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이미 외교가 됐다… CES와 다보스가 드러낸 기술패권의 새 질서

미국과 중국의 인공지능 경쟁은 이제 모델 성능을 겨루는 기술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상용화 속도, 제조 공급망, 반도체, 전력, 핵심광물, 안보 규제와 동맹 재편까지 얽히며 AI는 산업의 중심을 넘어 국제질서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가 3월 11일 발간한 「CES·WEF 2026을 통해 본 AI 기술의 발전과 경제안보외교적 시사점」은 올해 CES와 WEF의 흐름을 바탕으로 AI를 둘러싼 세계 질서의 이동을 세 갈래로 짚어낸다. 미중 기술 선도와 상용화·도입 경쟁, 소버린 AI와 글로벌 협업, 그리고 AI의 국가안보 융합과 규제 경쟁이 그것이다. 문서가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분명하다. AI는 더 이상 연구실 안의 신기술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 공급망과 외교의 배치를 다시 짜는 세계정치의 문제라는 점이다.

CES와 다보스가 같은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는 원래 소비자 기술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무대이고, 스위스 다보스의 WEF는 세계 경제와 정치의 흐름을 가늠하는 장이다. 성격이 다른 두 공간이 올해 동시에 AI를 중심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가 가볍지 않다. 기술 전시회에서는 AI가 제품과 산업을 어떻게 바꾸는지가 전면에 나왔고, 다보스에서는 AI가 생산성과 고용, 국가전략과 안보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지가 주요 화두가 됐다. 결국 두 무대가 가리킨 방향은 같았다. AI는 더 이상 기술기업만의 주제가 아니며, 국가 전체의 경쟁력과 외교 전략을 다시 쓰게 만드는 거대한 구조 변화라는 것이다. 이 변화는 AI를 보는 국가들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미국과 중국은 2025년에 각각 AI 실행계획을 발표하며 글로벌 주도권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미국과 중국 외 국가들도 소버린 AI를 내세우며 데이터와 연산, 인프라와 기업 지분까지 자국의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이 경쟁은 흔히 상상하듯 결승선이 정해진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한쪽이 먼저 인공일반지능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승자독식의 게임이 아니라, 혁신·국가안보·상용화·도입·시장 선점·안전 거버넌스가 동시에 움직이는 복합 경기라는 해석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이 때문에 “누가 가장 앞선 모델을 먼저 만드느냐”는 질문만으로는 현재의 AI 판세를 설명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미국은 슈퍼컴퓨팅과 첨단 모델 개발 역량에서 여전히 가장 강한 나라로 평가된다.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가 80~90%를 점유하고 있고, 클라우드 역시 AWS,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가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파운데이션 모델 분야에서도 오픈AI, 구글, 앤트로픽, xAI, 메타 등 미국 기업들은 속도와 완성도 면에서 선도적 위치를 유지해 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미국의 우위는 꽤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올해 논의에서 더 주목되는 대목은 미국의 우위가 곧 미국의 압도적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기술 선도와 산업 장악은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 가장 강한 두뇌를 만들고 있을 때, 중국은 그 두뇌가 실제 산업과 일상에 얼마나 빨리 들어가느냐를 놓고 전혀 다른 방식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중국의 AI+ 전략은 제조, 의료, 금융 등 광범위한 부문에 AI를 통합하고, 2027년까지 AI 에이전트와 지능형 단말기 보급률 70%를 넘기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다. 채팅 도구로서의 AI를 넘어 생산과 서비스, 일상생활 전반에서 실질적 가치를 만드는 쪽으로 초점을 옮겨 놓은 것이다. 거대한 내수시장, 신기술에 대한 높은 수용성, 국가 차원의 통합적 정책 접근은 이런 확산 전략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미국이 마주한 불편한 현실이 드러난다. 첨단 모델을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가장 빠르게 산업 전반으로 스며드는 나라는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 안에서도 AGI라는 상징적 목표에 과도하게 집착하다가 정작 도입·확산·적용이라는 ‘현실의 AI 경쟁’에서 중국에 밀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AI의 진짜 승부는 벤치마크 점수표보다 더 넓은 곳에서 벌어진다. 제품이 되고, 시스템이 되고, 일하는 방식과 도시의 인프라가 되는 쪽이 더 무서운 경쟁력을 갖는다. 미국은 선도하고 중국은 확산한다는 구도가 그래서 더 자주 언급된다. 특히 CES 현장에서 이 격차는 더 선명하게 읽힌다. 피지컬 AI가 주요 전시 테마로 부상한 가운데, 제조와 하드웨어가 결합된 분야에서는 중국 기업들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중국의 애지봇, 유니트리 로보틱스 등을 포함한 기업들은 2025년 기준 전 세계 휴머노이드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고, ‘제조관’이라 불리는 전시장에서는 사실상 중국 기업이 장악한 공급망 현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더 결정적인 것은 가격이었다. 비슷한 기술을 내놓아도 중국 기업들의 예상 단가는 미국이나 유럽 기업보다 훨씬 낮았다. 첨단 기술의 미래를 보여주는 프로토타입도 중요하지만, 당장 상용화 가능한 제품 시장에서는 결국 가격과 공급 능력이 승부를 가른다. 그 점에서 중국은 이미 강한 위치에 올라서 있다.

이 장면은 오늘의 AI 경쟁이 단지 알고리즘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프트웨어가 세계를 바꾼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소프트웨어가 몸을 입고 움직이는 순간 제조와 배터리, 부품과 물류, 가격과 납기라는 훨씬 현실적인 문제가 게임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피지컬 AI의 시대가 깊어질수록 중국은 더 강해질 수 있고, 미국은 더 복잡한 과제를 안게 된다. 기술의 최상단만 볼 때는 미국이 압도적으로 앞서 보이지만, 공급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버린 AI는 고립이 아니라 전략적 자율성의 문제다

이런 환경에서 각국이 앞다퉈 내세우는 구호가 바로 소버린 AI다. 자국 데이터와 연산 결과, 핵심 모델과 인프라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구호만큼 단순하지 않다. 무엇을 어느 수준까지 국산화해야 주권을 확보했다고 볼 것인지에 대한 일관된 정의는 아직 없다. 더 근본적으로는, 어느 나라도 전체 AI 기술 스택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구축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WEF는 2030년까지 AI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연간 투자가 1조5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AI 주권을 확보하는 경로가 나라별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유형화했다. 미국과 중국처럼 모든 가치사슬 전반에서 투자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싱가포르와 UAE처럼 생태계 구축자로 움직이는 나라, 독일과 프랑스처럼 선택적 플레이어가 되는 나라, 인도처럼 채택을 가속화하는 나라, 르완다처럼 신흥 협력자로 남는 나라가 함께 존재한다. 이 분류가 시사하는 바는 뚜렷하다. 소버린 AI는 모든 것을 혼자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호의존 속에서도 자기 전략을 잃지 않는 능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조차 전 세계 AI 가치사슬 투자에서 약 65%를 차지하며 절대적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실제 공급망과 민간 협력에서는 완전한 분리보다 복잡한 결합 상태에 머물러 있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산업과 자원 의존 앞에서 다시 협력의 여지를 남긴다. 소버린 AI는 따라서 고립의 구호가 아니라, 어디까지 자국 역량을 확보하고 어디서부터 국제협력을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냉정한 선택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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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정부 간 관계보다 민간 협력에서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CES 기조연설 무대에 오른 AMD, 지멘스, 레노버는 모두 서로 다른 기술 스택 위에서 파트너 기업들과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AMD는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 블루오리진, 제약·연구기업들과의 연결을 보여줬고, 지멘스는 엔비디아와 마이크로소프트, 펩시,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즈와의 협력을 소개했다. 레노버는 젠슨 황과 함께 엔비디아 반도체를 활용한 AI 클라우드 기가팩토리 구상을 내놨다. 국가 단위에서는 디커플링과 기술주권이 강조되지만, 기업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풀스택 협력이 더 현실적인 질서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공급망 대부분이 중국 제조기업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값싸고 접근성 높은 알리바바의 큐원(Qwen)을 많이 활용한다는 점도 이 모순적 현실을 보여준다.

결국 AI 주권을 말하는 모든 국가는 하나의 질문 앞에 선다. 완전한 독자 생태계는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무엇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협상력을 가질 수 있는가. 오늘의 AI 질서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 자립의 순수성보다도, 공급망과 시장, 표준과 파트너십 속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능력이다. 자기 손에 남겨야 할 핵심은 ‘모든 것’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기준이 선명하지 않으면 소버린 AI는 슬로건으로만 남고, 현실에서는 내수용 프로젝트와 상징 정치에 갇힐 가능성이 커진다.

반도체 다음은 전력이다

AI가 단순한 소프트웨어 경쟁이 아니게 되면서, 가장 먼저 부상한 전략 자산은 반도체였다. 하지만 2026년의 논의는 이미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이제 핵심 병목으로 지목되는 것은 에너지와 핵심광물이다. 다중 AI 에이전트가 동시에 작동하는 미래를 상정하면 계산 수요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폭증할 수밖에 없고, 그 계산을 떠받칠 전력과 인프라가 없으면 모델의 진보도 산업의 확산도 멈춰 설 수밖에 없다. CES 기조연설에서 AMD의 리사 수는 미래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1요타플롭 수준의 컴퓨팅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며, 이를 뒷받침할 전력과 에너지 인프라, 핵심광물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WEF 논의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데이터센터가 기가와트급으로 커지면서 문제는 더 거칠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개도국뿐 아니라 노후 전력망을 가진 선진국들까지도 기존 체계만으로는 AI 연산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 때문에 클라우드에서 엣지 디바이스로 연산을 분산하거나, 연료전지와 분산형 전력 기술을 활용해 효율을 높이는 시도가 중요 과제로 떠오른다. 동시에 물 소비량, 지속가능성, 인프라 투자, 위험자본 접근성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결국 AI 패권은 모델의 똑똑함뿐 아니라 도시와 전력망, 광물 공급선과 투자 능력까지 한꺼번에 시험하는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서 다시 지정학이 등장한다. 석유와 핵심광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자원의 무기화 위험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를 둘러싼 완화와 강화의 엇갈린 신호는, 단순히 기술 통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중국을 배제한 안전한 공급망 재설계를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 핵심광물 의존과 공급망 현실 때문에 수출 허용 쪽으로 선회하는 장면이 공존한다. 즉 기술 패권 경쟁은 강경한 구호만으로 밀어붙일 수 없고, 자원과 시장이라는 현실의 비용 계산 앞에서 늘 다시 흔들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는 무역과 산업 정책을 넘어 본격적인 경제안보 의제가 된다.

이런 변화는 한국에 특히 중요하다. 한국은 첨단 메모리, 특히 HBM에서 강력한 지위를 갖고 있다. 이 지위는 단순한 수출 품목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각국이 자체 AI 시스템을 구축하려 할수록 HBM 수요는 더 커질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한국은 필요한 다른 기술 스택에 대한 국제협력을 끌어내는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강점은 AI 완제품 전체를 다 갖추지 못한 데서 오는 열세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는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강점을 얼마나 전략적으로 활용하느냐다. 첨단 메모리 우위를 보유하고도 외교와 산업 전략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공급망의 중요한 부품 공급국으로는 남을 수 있어도 질서 재편의 설계자로 올라서기는 어렵다.

AI는 산업을 넘어 안보의 언어가 됐다

AI가 국가안보의 문제라는 말은 이제 추상적인 비유가 아니다. 빠른 정보 처리와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 군사 시스템, 감시와 정찰, 데이터 분석과 작전 보조, 이중용도 기술의 군사화 가능성 등은 모두 이미 현실의 정책 언어가 됐다. 미국은 중국의 AI 역량 강화가 군사적·악의적 활용과 국내 정치 개입 등 안보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대중 견제를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 2022년 10월부터 강화해 온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역시 단순한 통상 조치가 아니라 컴퓨팅 역량에 대한 접근 자체를 제한해 기술력과 안보 역량을 동시에 압박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반면 중국은 군민 융합이라는 구조를 통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속도와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간에서 개발된 첨단 기술이 군사 영역으로 더 신속하게 이어질 수 있는 체계를 이미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 안에서는 오히려 실리콘밸리와 펜타곤 사이의 관점 차이와 불협화음이 국가안보 융합 경쟁의 걸림돌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기술은 민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데, 그것을 국방과 정보 우위로 연결하는 제도와 문화는 뒤처질 수 있다는 문제다. AI 패권은 기술 인재와 반도체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민간 혁신과 국가 전략이 얼마나 매끄럽게 결합되느냐 역시 중요한 변수다.

CES에 전시된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보여준 동작도 이중용도의 불편한 현실을 상징한다. 목표물 인식과 타격 능력을 암시하는 무술 동작, 넘어졌다가 스스로 일어나는 균형 능력, 대용량 배터리와 에너지 저장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장면은 소비자 기술과 군사 기술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얇아졌는지를 보여준다. 드론과 스쿠터 같은 마이크로 모빌리티 역시 일상적 편의성과 군사적 활용 가능성을 동시에 갖는다. 결국 상업화가 확대될수록 규제 역시 확대될 수밖에 없고, 이 규제는 다시 국가 간 경쟁의 대상이 된다. 기술은 시장으로 나가려 하고, 국가는 안보를 이유로 문을 다시 좁힌다. AI 시대의 규제 갈등은 이런 긴장 속에서 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데이터 보안과 기술 규제 문제도 마찬가지다. AI를 국방 전략 자산으로 이해하면 더 많은 데이터와 더 빠른 연결이 필요해지지만, 동시에 사생활 보호와 안전, 민감 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미국 안에서조차 연방 차원의 규제 프레임워크 필요성이 제기되고, 외국산 드론과 부품에 대한 접근 제한 같은 조치가 논의됐다가 다시 철회되는 모습은 기술 규제가 얼마나 경제와 외교, 회담 일정에 민감하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준다. 한 나라의 규제는 더 이상 국내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국 기업의 시장 진출을 돕거나 막는 외교 수단이 되고, 동맹과 경쟁국 사이의 힘겨루기 카드가 된다. AI 규제는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의 문법이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경쟁의 속도를 늦추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WEF에서 제기된 AGI와 자기개선 루프, 생물 테러리즘 같은 위험 시나리오는 과장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기술 기업의 리더들과 학계 인사들이 공통으로 던지는 경고는 대체로 한 방향을 가리킨다. 인간이 통제 가능한 수준의 안전 기준과 거버넌스가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간 지정학 경쟁이 격화할수록 누구도 먼저 속도를 늦추려 하지 않는다. 경쟁이 무서워서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는 셈이다. 핵무기 시대가 상호확증파괴의 공포 속에서 통제 장치를 고민했다면, AI 시대는 상업과 군사, 민간과 국가의 경계가 훨씬 흐린 상태에서 더 복잡한 억지와 거버넌스를 요구받고 있다.

한국은 무엇을 지켜야 하고 어디서 기회를 잡아야 하나

이 거대한 판에서 한국이 던져야 할 질문은 “독자 모델을 만들 수 있는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수준의 자율성을 목표로 할 것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확실한 지배력을 확보해 전체 AI 질서 속 협상력을 높일 것인지다. 현재 한국은 모든 모델 개발에서 미국산 AI 반도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풀스택 투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독자성’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모든 층을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 스택에서의 지배력과 상호운용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국산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둘러싼 논란도 결국 이 문제를 드러낸다. 목표가 불분명하면 정책은 금세 순수성 논쟁으로 빠지고, 산업은 실제 경쟁력보다 기준 해석에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한국에게 더 현실적인 목표는 AI 산업 생태계 안에서 구체적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것이다. CES 혁신상 수상 실적이 상징적으로는 반갑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디어와 가능성이 인정받는 것과 실제 상업화의 승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역대 CES 혁신상 수상작 가운데 상당수는 상용화가 지연되거나, 실제 시장 성과는 다른 기업이 가져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국 기업이 정말 필요한 것은 상징적 수상보다 투자유치와 판매, 후속 기술 개발과 해외 진출에서 실제 성과를 쌓는 일이다. 기술이 주목받는 나라와 기술로 돈을 버는 나라는 종종 다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그 차이를 냉정하게 보는 시선이다.

동시에 투입 요소에 대한 관리도 더 중요해진다. 에너지, 자원, 데이터는 AI 산업의 필수 입력값이다. 에너지 안보가 장기적으로 기술 혁신으로 일부 해소될 수 있다 해도, 중단기적으로는 지정학적 불안정성을 피하기 어렵다. 핵심광물과 자원 공급망을 둘러싼 미중 견제와 협력은 교역 환경의 불확실성을 계속 키울 가능성이 높다. 데이터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 개척을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규제 장벽을 우회하려는 압력이 강해질 것이고, 시장 방어 차원에서는 개인정보 보호와 안전을 위한 디지털 규제가 강화될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국가는 데이터 개방과 통제, 시장 확대와 규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다시 잡아야 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제미나이 생성이미지

기술을 잘 만드는 나라에 머물 것인가, 질서를 설계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2026년의 CES와 다보스가 남긴 장면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AI는 더 이상 기술기업의 성과 발표장이 아니라, 세계질서 재편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첨단 역량의 우위를 지키려 하고, 중국은 상용화와 제조 공급망, 도입 속도를 무기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 국가들은 소버린 AI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더 복잡한 상호의존 속에서 새 균형을 찾고 있으며, 반도체 다음의 병목으로 떠오른 전력과 핵심광물, 데이터는 기술정책을 곧바로 외교와 안보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있다. 소비자 기술처럼 보였던 드론과 휴머노이드, 클라우드와 모델 협력은 군사와 규제, 통상과 자원 경쟁의 언어로 빠르게 번역되고 있다. 한국 앞에 놓인 과제도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독자 모델 몇 개를 만드는 데 성공하느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느 기술 스택에서 지배적 위치를 확보할지, 어떤 공급망에서 협상력을 키울지, 어떤 표준과 시험·검증 영역에서 새로운 우위를 만들지, 그리고 이를 에너지·자원 외교와 어떻게 연결할지가 더 중요하다. 상징을 넘어 시장으로, 선언을 넘어 전략으로, 기술 개발을 넘어 경제안보외교의 설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AI 시대의 승부는 가장 똑똑한 모델을 만드는 나라만의 몫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더 빨리 산업에 깔고, 더 강한 공급망을 쥐고, 더 많은 협력 구조를 유리하게 설계하고, 더 안정적으로 전력과 자원을 확보하는 나라가 결국 오래 버틸 수 있다. 이제 한국이 선택해야 할 것은 하나다. 기술을 잘 만드는 나라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기술 질서가 바뀌는 순간마다 자기 자리를 새롭게 설계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2026년의 AI는 이미 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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