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책임 공방과 무대 밖 생존자들이 던지는 질문
재앙의 책임을 추궁받는 석유 재벌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되돌린다. 더 싸고 풍부한 에너지,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원한 것은 누구였는가. 영화 「디거」의 유엔 연설에서 디거 록웰은 자신의 사업을 그 욕망의 결과로 설명한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려는 말이다. 그러나 책임을 피하려는 사람의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담긴 질문까지 간단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가 제공한 편리함을 누리면서 그를 비난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디거」는 이 불편함을 극중극이라는 구조 안에 놓는다.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인물은 석유 재벌 디거인 동시에, 그를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커티스 마크슨이다. 디거가 초래한 재앙을 다루는 연극과 그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의 삶이 겹친다. 그리고 영화 속 현재가 재앙 이후의 시간이라는 사실은 관객이 보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대 위에서 책임을 다투는 사람들의 과거가, 무대 밖 사람들에게는 이미 살아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따라가면 영화가 남기는 질문도 달라진다. 누가 세계를 망가뜨렸는지 밝히는 일에 더해, 그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보게 된다. 디거를 다시 무대에 세우는 행위는 뒤늦은 후회일까, 반복을 막기 위한 성찰일까. 혹은 한때 세계를 좌우했던 인물을 마음껏 비웃을 수 있는 잠깐의 위안일까.
디거의 과거를 연기하는 커티스
영화 속 연극 《Fossil Fools》는 디거의 시추 사업과 그로 인해 벌어진 재앙을 재현한다. 커티스는 그 재앙을 낳은 인물을 연기하면서 자신이 맡은 배역의 표현 방식에 의문을 품는다. 인물을 과장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이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무거운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다뤄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 설정은 배우의 직업적 갈등을 넘어, 관객이 보고 있는 풍자 자체를 돌아보게 한다.
악인의 탐욕과 오만을 크게 드러내는 것은 풍자의 익숙한 방식이다. 관객은 그를 알아보고 웃으며 비판의 편에 설 수 있다. 하지만 인물이 지나치게 기괴해질수록 현실의 평범한 욕망과는 멀어질 수도 있다. 저런 사람은 나와 다르다는 확신이 강해지면, 그를 가능하게 한 사회의 선택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디거의 괴물 같은 모습에 모든 설명을 맡기는 순간, 재앙은 특별히 나쁜 개인이 일으킨 특별한 사건으로 정리되기 쉽다.
커티스의 존재는 그 정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는 디거가 아니지만 디거의 말을 해야 하고, 자신이 의문을 품는 인물에게 몸과 목소리를 빌려줘야 한다. 이때 톰 크루즈의 배역에서 눈여겨볼 것은 외형적 변신만이 아니다.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와 그 배우가 만들어내는 인물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는 점이다. 디거의 말에 몰입하던 관객은 그 말을 어떻게 재현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까지 생각하게 된다.
영화가 얻는 가능성도, 감수하는 부담도 여기에 있다. 극중극은 해석의 범위를 넓히지만 사건에 대한 몰입을 끊을 수 있다. 커티스의 고민이 디거의 이야기와 충분히 맞물리지 않는다면 두 이야기는 서로를 깊게 하기보다 나란히 놓이는 데 그칠 것이다. 이 구조의 가치는 반전의 놀라움보다, 무대 안팎을 오가는 일이 관객의 판단을 얼마나 바꾸는가에 달려 있다.
모두가 원했다는 말은 누구의 책임을 지우는가
유엔 연설은 디거가 자신을 둘러싼 비난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그의 사업이 초래한 파괴를 비판하지만, 그 사업이 제공하던 풍요와 편리함까지 쉽게 포기하려 하지는 않는다. 디거는 바로 그 모순을 자신의 방어 논리로 사용한다. 자신이 공급한 것을 모두가 원했다면, 왜 책임은 자신에게만 묻느냐는 것이다. 이 말에는 구분해서 살펴야 할 두 주장이 섞여 있다. 그의 사업이 사회의 수요와 연결돼 있다는 주장과, 그러므로 자신의 책임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앞의 설명을 받아들인다고 뒤의 결론까지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람, 위험을 평가하는 사람, 사업을 승인하는 사람, 경고를 무시한 채 이익을 얻는 사람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다. 알 수 있었던 정보와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 행사할 수 있었던 권한도 같지 않다.
값싼 에너지를 바라는 마음에는 더 많이 누리고 싶은 욕구뿐 아니라 생활비를 감당해야 하는 필요도 있다. 대안을 결정할 권한이 없는 사람에게 소비의 책임을 모두 떠넘긴다면, 디거의 반문은 권력자의 책임 회피에 유리한 말이 된다. 더구나 영화 속 연극을 보는 생존자들이 과거의 모든 결정에 동의했거나 그 편익을 똑같이 누렸다고 볼 근거도 없다. 재앙의 피해를 견디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원인의 책임까지 함께 부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디거의 말이 불편한 것은 책임의 차이를 인정한 뒤에도 남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의 탐욕을 비판하면서, 그 탐욕이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든 삶의 기준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풍요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그 대가는 멀리 있는 사람이나 미래의 시간에 넘기는 태도다. 디거를 비판하는 일은 그런 선택을 돌아보는 일과 함께 갈 때 더 깊어진다. 책임자를 분명히 지목하는 것과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왜 과거를 공연하는가
재앙 이후의 연극이라는 설정은 웃음에도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은 관객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가상의 불행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과거다. 그 사건을 다시 공연하는 일은 원인을 잊지 않으려는 기억의 행위로 읽힌다. 오늘의 참상이 처음부터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누군가의 결정과 선택이 쌓인 결과였음을 되짚는 것이다. 이런 돌아봄에는 뒤늦었다는 감각이 따라붙는다. 이미 일어난 재앙을 막을 수는 없고, 지나간 선택을 취소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기억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남아 있는 삶에서 무엇을 지키고 바꿀지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구체적으로 기억할 때 비로소 내용을 갖는다.
웃음은 그 기억을 견디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한때 두려움과 분노의 대상이었던 사람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바라보는 동안, 관객은 그에게 압도되지 않을 잠깐의 거리를 얻는다. 상처를 함께 바라보며 웃는 행위를 무책임한 망각으로만 판단할 필요는 없다. 생존자의 삶에는 올바른 반성과 행동뿐 아니라, 계속 살아가기 위한 위안도 필요하다.
다만 웃음이 어디에서 멈추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모든 잘못을 디거에게 모아놓고 그를 조롱한 뒤 자신은 그 이야기 밖에 있다고 안심할 수도 있다. 그 경우 연극은 과거를 돌아보는 자리가 되면서도, 더 불편한 질문을 피하는 장소가 된다. 커티스가 인물의 희화화에 품는 의문은 이 경계와 맞닿는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것은 재앙이 일어난 과정인가, 아니면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있는 얼굴인가. 「디거」를 같은 욕망으로 살지 않기 위한 생존자들의 연극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이 만들어내는 성찰의 가능성이지, 관객 모두가 달라졌다는 증거는 아니다. 기억하는 일과 변화하는 일 사이에는 여전히 선택과 실천의 시간이 남아 있다.

막이 내려도 재앙은 끝나지 않는다
공연이 끝난 뒤 영화는 커티스와 관객들이 살아가는 세계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방독면을 착용하고 극장 밖의 재앙 이후 세계로 나간다. 무대 위에서 재현되던 사건의 결과가 극장 문 바깥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앞선 이야기에 무게를 더한다. 디거에게는 극중극의 결말이 있지만, 그가 남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에는 같은 방식의 마침표가 없다. 이 결말에서 재앙은 한 번의 거대한 사건을 넘어 일상의 조건이 된다. 공연을 보고, 가족을 걱정하고, 다시 생활로 돌아가는 모든 일이 이미 달라진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세계가 회복됐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은 파괴된 조건에도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생존을 곧바로 극복이나 성장의 증거로 읽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존재로 단정할 수도 없다. 영화의 구조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질문은 그들의 내면을 심판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판단을 돌아보는 데 있다. 우리는 고통을 겪으면 사람이 달라질 것이라고, 참사를 기억하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경험이 저절로 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을 어떤 이야기로 이해하고, 누구의 책임을 묻고, 무엇을 바꾸는가가 뒤따라야 한다.
그 점에서 커티스의 연극은 무력함과 의미를 함께 지닌다. 공연으로 재앙을 없앨 수는 없지만, 재앙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을 지나치게 크게 기대할 필요도, 현실을 즉시 바꾸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워버릴 필요도 없다. 이 연극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원인을 다시 바라볼 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가져갈지는 공연의 종료와 함께 해결되지 않는다.
영화 속 관객과 영화를 보는 관객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그들은 이미 겪은 재앙을 돌아보고,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하나의 미래로 상상한다. 지금의 현실에도 환경 파괴와 그 피해는 존재하지만, 영화가 그린 파국까지 정해진 결말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그들에게 뒤늦은 후회가 되는 장면이 우리에게는 아직 바꿀 수 있는 선택을 묻는 장면이 될 수 있다.
「디거」를 보고 남길 질문은 누가 나쁜 사람이었는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를 비난한 뒤에도 우리는 무엇을 계속 원할 것인가. 어떤 편리함의 대가를 누구에게 넘기고 있는가.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과거를 무대에 올리는 동안, 화면 밖의 관객에게는 그 돌아봄을 현재의 선택으로 옮길 일이 남는다. 디거를 비웃는 것으로 충분한지 묻는 순간, 영화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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