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절반을 구성하는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이 맞이한 AI 전환기
대학을 구성하는 조직을 학생과 교수 중심으로 상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대학의 운영 구조를 보면 교원이 아닌 전문행정직(Professional Services)이 전체 인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이들은 학사행정, 입시, 학생지원, 재정, 인사, 시설관리, 연구지원, 외부협력 등 대학의 모든 운영 기능을 담당하며, 대학 운영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보이지 않는 핵심’이다. HEPI 보고서는 AI 시대 대학 변화 논의에서 가장 간과된 영역이 바로 이 전문행정직 전체 구조라고 지적하면서, AI가 대학의 행정 기능을 어떤 방식으로 재편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2025년 현재 AI는 대학 행정의 반복 업무와 문서 기반 절차를 빠르게 자동화하는 단계로 진입했으며, 이는 전문행정직의 역할과 직무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학생 감소, 재정 압박, 업무량 증가라는 삼중 압력 속에서 대학은 더 적은 인력으로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구조적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AI는 단순한 효율성 향상 도구가 아니라 대학 조직의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설계하도록 강요하는 기술이다. 특히 대학 행정은 오랜 관행과 절차, 복잡한 규정 위에서 움직이는 조직이기 때문에 AI 통합 과정에서 다른 분야보다 더 큰 저항과 혼란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전문행정직의 현실 — 고립과 업무 과중, 그리고 구조적 비가시성
전문행정직은 대학 운영의 절반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교육·연구 중심의 대학 담론에서는 주변적 존재로 취급되어 왔다. 행정직의 전문성은 종종 과소평가되며, 대학 구성원 사이에서는 행정분야의 전문성이 학문적 전문성보다 낮게 인식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비가시성은 행정직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업무 혁신을 시도할 때 조직적 지원 부족으로 이어지고, 변화에 대한 책임만 과도하게 부여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Bagshaw는 이러한 비가시성이 AI 통합 과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지적한다. 행정직은 대학 운영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들의 업무와 어려움이 대학 전략 논의의 중심에 오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교수 중심 대학문화에서 행정 조직은 종종 보조적 기능으로 여겨져, 기술적 혁신이 필요함에도 제도적 관심이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행정직은 업무 과중에 시달리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힐 시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다.
AI는 이 구조를 정면으로 흔들고 있다. 기존 행정 절차가 AI 기반 자동화로 재구성되면서 전문행정직의 직무는 단순 절차 수행자에서 복잡한 기술·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지원자로 이동하게 되고, 역할의 전문성은 과거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행정직의 비가시성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행정 조직을 대학의 핵심 전략 자원으로 재인식하는 변화가 필요해진다.
AI가 먼저 도달한 영역 — 반복적·규정 기반 행정업무의 자동화
AI는 대학 행정의 거의 모든 업무 영역에 이미 침투하고 있으며, 반복성과 규정성이 높은 업무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학생 정보 입력, 문서 정리, 일정 조율, 단순 질의 응답, 규정 검색, 장학금 심사 초기 단계, 결재 문서 작성 보조 등 대학에서 매일 반복되는 다수의 업무가 AI 자동화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글래스고 대학교는 행정 자동화를 위해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와 AI를 결합한 시스템을 도입하여 입시문서 처리와 학생기록 관리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했다. 이러한 자동화는 단순히 업무 시간을 절약하는 수준을 넘어서, 오류율을 낮추고 행정 직원이 보다 복잡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적 여유를 만들어냈다. AI가 규정 문서를 탐색해 적합한 절차를 제시하는 기능은 행정의 정확성을 높이며, 특히 새로운 규정이 자주 바뀌는 환경에서 효과가 크다. 반복 업무의 자동화는 전문행정직이 수행하던 직무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처리할 수 있게 했고, 이를 통해 행정직은 상담, 복잡한 문제 해결, 학생 상황의 심층 판단 등 인간적 판단이 필요한 업무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즉, AI는 행정직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과 판단이 필요한 영역으로 그들의 역할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조직을 재편하고 있다.
학생지원의 변화 — 24시간 챗봇 시스템과 ‘즉시 응답 문화’의 확산
AI는 학생지원 영역에서도 강력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Staffordshire University는 학생들이 원하는 정보를 즉시 얻을 수 있도록 AI 기반 지원 챗봇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학사 일정, 등록 절차, 장학금 문의, 시설 이용, IT 문제 해결 등 다양한 현안을 실시간으로 안내하며, 학생의 질문 패턴을 분석해 대학이 어떤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하는지 데이터를 제공한다. 학생들은 대학 행정의 복잡함과 느린 응답 속도에 불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AI 챗봇은 학생이 언제든지 답을 얻을 수 있는 접근성을 제공하여 기존 행정 시스템이 제공하지 못했던 ‘지속적 소통 환경’을 만들어낸다. Parwana는 이러한 변화를 학생지원 업무의 혁신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학생 경험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인프라 변화로 해석한다. 특히 해외학생이나 비전형적 학습자(성인학습자, 재직자, 파트타임 학생)에게는 시간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대학에 질문할 수 있는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학생지원센터 운영시간 외에는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었지만, AI는 운영의 한계를 넘어서 학생과 대학을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예측 분석의 등장 — 중도탈락을 ‘사후 관리’에서 ‘사전 대응’으로 전환하다
전문행정직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학생의 학업 지속 여부를 지원하는 것이다. Nottingham Trent University의 학생 참여도 대시보드(Success for All dashboard)는 학생의 출석률, LMS 접속 패턴, 과제 제출 양상, 상담 기록 등을 AI가 종합 분석하여 중도탈락 가능성이 높은 학생을 사전에 식별한다. 이 시스템은 단순한 통계 기반 예측을 넘어서, 시계열 분석과 행동 패턴 분석을 결합해 학생의 위험 신호를 정확하게 잡아낸다. 이러한 예측 분석은 행정직과 교수 모두에게 중요한 변화를 불러온다. 과거에는 학생이 학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교수나 직원이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지원 시점이 너무 늦어지는 문제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AI 기반 예측 분석이 도입되면 학생의 변화는 즉시 감지되며, 대학은 문제를 사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학생지원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구조적 변화이다.
전문행정직의 역할 변화 — 단순 절차 담당자에서 ‘데이터 기반 전문가’로 이동하다
AI는 전문행정직의 업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직무 정체성을 강화하고 있다. 자동화된 시스템은 반복적인 작업을 처리하고 규정 기반 절차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복잡한 문제 해결, 예외적 상황 판단, 학생 개별 지원과 같은 업무는 여전히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AI가 기본 업무를 처리하는 환경에서는 전문행정직이 수행하는 판단과 관계 중심의 업무가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행정직은 데이터를 해석하고, 위험 신호를 확인하며, AI가 제시하는 패턴의 의미를 판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즉, AI는 그들의 업무 범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업무의 수준과 전문성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Bagshaw는 전문행정직이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량은 기술 사용 능력이 아니라 기술을 해석하고 의사결정 과정에 통합하는 사고능력이라고 설명한다. AI가 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 학생 상황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AI 도입이 활발해질수록 행정 자동화가 고용 감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타난다. 대학 행정직의 상당 부분이 절차 기반 업무이기 때문에, AI가 이 영역을 상당히 자동화할 경우 특정 직무군이 축소되거나 재배치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우려는 특히 재정 압박을 겪는 대학에서 강하게 제기된다. 그러나 보고서는 기술적 자동화가 단기적 인력 감축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업무 구조와 역할의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AI는 반복 업무를 대체할 수 있지만, 대학 행정의 상당수는 학생 관점에서의 문제 해결, 복잡한 상황 판단, 조직 간 조율 등 인간 중심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AI는 오히려 이러한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구조를 재설계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다만 인력 재편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존재한다. 일부 단순 업무 중심 부서는 업무량 조정이나 재배치가 불가피할 수 있으며, 대학은 이를 조직적 혼란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장기적 인력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AI 행정 혁신의 핵심 — 비용 절감이 아니라 ‘서비스 품질의 재정의’
AI 도입이 행정 혁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비용 절감이 아니라 서비스 품질의 향상이다. AI는 단순히 빠른 업무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학생과 대학 구성원이 경험하는 서비스의 질적 구조를 바꾸는 기술이다. 학생의 질문이 즉시 해결되는 환경, 중도탈락 위험을 조기에 감지하는 시스템, 교수와 연구자가 행정 부담에서 벗어나는 구조는 모두 서비스 품질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변화이다. Parwana는 AI가 대학의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한다. 대학이 학생 경험 중심으로 구조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AI 기반 행정 혁신은 핵심 전략이 될 수 있으며, 이는 단순 자동화가 아니라 대학의 운영 철학을 바꾸는 혁신이다.

AI가 행정 구조를 전환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대학은 다음과 같은 구조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들은 단순 도입 절차가 아니라 대학 전체 운영 철학과 연결된 장기적 문제들이며, 기술적·조직적 이해가 결합된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대학은 행정직의 기술 역량과 데이터 이해도를 강화할 체계적 교육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AI 행정 시스템은 단순 도구 조작이 아니라 규정 해석, 데이터 판단, 예외적 상황 조정과 같은 고난도 작업을 포함하기 때문에 구성원의 역량 개발이 필수적이다. 둘째, 대학은 데이터의 품질과 일관성을 확보해야 AI 도구의 예측과 판단이 신뢰할 수 있다. 대학 행정 데이터는 학과별로 분절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이를 통합하고 정제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 과정은 대학의 기술 인프라 전반을 재구성해야 할 수도 있다. 셋째, 대학은 AI 행정 도입이 가져올 직무 재편과 역할 재정의를 고려한 인력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니라 AI 시대 행정직의 전문성과 인간 중심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대학은 AI 도입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학생 정보와 개인정보가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환경에서는 데이터 보호와 투명성이 중요하며, AI 판단의 편향 문제도 관리해야 한다. 대학이 이러한 과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해야만 AI가 제공하는 잠재력을 조직 전체의 역량 향상으로 제대로 연결할 수 있다.
AI 시대 대학 변화의 핵심은 교육이나 연구가 아니라 행정이라는 조직의 절반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AI는 반복적·규정 기반 행정 절차를 자동화하며 전문행정직이 보다 고도화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고 있다. 동시에 예측 분석과 24시간 지원 시스템은 학생 경험의 질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 있고, 대학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행정 조직의 위치와 역할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 AI는 대학 행정의 약점을 드러내고 이를 재구성하도록 요구하는 기술이며, 행정직은 AI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결국 AI가 바꾸는 것은 대학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속도나 편리함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조직의 운영 철학과 인간 중심 행정의 형태이다. AI 시대의 대학 행정 혁신은 자동화가 아니라 재구성이며, 이는 대학의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변화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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