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원인과 복원의 조건: 복합위기 시대, 아동 웰빙을 지키는 사회의 역할
UNICEF Innocenti Report Card 19(2025)이 제시하는 아동 회복력의 조건
복합위기 시대, 아동은 왜 더 크게 흔들리는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세계는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일상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 불안정, 기후 변화, 디지털 사회로의 급격한 전환, 전염병과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가운데,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아동은 그 영향을 정면으로 맞고 있다. 2025년 UNICEF Innocenti 보고서는 아동 웰빙이 급격히 악화된 주요 원인을 바로 이러한 ‘복합적 위기의 중첩성’에서 찾는다.
이번 기사에서는 고소득 국가 아동의 삶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을 ‘기후, 기술, 건강, 경제’의 네 가지 틀로 나누어 살펴본다. 동시에 이러한 위협에 맞서 아동이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 시스템의 조건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기후위기: 아이들의 마음을 흔드는 ‘보이지 않는 재난’
기후위기는 이제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늘의 아이들이 그 피해를 체감하고 있다. 홍수, 폭염, 대기오염, 산불과 같은 극단적 기후현상이 전 세계 고소득 국가들에서도 일상처럼 반복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아동의 건강과 안전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소득 국가에 거주하는 아동들 중 다수가 **‘기후불안(climate anxiety)’**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특히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은 기후위기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으며, ‘세상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우울과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서적 충격이 정책 대응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많은 국가들이 여전히 아동 참여 없는 탄소 감축 정책, 느린 재생에너지 전환, 환경 교육의 부재 등으로 문제를 가중시키고 있다. 아동의 눈높이에서 기후위기를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과 교육 시스템이 요구된다.
디지털 전환: 연결과 고립 사이의 딜레마
디지털 사회는 아동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의 지형도도 함께 변화시킨다.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원격교육이 전면화되며 아동의 일상은 급속히 디지털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곧 디지털 피로(digital fatigue), 과도한 노출, 사이버 괴롭힘, 개인정보 침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위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고서는 여아일수록 디지털 콘텐츠 소비 시간이 길고, SNS 중심의 관계 형성에서 더 높은 정서적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많은 국가에서 아동의 개인정보 보호가 미흡하거나, 플랫폼 기업의 책임이 제대로 규제되지 않는 상황이다.
디지털 격차 역시 중요한 변수다. 교육용 기기나 안정적인 인터넷 접근성을 갖추지 못한 아동은 기본적인 학습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기술을 통한 교육 기회의 확대는 반드시 모든 계층과 지역 아동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하며, 아동의 디지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전염병과 보건 위기: 사라지지 않은 팬데믹의 그림자
2020년 이후 전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했다. 그 여파는 특히 아동에게 치명적이었다. 격리와 원격수업은 친구와의 상호작용을 단절시켰고, 놀이와 신체활동의 기회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많은 아동들이 사회성 저하, 언어 지연, 불안장애를 겪었다.
팬데믹은 또한 의료 접근성의 불평등 문제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예방접종, 심리상담, 정기 건강검진 등 기본적인 보건서비스조차 지역·계층 간 격차에 따라 달라졌다. 한편 일부 국가는 정신건강 서비스와 사회복지 연계 시스템의 부재로 아동이 위기상황에서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보고서는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학교 기반 정신건강 시스템, 보건-복지-교육의 통합적 연계, 위기 대응 매뉴얼의 사전 구축 등을 긴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감염병에 대한 의료적 대비를 넘어, 아동의 일상과 정서가 지켜지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경제위기: 부모의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전이될 때
글로벌 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고용 불안 등은 아동이 직접 겪는 위기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동은 이 모든 경제적 충격을 ‘부모’를 통해 고스란히 전이받는다. 부모의 스트레스, 실직, 빈곤은 아동의 정서, 건강, 교육에 장기적 영향을 미친다. 보고서는 특히 저소득층 아동의 건강 지표와 학습 성취도가 심각하게 낮아지고 있으며, 아동의 식습관과 운동 기회도 경제적 요인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부 국가는 무료급식, 영양 프로그램, 저소득층 맞춤형 학습 지원 등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보편적 아동 기본권 보장과 가정 복지 중심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영역이 아동의 교육, 여가, 복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아동을 보호하는 ‘버팀목 예산’과 ‘생활 밀착형 안전망’이 각국 예산구조에 포함되어야 한다.

복원의 조건 ①: 아동의 회복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복합위기의 시대에 아동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회복력(resilience)’은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특성이 아니다. UNICEF 보고서는 아동의 회복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개인 내부의 자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기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보고서는 아동의 회복력을 가능하게 하는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 네 가지 조건은 각각이 독립적인 요소가 아니라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구조로 작동한다.
첫째, 아동의 회복력은 **사회적 연결성(social connectedness)**에서 출발한다. 이는 아동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지지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신뢰 관계를 맺는 데서 비롯된다. 부모, 형제, 교사, 친구, 지역사회 구성원과 같은 주변 인물들과의 안정적인 관계망은 아동의 정서적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스트레스 상황이나 실패를 경험할 때, 누군가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감각은 아동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 된다. 이러한 사회적 연결망은 단지 ‘정서적 위로’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실제로 아동을 지지하고 보호할 수 있는 물리적·제도적 안전망과도 연결된다.
둘째, 아동의 회복력은 **기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access to opportunity)**에서 확장된다. 이는 교육, 보건, 문화, 여가 등 기본적인 사회적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보장될 때 가능한 조건이다. 아동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빈곤, 장애, 성별, 지역, 이주 배경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아동 간 기회 격차가 구조화되어 있다. 회복력은 단순히 내면의 강인함이 아니라, 실패 이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아동 복지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셋째, 아동은 삶에 영향을 주는 결정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회복력을 가질 수 있다. 이는 곧 아동의 참여권(right to participation) 보장과도 맞닿아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고, 그 의견이 실제 정책이나 결정에 반영된다는 경험은 아동에게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을 심어준다. 반면, 일방적인 보호의 대상이 되어 수동적인 존재로 머물게 될 경우, 아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력감을 학습하게 된다. 민주주의적 사회에서는 아동 역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는다. 그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아동은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상상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넷째, 아동의 회복력은 **안전한 환경(safe environment)**이 전제될 때 현실화된다. 이 안전은 단지 범죄나 재난으로부터의 물리적 안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심리적 안정감, 정서적 돌봄, 디지털 공간에서의 보호까지 포함하는 전방위적 개념이다. 아동이 자신의 실수나 고민을 드러냈을 때 비난이나 조롱이 아닌 이해와 수용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 온라인에서도 혐오와 위협 없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아동의 회복을 돕는 기반이다. 아동의 삶을 구성하는 학교, 가정, 지역사회, 디지털 플랫폼은 모두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규범과 시민적 책임의식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아동의 회복력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 설계’의 결과물이다. 이 네 가지 조건—사회적 연결, 기회의 평등, 참여의 보장, 안전한 환경—은 단순히 이상적인 복지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위기의 시대에 아동이 단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존재’가 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토대다. 가지 요소는 국가 정책, 학교 시스템, 가정 내 환경, 지역사회의 역할이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복원의 조건 ②: 상위권 국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UNICEF Innocenti Report Card 19에서 아동 웰빙 종합 순위 상위권에 오른 국가는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였다. 이들 국가는 단순히 경제력이 높거나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나라를 넘어, 아동을 사회적 중심에 두는 정책 설계와 실행력이 탁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아동의 회복력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시스템적 요소들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첫 번째 특징은 포괄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신건강 지원 시스템이다. 이들 국가는 아동과 청소년의 정서적 어려움을 조기에 발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학교 내에 심리상담사 및 정신건강 전문가를 상시 배치해 학생들이 일상 속에서 정기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교사들도 정서적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아이슬란드는 지역 사회 기반의 정신건강 센터와 학교 간 연계 체계를 구축하여 단순히 상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의 신속 대응과 장기적 돌봄이 가능한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기후위기에 대한 아동 중심적 접근이다. 상위권 국가들은 아동과 청소년이 생태위기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학교 교육과정 안에 기후변화와 관련된 환경 교육을 필수적으로 포함시키고 있으며, 학생들이 지역사회에서 나무심기, 생태탐방, 탄소발자국 줄이기 같은 실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이러한 활동은 단지 환경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아동이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해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자기효능감을 기르도록 돕는다.
세 번째 공통점은 디지털 권리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다. 노르웨이의 경우, 아동 대상 SNS 사용 시간이나 콘텐츠 접근에 대한 규제 기준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개인정보 보호 교육을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아동용 앱이나 게임 플랫폼의 광고 노출 및 유료결제 유도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도입해, 상업적 착취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의 긍정적 측면은 강화하면서도, 부작용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는 정책이 함께 병행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중요한 지점이다.
네 번째는 아동 참여 기반 정책 문화의 정착이다. 상위권 국가들은 아동을 단순히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주체이자 시민으로서 존중한다. 아이슬란드는 지역청소년위원회를 구성해 아동과 청소년이 지역 예산과 정책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제도화했다. 네덜란드는 국가 차원에서 청소년 참여를 보장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 학생회, 청소년 대표기구, 공청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아동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수렴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동은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배우고, 위기에 대해 주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다섯 번째는 보편적 복지를 기반으로 한 소득 격차 완화 노력이다. 아동의 회복력은 가정의 경제적 안정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네덜란드는 부모의 육아휴직을 확대하고, 보육시설의 공공성을 강화했으며, 모든 아동에게 무료로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아동수당, 학습 보조금, 문화활동 지원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아동의 기본권을 경제적 조건에 관계없이 보장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무료 심리치료, 학교 후 프로그램, 스포츠 활동 비용 지원 등을 통해 소득에 따른 기회의 격차를 실질적으로 줄이고자 한다.
이들 국가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단지 ‘복지국가’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아동을 중심으로 사회를 설계하는 감수성과 정치적 의지, 그리고 실천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는 단순히 예산을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정책을 구성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결국, 아동을 보호하고 회복시키는 것은 특정 기관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과제다. 상위권 국가들의 사례는 우리에게 단순한 ‘모범 사례’가 아니라, 어떤 사회가 진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가에 대한 거울을 제공해주고 있다.
위기의 시대, 시스템을 다시 설계해야 할 때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시대는 명백히 전환기다. 전통적인 정책 프레임이나 낡은 복지 시스템으로는 아동의 삶을 보호하기 어렵다. 아동은 더 이상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대응해야 할 구조의 척도’로 기능한다. 아동의 삶이 안전하지 않다면, 그 사회 전체가 위기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아동을 위기의 수혜자가 아닌 ‘복원의 주체’로 인정하고, 아동 중심의 시스템 재설계를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 회복력은 단지 아동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책임, 사회의 구조적 선택에 달려 있다.
다음 회차 예고: 한국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 회차에서는 이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아동의 현실을 진단하고자 한다. 아동 삶의 만족도, 정신건강, 교육경쟁 구조, 디지털 중독, 사교육 문제 등에서 한국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고소득국’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우리의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보고,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함께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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