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라인 몇 줄로는 부족하다. 대학의 AI 대응은 선언이 아니라 전략과 거버넌스의 문제가 되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대학 안으로 들어온 초기 단계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장면이 펼쳐졌다. 교수와 학생은 우선 써보기 시작했고, 대학 본부는 상황을 지켜보며 간단한 활용 원칙이나 유의사항을 내놓았다.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과제와 평가에서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 개인정보와 연구자료는 어떤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초적 안내가 이어졌다. 이 시기의 대학은 대체로 판단을 유예한 채 탐색과 실험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장 모든 것을 금지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조건 밀어붙이기에도 위험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AI는 더 이상 낯선 기술이 아니고, 대학 안에서도 ‘시범적 사용’이라는 말로만 버틸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누군가는 강의자료 작성에 활용하고 있고, 누군가는 행정 업무 자동화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학생 지원과 학습 보조 영역에 AI를 연결하려 한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어떤 활용을 제도 안으로 들일 것인지, 어떤 활용은 멈춰 세울 것인지, 누가 판단하고 누가 책임질 것인지, 그리고 대학의 가치와 책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디까지 기술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가 본격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대학의 AI 대응은 사용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가 됐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AI 전략’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다. 많은 조직은 신기술이 등장하면 먼저 전략 문서부터 만든다. 그러나 대학에서 전략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반영하는 문서가 아니다. 대학의 전략은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 어떤 변화를 받아들이고 어떤 변화에는 제동을 걸 것인지, 그 기관이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는지를 보여주는 틀이다. 그래서 대학의 AI 전략은 기술을 위한 전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대학의 본래 사명, 다시 말해 교육과 연구, 공공성, 지식 생산과 검증, 공동체 보호라는 기준 위에서 AI를 어디에 어떻게 연결할지를 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유럽 대학들이 최근 더 신중한 제도 설계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는 새롭고 강력한 도구지만, 대학의 존재 이유까지 다시 쓰는 주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AI 전략은 대학의 유행이 아니라 대학의 사명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대학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장면 중 하나는 ‘AI 전략’이 유행처럼 소비되는 일이다. 생성형 AI가 급속히 확산한 뒤 많은 기관이 경쟁적으로 원칙을 만들고, 전담 조직을 검토하고, 파일럿 사업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빠르게 대응하는 기관일수록 앞서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질문이 필요하다. AI 전략이 정말 대학의 문제를 풀기 위해 나왔는가, 아니면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둘러 만들어진 문서인가. 대학에서 전략은 늘 이중의 기능을 가진다. 내부적으로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기준이 되고, 외부적으로는 이 대학이 무엇을 가치로 두는지 보여주는 신호가 된다. 그래서 AI를 둘러싼 전략도 대학의 이미지 관리나 기술 친화적 분위기 연출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이 교육 목표, 연구 원칙, 행정 책임, 학생 보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다. 대학이 AI를 도입하는 이유가 단지 ‘다들 하니까’가 되는 순간, 전략은 사실상 전략이 아니라 분위기에 대한 반응이 된다.
유럽의 대학들이 최근 보여주는 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초반에는 AI를 별도의 원칙 문서나 독립된 가이드라인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접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기술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활용 범위가 넓어지다 보니, 몇 가지 원칙을 적어놓는 수준으로는 실제 의사결정과 책임 구조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AI를 대학의 기존 전략과 어떻게 연결할지에 대한 재정렬이다. 다시 말해 AI를 특별한 예외 항목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학 운영의 전체 구조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길 것인지 냉정하게 다시 배치하는 단계가 온 셈이다.
여기서 대학이 붙들어야 할 원칙은 분명하다. AI는 대학의 사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돕는 수단이어야 한다. 교육의 질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평가의 설명 가능성을 훼손해서는 안 되고, 행정 효율화를 이유로 학생 데이터 통제권을 약화시켜서도 안 되며, 연구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이유로 검증과 재현성의 기준을 무디게 해서도 안 된다. 대학의 전략은 기술의 가능성에 취해서 그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문서가 아니라, 대학이라는 제도가 무엇을 위해 기술을 허용할 것인지를 정하는 문서여야 한다. 그래야만 AI 전략은 유행이 아니라 제도가 된다.
전면 도입보다 작은 실험, 왜 ‘작게 시작하는 전략’이 더 현실적인가
AI와 관련해 대학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은 기술의 잠재력을 너무 빨리 제도화하려는 데 있다. 생성형 AI가 처음 공개됐을 때 많은 이들은 교육과 연구, 행정 전반이 단기간 안에 재편될 것처럼 말했다. 누군가는 교수의 역할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행정 조직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기대는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대학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훨씬 복잡하다. 어떤 도구는 생각보다 쓸모가 작고, 어떤 기능은 시범 단계에서는 좋아 보여도 규모를 키우면 비용과 오류가 급격히 커지며, 어떤 활용은 윤리나 규제 문제에 부딪혀 애초에 확장이 어렵다.
그래서 최근 더 설득력을 얻는 접근은 ‘작게 시작하는 전략’이다. 처음부터 AI가 대학의 생산성을 얼마나 끌어올릴지 숫자로 환산하고, 장기 인력 구조까지 성급히 재설계하는 방식은 오히려 위험하다. 대학이 해야 할 일은 먼저 작은 파일럿과 제한적 실험을 통해 실제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구성원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지, 어떤 업무는 자동화가 가능하지만 어떤 업무는 오히려 사람의 개입이 더 중요해지는지, 숨은 비용은 무엇인지, 데이터와 책임 구조는 어떻게 바뀌는지를 작은 단위에서 검증해야 한다. 이 방식은 답답하게 보일 수 있지만, 대학처럼 복잡한 조직에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다.
이런 점에서 AI 전략은 거창한 청사진보다 우선순위 설정의 기술에 가깝다. 모든 것을 다 시도할 수는 없다. 예산은 한정돼 있고, 기술은 빠르게 바뀌며, 구성원의 수용성도 제각각이다. 결국 대학은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지금 하지 않을 것인가’를 함께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학생 상담 보조, 문서 요약, 반복적 행정 업무 지원, 기초적 학습 안내 같은 영역은 비교적 낮은 위험 속에서 시험해볼 수 있다. 반면 학업 평가의 핵심 판단, 입학 선발, 학생 모니터링, 민감정보를 포함한 연구 분석과 같은 영역은 훨씬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AI를 일괄적으로 ‘활용 확대’ 대상으로 보는 순간 전략은 무너진다.
작게 시작하는 방식은 단지 위험을 줄이기 위한 방어적 태도만은 아니다. 이것은 대학이 무엇에서 진짜 가치를 얻는지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기술 도입은 기술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업무 흐름, 책임 배분, 사용자 경험, 데이터 품질 문제를 드러낸다. 작은 실험은 대학이 AI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대학 내부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지를 더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학습 없이는 어떤 전면 전략도 현실에서 쉽게 공허해진다.
기술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데이터 거버넌스다
AI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모델의 성능과 기능, 인터페이스를 먼저 떠올린다. 어떤 서비스가 더 똑똑한지, 어느 모델이 더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지, 어떤 회사의 제품이 더 많이 쓰이는지가 관심의 중심에 선다. 그러나 대학 차원에서 보면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AI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어야 하고, 그 데이터가 어떤 경로로 수집되고 저장되며 활용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AI 전략의 중심에는 기술보다 데이터 거버넌스가 놓일 수밖에 없다.
대학은 오랫동안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해 왔다. 학생의 입학과 성적, 수강 이력, 학습 참여 기록, 비교과 활동, 상담 기록, 졸업 이후 진로 정보까지 각종 데이터가 존재한다. 행정 영역에는 예산과 인사, 시설, 민원, 연구비 관리 자료가 쌓여 있다. 연구 영역으로 가면 더 민감하고 복잡한 정보가 존재한다. 문제는 이런 데이터가 대개 분절돼 있고, 부서마다 방식이 다르며, 품질과 표준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에서 AI를 도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완전한 데이터 위에 자동화된 오류만 얹게 될 가능성이 크다.
AI는 결코 데이터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정리되지 않은 데이터를 더 위험하게 노출시키거나, 잘못된 분류를 더 빠르게 확산시키거나, 책임 소재를 더 흐리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대학의 AI 전략은 언제나 데이터 관리와 병행되어야 한다. 어떤 데이터는 외부 AI 도구에 입력해서는 안 되는지, 어떤 데이터는 가명처리나 비식별화가 필요한지, 어떤 데이터는 기관 내부 폐쇄망에서만 다뤄야 하는지, 어떤 데이터는 아예 AI 활용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이 기준이 없이 AI 활용만 장려하면, 대학 안에서는 빠르게 ‘그림자 활용’이 늘어난다. 누군가는 개인 계정으로 자료를 넣어보고, 누군가는 편의를 이유로 민감한 내용을 외부 서비스에 올리고, 누군가는 조직 차원의 허가 없이 업무 루틴을 바꿔버린다. 그 결과 기술은 빨리 퍼질 수 있지만, 대학의 통제력은 오히려 약해진다.
결국 데이터 거버넌스는 AI를 막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AI를 대학 안에 책임 있게 들이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대학 본부가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챗봇을 도입할지보다, 대학이 가진 데이터의 가치와 위험을 누가 이해하고 누가 판단할 것이냐다. AI 시대의 대학 전략은 여기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AI 규제는 대학을 묶는 장치인가, 대학을 보호하는 장치인가
AI 논의가 제도 단계로 넘어가면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가 규제다. 기술에 관한 논쟁에서는 규제를 흔히 혁신을 늦추는 장치로 묘사한다. 대학 현장에서도 비슷한 불만이 나올 수 있다. 새로운 도구를 써보려 해도 법적 해석이 불분명하고, 책임 부담이 크며, 허용 범위가 복잡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규제는 단순히 발목을 잡는 외부 통제가 아니다. 오히려 학생과 교직원, 연구 참여자,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대학 스스로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유럽이 AI를 다루는 방식이 시사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교육은 사람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다. 누가 어떤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어떤 지원의 대상이 되는지는 개인의 미래와 권리에 깊이 연결된다. 따라서 교육 영역에서의 AI 활용은 단순한 업무 보조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될 수 없다. 입학, 평가, 모니터링, 학습 기회 배분에 영향을 주는 AI는 훨씬 더 엄격한 기준 아래 놓이게 된다. 이것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기 위한 조치라기보다, 대학이 기술을 쓰는 방식이 학생과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다.
실제로 가장 민감한 장면은 평가와 선발이다. 대학이 AI를 활용해 학생의 학습 수준을 판단하거나, 적합한 교육 경로를 분류하거나, 성과를 분석해 자동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겉으로는 더 정교하고 일관된 판단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불투명하고 데이터 편향이 개입해 있다면, 학생은 자신의 교육 기회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됐는지 설명받기 어려워진다. 특히 감정 추적이나 행태 모니터링처럼 개인의 내면 상태를 AI가 판별하는 기술은 교육 현장과 양립하기 매우 어렵다. 대학에서 이런 기술을 활용하는 일은 단순한 신기술 도입이 아니라, 학생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에 대한 철학의 문제까지 건드린다.
그렇다고 규제가 모든 것을 명확히 정리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대학 현장은 회색지대가 많아서 더 어렵다. 어떤 학습 보조는 허용 가능한가. 어느 수준의 추천 시스템부터 고위험 활용으로 봐야 하나. 교수자가 AI를 활용해 평가문항을 설계하는 일과 AI가 평가에 직접 개입하는 일의 경계는 어디인가. 규제 문장이 있다고 해서 현장의 판단이 곧바로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에는 법무와 윤리, 교육, 정보보호, 현장 실무를 함께 엮는 다층적 판단 구조가 필요하다. 규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대학의 맥락으로 번역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학생 선발과 평가, 왜 교육 영역의 AI는 더 엄격하게 다뤄지나
대학이 AI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영역은 역시 학생과 직접 맞닿아 있는 판단의 영역이다. 행정 업무의 일부 자동화와 달리, 교육에서의 의사결정은 학생 한 사람의 진로와 권리, 경험에 깊이 개입한다. 그래서 같은 AI라도 교육 영역에서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설명 가능성과 통제가 요구된다.
예컨대 AI가 학습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학생은 어느 수준의 교육이 적합하다’고 추정하거나, ‘이 학생은 위험군이다’라고 분류하거나, ‘이 학생의 과제는 어떤 등급이어야 한다’는 판단에 개입하는 순간, 문제는 단순한 기술 활용이 아니라 교육적 권한의 위임 문제가 된다. 대학은 본래 교원과 학문 공동체의 책임 아래 교육적 판단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판단이 점점 불투명한 시스템 쪽으로 넘어가면, 학생은 자기 교육 경험을 둘러싼 결정이 누구의 책임 아래 이뤄졌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이때 손상되는 것은 단지 공정성만이 아니다. 교육적 신뢰 자체가 흔들린다.
특히 평가는 대학 교육에서 가장 민감한 장치다. 평가는 단순히 점수를 매기는 과정이 아니라, 학생이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역량을 길렀는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교육적 행위다. 여기에 AI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은 분명 있다. 문제은행 정리, 루브릭 초안 생성, 반복적 피드백 문구 지원 같은 보조 기능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판정의 핵심, 곧 무엇을 이해로 인정할 것인지, 어떤 오류를 단순 실수로 볼 것인지, 어떤 수행을 창의적 기여로 해석할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 교원의 책임 영역에 남아 있어야 한다. 대학이 AI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이 경계를 흐리게 만들면,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평가의 교육성이다.
그래서 교육 영역의 AI는 다른 어떤 영역보다 더 엄격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것은 기술 불신의 표현이 아니라 대학의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이다. 학생은 단지 데이터 포인트가 아니며, 학습은 예측 모델의 결과로 환원될 수 없다. 대학이 이 사실을 잊지 않을 때만 AI는 보조 수단으로 남을 수 있다.
이미 시작된 그림자 IT, 대학은 비공식 AI 활용을 통제할 수 있나
대학 본부가 전략을 세우고 규정 초안을 만들고 있는 사이, 현장에서는 이미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교수들은 개인적으로 챗봇을 사용해 시험문항 초안을 만들고, 행정 직원들은 보고 문안이나 회의자료 정리에 AI를 써본다. 학생들은 과제 아이디어 정리부터 문장 다듬기, 번역, 요약, 심지어 코딩 과제 해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AI를 활용하고 있다. 이런 비공식 활용은 제도보다 항상 빠르다. 문제는 이 활용이 대학의 원칙과 규정 밖에서 조용히 축적될 때다.
이른바 ‘그림자 IT’는 대학의 AI 문제에서 가장 현실적인 난점 가운데 하나다. 공식적으로는 도입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다들 쓰고 있는 상태, 허용도 금지도 아닌 애매한 상태, 개인의 편의와 기관의 책임이 분리된 상태가 계속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기술 활용은 넓어지지만 책임은 분산되고, 규정은 있으나 실효성은 떨어지며, 문제가 터졌을 때 대학은 이미 통제력을 잃은 뒤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평가와 연구, 민감한 행정자료에까지 이런 비공식 활용이 스며들면, 대학은 공식 서비스보다 더 위험한 방식으로 AI를 경험하게 된다.
이 문제를 단속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이미 현장에서는 AI가 일정 부분 업무 습관과 학습 습관에 들어와 있다. 단순히 쓰지 말라고 해도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사용은 더 깊어지면서도 대학은 어떤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제도화다. 대학은 먼저 어떤 활용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 교수와 학생, 직원이 실제로 무엇을 위해 AI를 쓰는지, 어디에서 편익을 느끼고 어디에서 불안을 느끼는지, 무엇이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규정이 현실을 따라잡을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허용과 금지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모든 비공식 활용을 금지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모든 활용을 뒤늦게 승인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대학은 위험 수준에 따라 사용 원칙을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 예를 들어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단순 문장 정리나 브레인스토밍은 일정 조건 아래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 개인정보, 평가자료, 연구 참여자 데이터, 미공개 연구 결과처럼 민감한 영역은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한다. 그림자 IT의 문제는 결국 ‘몰래 쓰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이 현실에 맞는 경계선을 아직 충분히 세우지 못했다는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기술 계획이 아니라 책임의 설계다
대학의 AI 전략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종 제품 도입 여부, 전담 센터 설치, 예산 규모, 파일럿 프로젝트 숫자에 주목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진짜 핵심은 다른 데 있다. AI를 대학 안에 들이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깔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누가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었느냐다. 다시 말해 대학에 필요한 것은 기술 계획보다 책임의 설계다.
책임의 설계란 여러 층위를 포함한다. 첫째, 어떤 부서와 어떤 위원회가 AI 활용을 심의하고 조정할 것인지가 정리돼야 한다. 둘째, 교육과 연구, 행정이라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기준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도 명확해야 한다. 셋째, 사용자 교육이 단순한 기능 안내가 아니라 위험과 한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짜여야 한다. 넷째,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설명하고 누가 수정 조치를 할 수 있는지 책임선이 그어져야 한다. 다섯째, 기술 도입이 구성원 전체의 신뢰를 얻도록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와 소통의 통로가 마련돼야 한다. 이 다섯 가지가 빠진 채 서비스만 도입하면, 대학은 겉으로는 AI 활용 기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AI 리스크를 외주화한 기관이 되기 쉽다.
특히 대학에서는 거버넌스가 더 중요하다. 대학은 본질적으로 다원적 조직이다. 본부의 판단만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지도 않고, 학과와 교원, 연구실, 행정부서가 각기 다른 리듬과 권한을 가진다. 이런 구조에서는 일방적 도입이나 일괄 금지가 모두 실패하기 쉽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한 것은 참여와 조정의 구조다. AI 활용의 원칙을 누가 정하고, 현장의 의견은 어떻게 수렴하며, 파일럿 결과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중단 결정은 누가 내릴 것인가. 대학의 AI 거버넌스는 기술보다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հենց 그 복잡함을 견디며 기준을 만드는 것이 대학다운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대학의 AI 거버넌스가 단지 위험 회피를 위한 방어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것은 대학이 정말 필요한 혁신을 골라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무조건 막는 대학은 곧 뒤처질 수 있다. 반대로 무조건 빠르게 도입하는 대학은 더 큰 실패를 겪을 수 있다. 결국 오래 가는 변화는 언제나 신중한 거버넌스에서 나온다. 기준이 명확한 곳에서만 실험도 오래 갈 수 있고, 구성원도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으며, 기술도 대학의 사명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안착할 수 있다.

실험을 책임 있는 제도로 바꾸는 역량
지금 대학은 AI를 둘러싼 첫 번째 국면을 지나고 있다. 처음에는 놀라움과 호기심, 경계와 혼란이 뒤섞인 채 각자 방식으로 써보는 시기였다면, 이제는 그 경험을 어떻게 제도로 엮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 전환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기술은 계속 바뀌고, 서비스 제공자는 더 많은 가능성을 약속하며, 현장의 요구는 서로 엇갈린다. 누군가는 더 적극적인 도입을 원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위험이 더 크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이 정말 보여줘야 할 역량은 기술 친화성이 아니다. 실험을 책임 있는 제도로 바꾸는 역량이다.
이 역량은 서두르지 않는 데서 나온다. 대학은 지금 AI를 얼마나 많이 쓰느냐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과 절차 위에서 활용하느냐로 자기 정체성을 증명해야 한다. 교육에서 무엇을 인간 판단의 영역으로 남길 것인지, 연구에서 어떤 활용을 허용하되 어떤 활용은 제동을 걸 것인지, 행정에서 어떤 자동화가 도움이 되지만 어떤 자동화는 학생 경험을 해칠 수 있는지, 이런 구체적인 질문에 답하는 힘이 대학의 수준을 가를 것이다. 단순한 선언은 오래가지 못한다. 가이드라인 몇 줄만으로는 더 이상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 대학의 AI 대응은 이제 문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됐다.
그래서 오늘 대학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AI를 전략으로 말하기 전에 대학의 사명과 가치부터 다시 확인해야 한다. 둘째, 전면 도입보다 작은 실험과 우선순위 설정을 통해 실제 가치를 검증해야 한다. 셋째, 기술 도입보다 먼저 데이터 거버넌스와 책임 구조를 세워야 한다. 넷째, 규제를 장애물로만 보지 말고 대학 공동체를 보호하는 기준으로 읽어야 한다. 다섯째, 이미 진행 중인 비공식 활용을 외면하지 말고 현실적인 제도화의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가 함께 갈 때만 대학은 AI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답게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성형 AI는 대학에 많은 유혹을 건넨다. 더 빠른 행정, 더 쉬운 문서 작업, 더 정교해 보이는 분석, 더 편리한 학습 지원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학이 정말 묻고 답해야 할 것은 편의의 약속이 아니다. 대학은 어떤 권한까지 기술에 넘길 수 있는가, 어떤 판단은 끝까지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변화가 대학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의미 있는 혁신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바로 이 물음 앞에서 대학의 AI 전략은 비로소 기술 계획이 아니라 제도 설계가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AI는 대학을 흔드는 외부 변수에서 대학이 통제 가능한 내부 질서의 일부로 옮겨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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