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의 경계를 넘다’ – 비학위 자격이 만들어낸 새로운 학습 지형

데이터가 따라가지 못하는 학습 혁명의 그림자

고등교육의 질서가 다시 쓰이고 있다. 오랫동안 ‘학위’는 사회적 신뢰의 상징이자, 노동시장에서의 통과의례였다. 그러나 디지털 경제의 확산과 산업 구조의 가속화는 이 전제를 흔들고 있다. 오늘날 기업은 학사학위보다 실제 기술을 증명할 수 있는 자격과 경험을 선호하고, 학습자 역시 학위 대신 ‘즉시 활용 가능한 역량’을 증명하는 짧은 과정을 선택한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 고등교육의 주변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주류로 자리 잡았다. Pew Charitable Trusts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사이 미국 내 비학위 자격 취득은 세 배 이상 증가했다. 학위의 독점이 깨지고, ‘학습의 조각화(fragmented learning)’가 새로운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비학위 자격의 형태는 다양하다. 자격증(certification), 전문면허(licensing), 부트캠프(boot camp), 마이크로크레덴셜(micro-credential), 그리고 견습(apprenticeship)까지, 기존 대학 시스템 바깥에서 새로운 학습의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Pew의 분석에 따르면 2009년에서 2021년 사이 이들 비학위 자격의 취득률은 세 배로 늘었고, 현재 미국 성인의 약 3분의 1이 어떤 형태로든 비학위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테크 기업과 직업훈련기관, 커뮤니티 칼리지들이 이 시장의 주요 공급자로 부상했다. 이 현상은 ‘학습의 민주화’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고등교육의 공공성과 연계되지 못한 채 ‘학습의 시장화’로 흘러가는 양상을 보인다. 산업은 민첩함을 얻었지만, 교육은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돈 없이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 재정의 벽

비학위 자격의 확산 이면에는 재정 구조의 불평등이 놓여 있다. 대부분의 단기 자격 과정은 연방정부의 학자금 보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Pell Grant나 연방 학자금 대출 대상에서 제외된다. Pew의 보고서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학비를 전액 자비로 부담했다고 밝힌다. 과정의 길이가 짧다는 이유로 공공 재정지원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은 역설적이다. 더욱이 단기 자격 과정의 시간당 비용은 미국 최저임금을 크게 상회한다. 일부 학습자는 신용카드로 학비를 결제하며, 고금리 부채를 떠안는다. 이는 ‘평생학습의 문턱’을 낮추는 대신 ‘채무를 통한 재교육’이라는 새로운 양극화를 낳는다. 경제적 자원이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자격을 취득하며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학습의 기회를 잃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정부들이 중심에 섰다. 2024년 기준, 32개 주가 단기 자격 프로그램에 총 56억 달러를 투입했다. 이는 전년 대비 18억 달러 증가한 수치다. 주정부는 비학위 자격의 성장세를 지역 인력양성과 경제 전략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재정 지원이 늘어난 만큼, 성과에 대한 데이터 수집과 보고 의무도 강화됐다. 노스캐롤라이나대 샬럿캠퍼스의 고등교육학 교수 마크 다미코(Mark D’Amico)는 “주정부 자금이 투입되면 데이터와 책임성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는 단기 자격 프로그램이 공공 재원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정책의 언어’로 편입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주별 정책이 제각각이라는 점에서, 통합된 국가 데이터 체계의 부재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연방 차원의 실험이 바로 ‘워크포스 펠(Workforce Pell)’ 제도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도입된 이 제도는 단기 자격 과정에도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연방 보조금을 적용하도록 한 것이다. 다미코 교수는 “워크포스 펠은 주정부가 어떤 프로그램을 지원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구분하도록 요구하며, 그 과정에서 수집되는 데이터의 범위도 확대된다”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 워크포스 펠은 단기 자격 교육이 정책의 사각지대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데이터 기반의 통제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여전히 시험대 위에 있다. 어떤 프로그램이 ‘워크포스 펠’의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판정하는 과정은 각 주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산업 수요와 공공 책임의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다.

품질을 관리하라 – HLC의 새로운 시도

공공 재정과 데이터만으로는 교육 품질을 담보할 수 없다. 미국의 고등교육 인증기관인 고등학습위원회(Higher Learning Commission, HLC)는 최근 비학위 자격 프로그램에 대한 ‘인증(endorsement)’ 제도를 신설했다. 이는 대학이 아닌 기관도 인증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품질 관리체계로, 제공기관의 재정 건전성, 산업 수요 부합성, 학습자 보호 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HLC의 바버라 겔먼-댄리(Barbara Gellman-Danley) 회장은 “이는 자격 시장에 신뢰를 회복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자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비학위 시장 전체의 ‘신뢰 인프라’ 구축을 위한 시도다. 그러나 인증기관의 권한이 주정부 정책이나 산업 이해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경우, 공정성과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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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비학위 자격의 세계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이를 포괄적으로 추적할 공공 데이터는 여전히 미비하다. 어떤 기관이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지, 수료 후 고용이나 소득의 효과가 실제로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대부분 불완전하거나 비공개 상태다. Pew 보고서가 지적하듯, “비학위 자격의 질과 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체계적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혁명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다. 데이터가 없으면 정책의 방향도, 공공 자원의 효율성도 검증할 수 없다. 결국 시장은 ‘자격의 홍수’ 속에서 신뢰의 기준을 잃게 되고, 학습자는 ‘증명되지 않은 약속’을 구매하게 된다. 혁신이란 이름의 교육 시장화는 데이터와 평가체계가 갖춰지지 않는 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없다.

한국 고등교육에 던지는 경고 – 자격의 팽창과 신뢰의 위기

한국 역시 유사한 길목에 서 있다. 대학이 평생학습의 허브로 재편되고, 정부가 마이크로디그리와 단기직무교육을 확산시키고 있지만, 품질관리와 데이터 기반의 신뢰체계는 여전히 취약하다. 교육부와 고용노동부가 각기 다른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자격정보는 분절되어 있고, 수요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국가자격체계(NQF)는 존재하지만, 대학이 운영하는 비학위 프로그램과의 연계는 미흡하다. 한국의 고등교육이 직면한 문제는 ‘새로운 자격의 부족’이 아니라 ‘신뢰 가능한 데이터의 결핍’이다. 대학은 여전히 학위 중심의 행정체계 속에 머물러 있고, 비학위 교육은 제도 밖에서 시장 논리에 따라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사례는 경고한다. 공공 데이터와 인증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학습 혁신은 결국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공공대학의 역할을 약화시킨다고. 한국의 대학이 평생학습체계의 중심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단기 자격 프로그램에 대한 품질관리·성과데이터·재정지원 기준을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비학위 자격의 급증은 고등교육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신호다. 그러나 학습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교육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가치는 여전히 ‘신뢰’에 있다. 학습자가 얻은 자격이 실제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그 효과가 데이터로 검증될 때, 비로소 그 자격은 의미를 갖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더 나은 체계다. Pew의 보고서가 드러낸 현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고등교육이 잃어버린 공공성의 거울이다. 학위의 시대가 저물어가도, 신뢰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대학과 정부, 그리고 사회가 함께 이 격차를 메워야 한다. 그래야만 ‘평생학습’이 또 하나의 시장이 아니라, 진정한 공공의 권리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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