국가나 지역에 대한 의존은 위험 요소로 간주된다. 공급망은 더 이상 중립적인 경제 인프라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는 전략 자산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 영역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기술과 같은 핵심 기술은 성장 산업이기 이전에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술 이전은 협력의 산물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위험으로 간주되며, 연구와 개발은 개방보다 보호의 논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기술 표준과 규제는 시장 질서를 정하는 도구를 넘어,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경쟁의 시대에 기술은 더 이상 가치 중립적인 혁신의 결과물이 아니다.
금융 또한 예외는 아니다. 제재와 자산 동결, 결제망 차단과 같은 조치는 군사적 충돌 없이도 상대 국가에 상당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금융 시스템은 오랫동안 글로벌 협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갈등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가 반복될수록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가 약화된다는 점이다. 금융이 정치화될수록, 참여자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 하고, 이는 다시 시스템의 분절화를 가속한다. 이처럼 경제, 기술, 금융이 동시에 경쟁의 장으로 전환되면서 국제 질서는 새로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과거에는 갈등이 경제를 훼손하는 요인이었다면, 이제는 경제가 갈등을 매개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전환은 단기간에 끝날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국제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쟁은 더 이상 특정 국면의 선택지가 아니라, 국제 질서의 기본 작동 방식이 되었다.
신뢰의 붕괴, 협력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
경쟁의 시대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힘의 균형이 아니라 신뢰의 소진이다. 협력은 이해관계의 일치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가 규칙을 지킬 것이라는 기대, 약속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 예측 가능성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 질서에서는 이러한 전제가 점점 성립하지 않는다. 규칙은 존재하지만 언제든 예외가 될 수 있고, 합의는 유지되지만 상황에 따라 재해석된다. 그 결과 국가는 협력을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잠정적 전술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뢰는 축적되는 자산이 아니라 소모되는 비용이 된다. 한 번의 제재, 한 차례의 규제 강화, 한 번의 약속 파기는 단기간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협력의 토대를 약화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개별 국가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압력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쟁이 상수로 작동하는 환경에서는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한 선택으로 인식된다. 상대가 규칙을 어길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먼저 규칙을 벗어나는 것이 합리적인 전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협력은 더 이상 제도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 협력은 상대의 의도를 끊임없이 검증해야 하는 조건부 관계로 전환되었고, 이 과정에서 거래 비용은 증가한다. 국제 협약과 다자 기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영향력은 점점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작동한다. 신뢰의 붕괴는 협력의 실패라기보다, 협력이 전제하던 조건이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과거의 국제 경쟁은 일정 부분 관리 가능했다. 냉전 시기에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과 암묵적 합의가 존재했고, 경제 교류는 갈등을 완화하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쟁은 이러한 완충 장치를 상실한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다. 경쟁은 더 이상 특정 분야나 국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경제·기술·사회 전반으로 확산된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충돌은 연쇄적인 불안을 촉발한다. 특히 위험한 점은 경쟁이 상호 강화되는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한 국가의 보호 조치는 다른 국가의 대응을 불러오고, 이는 다시 최초 조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이 순환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각국은 자국의 안정을 위해 선택한 조치가 전체 시스템의 불안정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중단할 수 있는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경쟁은 선택이 아니라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불안정은 위기의 빈도를 높일 뿐 아니라, 위기의 성격 자체를 바꾼다. 단일 사건이 아니라 여러 위험이 동시에 발생하고,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낸다. 관리 가능한 경쟁과 구조적 불안정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는 조정과 복원이 가능했지만, 후자는 대응 자체가 또 다른 위험을 낳는다.
경쟁의 일상화가 남긴 질문
경쟁이 국제 질서의 기본 조건이 되면서, 세계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협력이 더 이상 기본값이 아닌 상황에서, 공동의 문제는 어떻게 다뤄질 수 있는가. 기후 변화, 팬데믹, 기술 통제와 같은 초국경적 문제는 경쟁의 논리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경쟁을 멈출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외교나 안보의 문제가 아니다. 경쟁의 일상화는 정책 결정의 방식, 제도의 설계, 그리고 사회가 위험을 인식하는 틀 자체를 바꾸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일시적인 조정 국면이 아니라, 장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경쟁은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세계가 작동하는 기본 조건이 되고 있다. 이제 문제는 경쟁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경쟁 속에서 무엇이 유지될 수 있는가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 단계에서 더 구체적인 영역으로 확장된다. 기술과 지식은 이 경쟁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다음 논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경쟁이 국제 질서의 기본 조건이 되면서 가장 먼저 변한 영역 중 하나가 지식과 기술이다. 과거 지식은 교류를 통해 축적되고, 기술은 확산을 통해 가치를 키우는 자산으로 인식되었다. 연구 협력은 국가 간 긴장을 완화하는 보조 장치로 기능했고, 학문은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일정 정도 분리된 영역으로 존중받았다. 그러나 경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구분은 빠르게 흐려지고 있다. 지식은 더 이상 중립적인 공공재로 간주되지 않으며, 기술은 전략적 우위의 핵심 자산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히 특정 기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연구 주제의 선정, 연구비의 배분, 국제 공동연구의 범위와 조건까지 모두 안보와 전략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협력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그것은 개방이 아니라 통제된 개방의 형태를 띤다.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 어떤 정보가 공유될 수 있는지, 어느 수준까지 허용되는지가 사전에 정해진다. 지식의 생산과 유통은 점점 더 정치적 판단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학문은 경쟁 질서의 외곽이 아니라 그 내부로 편입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식의 성격 자체가 바뀐다. 과거에는 연구의 성과가 공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면, 이제는 공개 여부가 전략적 선택이 된다. 특정 성과는 보호되고, 특정 정보는 차단되며, 연구의 속도와 방향은 국가적 우선순위에 의해 조정된다. 지식은 공유를 통해 발전하기보다, 선점과 보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학과 연구 협력의 구조적 압박
이러한 변화는 대학과 연구기관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한다. 대학은 오랫동안 국경을 넘는 협력의 거점이었다. 학자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했고, 연구 네트워크는 정치적 경계를 넘어 확장되었다. 그러나 경쟁이 일상화된 환경에서는 이 전제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연구 협력은 잠재적 위험으로 인식되고, 학술 교류는 안보적 검토의 대상이 된다. 대학은 지식 생산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전략적 관리의 대상이 되는 이중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압박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 특정 국가와의 공동연구는 제한되거나 중단되고, 연구비 지원에는 조건이 붙는다. 데이터 접근과 연구 인프라는 국적과 소속에 따라 차등적으로 개방된다. 이러한 변화는 개별 대학의 선택이라기보다, 외부 환경이 강제하는 구조적 조정에 가깝다. 대학이 아무리 학문적 자율성을 강조하더라도, 재정과 제도, 규제의 틀 안에서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제한이 연구의 질과 속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지식은 축적과 교류를 통해 진화하지만, 경쟁의 논리는 분절과 차단을 강화한다. 연구 협력이 줄어들수록 중복은 늘어나고, 혁신의 속도는 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이러한 비용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인다. 경쟁의 시대에는 효율보다 통제가 우선되기 때문이다.
지식과 기술이 경쟁의 장으로 편입되면서 세계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한다. 협력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협력할수록 취약해질 수 있다는 인식 또한 강해지고 있다. 기후 변화, 감염병, 기술 안전과 같은 문제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해결 과정에서 요구되는 신뢰와 개방은 경쟁 질서와 충돌한다. 이 딜레마는 단기간에 해소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결국 경쟁의 시대는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조건의 문제로 귀결된다. 협력을 포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수준의 협력이 가능한가를 묻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기술과 지식의 영역에서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경쟁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지식은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고,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 이 질문은 다음 단계에서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인공지능, 기후, 그리고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변화가 바로 그 무대다.

협력은 끝났는가, 아니면 조건이 바뀌었는가
경쟁의 시대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협력이 사라졌는가를 묻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협력은 여전히 필요하고, 많은 영역에서 불가피하다. 다만 협력이 작동하던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신뢰를 전제로 한 개방적 협력은 점점 줄어들고, 계산과 검증을 전제로 한 제한적 협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는 협력의 종말이라기보다, 협력의 성격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 변화는 국제 질서를 보다 불안정하게 만든다. 조건부 협력은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붕괴될 가능성이 높고, 상호 의존은 언제든지 취약성으로 전환될 수 있다. 경쟁이 상수로 작동하는 환경에서는 장기적 이익보다 단기적 안전이 우선되고, 제도보다 자율적 판단이 앞선다. 이러한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국제 질서는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경쟁이 일시적인 국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경쟁은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나 단일 사건으로 완화되기 어렵다. 기술 가속, 기후 압력, 지정학적 재편은 서로 맞물리며 경쟁의 조건을 지속적으로 강화한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협력은 항상 불완전한 형태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경쟁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기술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특히 인공지능은 생산성 향상의 도구이자, 불평등과 불신을 증폭시키는 매개로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기술이 중립성을 잃는 순간, 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에 직면한다. 그 갈등은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 노동과 교육, 민주주의와 사회계약의 문제로 확장된다. 경쟁의 시대는 선택을 강요한다. 무엇을 보호할 것인가, 무엇을 개방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감수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 연속적으로 요구된다. 이 선택의 무게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리고 사회 전반에 더 깊이 스며들수록 커진다. 다음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과 기후, 그리고 지식의 정치화는 경쟁의 시대가 남긴 가장 구체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결과다.
1회차는 경쟁이 어떻게 세계의 기본 조건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그 경쟁이 사회와 지식, 그리고 인간의 삶에 어떤 형태로 각인되고 있는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들여다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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