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아는 기계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문명이 무너졌다. 국가도 사라지고 법도 제도도 더 이상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도시가 있던 자리에는 폐허가 남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과 음식, 신발과 배터리를 구하기 위해 서로를 죽인다. 총과 칼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지배한다. 2010년 개봉한 앨런·앨버트 휴스 형제의 영화 「일라이(The Book of Eli)」가 그리는 세계다. 그런데 이 황폐한 세계에서 한 마을의 지배자 카네기(게리 올드먼)가 필사적으로 찾는 것은 조금 뜻밖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더 많은 식량도 아니다.
책 한 권이다. 성경이다. 그리고 그 책을 가진 사람이 일라이(덴젤 워싱턴)다. 영화는 한 권의 책을 차지하려는 두 남자의 대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일라이」를 보고 있으면 그들의 싸움 뒤에서 조금 다른 질문이 보인다.
인간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그리고 인간에게는 살아남는 것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물과 총을 가진 남자가 책을 원하는 이유
카네기는 이미 상당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는 물을 지배한다. 무장한 부하들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도 통제한다. 문명이 사라진 세계에서 물과 무력은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그런데도 카네기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굴복시키는 힘을 넘어 사람들이 왜 자신을 따라야 하는지를 설명해 줄 무엇이다. 그래서 성경을 찾는다. 감독 앨런 휴스가 「일라이」의 각본을 읽고 영화화를 결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는 카네기가 성경을 사람들의 마음을 겨냥한 ‘무기’로 바라보는 장면에서 강하게 끌렸다고 회고했다. 카네기가 원하는 것은 책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말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각본가 게리 휘타의 설명은 더욱 분명하다. 카네기는 멸망 이전의 세계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와 신앙의 언어가 사람들을 움직이고 결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휘타는 일라이와 카네기를 영화의 두 가지 주제적 극점으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일라이에게 신앙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힘인 반면, 카네기는 바로 그 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한다.
여기서 「일라이」는 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와 조금 달라진다. 물은 인간을 살아 있게 할 수 있다. 음식도 필요하다. 총은 질서를 강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문명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려면 자신들이 누구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설명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사상일 수도 있다. 철학일 수도 있다. 신앙일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답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서사가 필요하다. 카네기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책을 원하는 두 사람
흥미로운 것은 일라이 역시 같은 책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대립하는 이유는 한쪽은 성경의 가치를 알고 다른 한쪽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둘 다 그 책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카네기는 그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싶어 한다. 물론 그 질서의 꼭대기에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 일라이는 그 책을 서쪽 어딘가로 가져가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수십 년을 걷는다. 한 사람에게 책은 권력이 되고, 다른 한 사람에게 책은 사명이 된다.
그래서 「일라이」를 단순히 신앙을 찬양하는 종교영화로만 읽으면 영화가 가진 흥미로운 긴장이 사라진다. 영화는 신앙과 사상이 인간을 움직이는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힘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사상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삶의 이유를 줄 수도 있다.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을 위해 희생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휘타 역시 종교 자체를 단순히 선이나 악으로 놓지 않았다. 그는 같은 신앙도 누구의 손에 놓이는가에 따라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 될 수도, 파괴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였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카네기가 탐내는 것은 종이로 묶인 낡은 책 한 권이 아니다. 인간에게 무엇을 믿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다.
책을 가진 사람과 책을 품은 사람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이 대립을 완성한다. 카네기는 마침내 일라이에게서 성경을 빼앗는다. 목표를 이루었다. 그러나 어렵게 잠긴 책을 열었을 때 그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책은 점자로 되어 있다. 카네기는 책을 소유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반대로 책을 빼앗긴 일라이는 마침내 서쪽 끝에 도착한다. 그곳 알카트라즈에는 사라진 문명의 책과 음악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일라이는 그들에게 성경을 전한다.
책은 없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이 받아 적는다. 그렇게 한 인간의 기억 속에 있던 책은 다시 문자로 돌아온다. 인쇄기가 돌아가고 성경은 다시 책이 된다. 완성된 책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 함께 인류가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로 보존된다. 각본가 휘타는 제목 《The Book of Eli》 자체에도 이런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라이가 들고 다니는 물리적인 책이 있는 동시에 일라이 자신이 품고 있는 책이 있다는 것이다.
카네기는 책을 가졌지만 읽지 못했다. 일라이는 책을 잃었지만 이미 그것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더 중요한 차이는 얼마나 많은 문장을 알고 있었느냐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그 이야기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움직이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이야기에 자신의 삶을 움직이게 했다. 무엇을 아느냐와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느냐는 같은 일이 아니다.
문명은 정보만으로 만들어지는가
게리 휘타는 「일라이」가 말하고자 한 것 가운데 하나를 문명을 다시 세우는 것은 무기와 힘이 아니라 아이디어와 말, 언어와 문화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화 후반부의 알카트라즈는 카네기의 마을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카네기는 물을 모으고 무기를 모으고 사람을 모았다. 알카트라즈의 사람들은 책을 모으고 음악을 모으고 인간의 기억을 모은다. 하나는 살아남기 위한 자원을 축적하고, 다른 하나는 살아남은 인간이 다시 문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을 보존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과 세계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타인에게 어떤 책임을 지는가. 고통에는 의미가 있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종교는 그 질문에 답해왔다. 철학도 답했고 정치적·사회적 사상도 자신만의 답을 내놓았다. 때로 그 답은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때로는 카네기가 꿈꾸었던 것처럼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긴 역사는 역설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의미 없이 살아가는 데 익숙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는 방법만 묻지 않는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묻는다.
그리고 2026년, 우리는 모든 것을 아는 기계를 상상한다
바로 여기에서 16년 전 영화 「일라이」는 뜻밖에 현재의 이야기가 된다. 영화가 인공지능을 예견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라이」에는 AI도 AGI도 등장하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다시 보는 우리의 세계다. 우리는 이제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축적한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하고 인간의 언어로 답하는 AI와 일상적으로 대화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 인간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범용적 지적 능력을 가진 AGI가 가능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미래가 언제, 어떤 형태로 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일라이」의 질문은 달라진다. 만약 성경 전체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기계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믿는 것일까. 플라톤에서 칸트, 니체에 이르는 철학의 역사를 인간보다 훨씬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사랑에 관한 소설과 시와 심리학 연구를 모두 읽고 누구보다 아름답게 사랑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일까. 죽음에 관한 모든 종교와 철학의 답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앞둔 인간이 삶의 의미를 묻는 것과 같은 일일까. 지금까지 인간은 많이 아는 능력을 인간 지성의 중요한 표지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는 능력’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인간다움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AGI 시대에 「일라이」를 다시 보며 흥미로운 것은 일라이가 성경 전체를 기억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기억의 양만 놓고 본다면 미래의 기계는 일라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저장하고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일라이의 특별함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믿었다. 서쪽으로 가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 때문에 고통을 감수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삶을 그 믿음 위에 놓았다. 정보가 의미가 되고, 의미가 선택이 되고, 선택이 한 사람의 삶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과 AGI를 가르는 마지막 경계라고 쉽게 단정할 수도 없다. 앞으로 등장할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인간처럼 말하는 것을 넘어 인간처럼 가치와 목적을 표현하는 시스템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질문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기계가 얼마나 인간과 비슷해질 것인지를 묻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아는 기계 앞에서
카네기는 마침내 책을 가졌지만 읽지 못했다. 일라이는 책을 빼앗겼지만 이미 그것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짜 차이는 정보의 소유에 있지 않았다. 카네기는 이야기를 지배하려 했고, 일라이는 자신이 믿는 이야기에 따라 살았다. 16년 전 「일라이」는 문명이 사라진 세계에 한 권의 책을 남겨놓고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2026년,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비슷한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인간이 기록한 거의 모든 것을 읽고, 기억하고, 설명하는 기계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언젠가 그것이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하게 추론하고, 어쩌면 우리보다 더 인간적으로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 인간다움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어쩌면 「일라이」가 지켜낸 것은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오래된 사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아는 것과 그 이야기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사실. 모든 것을 아는 기계 앞에서 결국 질문을 받아야 하는 쪽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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