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경쟁의 조건 ① ]AI 경쟁의 본질은 모델이 아니라 체력이다

AI는 이미 시작됐지만, 출발선은 같지 않다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미래 기술이 아니다. 이미 사람들의 일상과 노동시장, 교육과 연구 현장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국가 간 경쟁의 핵심 변수로 자리 잡았다. 생성형 AI(Generative AI)를 중심으로 한 최근의 기술 확산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문제는 이 변화가 모든 국가에 동일한 조건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드뱅크가 2025년 발간한 『Digital Progress and Trends Report 2025: Strengthening AI Foundations』는 AI 시대를 맞이한 세계가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AI는 보편적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히 불균등한 기초 위에서 확산되고 있으며, 그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핵심 진단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소득 국가는 전 세계 AI 모델, 스타트업, 투자 자본, 연구 성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25년 기준으로 주목받는 AI 모델의 80% 이상이 고소득 국가에서 개발되었고, AI 스타트업과 벤처투자 역시 소수 국가에 집중돼 있다. 반면 중·저소득 국가는 AI 기술의 소비자이자 사용자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지만, 기술을 설계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위치에는 거의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ChatGPT와 같은 도구의 글로벌 확산이 AI의 민주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누가 만들고, 누가 사용하는가’라는 오래된 불균형이 새로운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월드뱅크가 제시한 질문, “AI를 떠받치는 기반은 무엇인가”

이 보고서가 기존의 AI 담론과 구별되는 지점은, AI 경쟁을 기술 수준이나 알고리즘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기초체력’의 문제로 재정의했다는 데 있다. 월드뱅크는 AI 확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네 가지 요소로 정리하며 이를 ‘4Cs’라고 명명한다. 이는 연결성(connectivity), 연산능력(compute), 맥락(context), 역량(competency)을 의미한다. 이 네 가지는 개별 기술이나 단일 정책으로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돼 온 국가의 디지털·교육·제도적 기반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첫 번째 요소인 연결성은 단순한 인터넷 보급률을 넘어,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고속 네트워크, 디지털 기기에 대한 접근성을 포함한다. 두 번째 요소인 연산능력은 AI 시대의 ‘새로운 전기’로 불리는 컴퓨팅 자원, 즉 반도체,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인프라에 대한 접근성을 의미한다. 세 번째 요소인 맥락은 데이터와 언어, 제도, 사회적 신뢰와 같은 지역적 조건을 반영한 AI 활용 능력을 뜻하며, 마지막 요소인 역량은 AI를 이해하고 활용하며 발전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의 수준을 가리킨다. 월드뱅크는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취약할 경우, AI는 기술적 잠재력과 무관하게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기초체력’이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AI 기술 자체는 빠르게 복제되고 이전될 수 있지만, 이를 지탱하는 인프라와 교육체계, 인재 양성 구조는 오랜 정책 선택과 투자 누적의 결과물이다. 이 때문에 AI 경쟁은 출발선이 이미 크게 벌어진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후발 국가일수록 기술 격차보다 체력 격차에 먼저 직면하게 된다. 월드뱅크는 바로 이 지점에서, AI 시대의 불평등이 단순한 기술 격차가 아니라 구조적 격차로 굳어질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작은 AI’라는 선택지, 도약인가 임시방편인가

월드뱅크 보고서가 제시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작은 AI(small AI)’다. 이는 초대형 언어모델이나 막대한 연산 자원을 요구하는 첨단 AI가 아니라, 일상적인 디바이스와 제한된 컴퓨팅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비교적 경량화된 AI 활용을 의미한다. 농업 현장의 작물 관리, 초등 교육 보조, 지역 보건 서비스 개선과 같은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 AI가 여기에 해당한다. 월드뱅크는 이러한 ‘작은 AI’가 저소득국과 중소득국에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효과를 제공할 수 있는 현실적 경로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보고서는 동시에 이 전략의 한계를 분명히 짚고 있다. 작은 AI는 단기적으로는 접근성과 비용 문제를 완화할 수 있지만, 국가 차원의 AI 역량을 근본적으로 끌어올리는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핵심 모델과 기술 표준, 데이터 생태계는 여전히 고소득국과 대형 기업이 주도하는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결국 작은 AI는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있지만, 충분한 기초체력 강화 없이 선택될 경우 기술 종속을 고착화하는 경로가 될 위험도 안고 있다. 월드뱅크가 작은 AI를 해법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지 중 하나’로 조심스럽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 격차는 왜 교육과 역량 문제로 귀결되는가

보고서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지점은, AI 격차가 결국 인재와 교육의 문제로 수렴된다는 사실이다. AI 활용은 단순히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에서 끝나지 않는다. AI를 조직과 산업에 적용하고, 기존 업무와 결합하며,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디지털 이해력과 분석 능력이 전제돼야 한다. 월드뱅크는 이를 ‘AI 역량의 층위화’로 설명하며, 기초적 AI 문해력부터 중간 수준의 적용 역량, 고급 수준의 연구·개발 역량이 모두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 역량의 분포가 국가 간에 극단적으로 불균등하다는 점이다. 저소득국의 경우 기본적인 디지털 기술을 보유한 인구 비율조차 매우 낮으며, 중간·고급 수준의 AI 역량을 갖춘 인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AI 도구가 도입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개선하며 확장할 수 있는 인적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결국 AI는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기술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수단으로 머무르게 된다. 월드뱅크는 이 점에서 AI 격차를 단순한 기술 이전이나 장비 지원으로 해결하려는 접근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분석은 자연스럽게 교육 체계, 특히 고등교육과 직업 교육 시스템으로 논의를 끌어온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몇 개의 첨단 연구소나 스타트업의 성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인구가 디지털 환경에서 학습하고, AI를 이해하며, 변화하는 기술을 지속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가가 국가의 장기적 역량을 좌우한다. 월드뱅크가 AI 정책의 핵심으로 ‘Competency’를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AI 경쟁이 사람을 둘러싼 제도와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AI 기초체력의 병목으로 떠오른 대학

월드뱅크 보고서에서 ‘역량(Competency)’은 단순한 기술 숙련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AI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뿐 아니라, 기술 변화를 따라잡고 재학습할 수 있는 학습 능력, 그리고 새로운 문제에 AI를 적용해보는 조직적 경험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정의를 기준으로 볼 때, 대학은 AI 기초체력의 핵심 거점이 될 수밖에 없다. 고등교육은 단기적인 기술 교육을 넘어, 인재가 장기간에 걸쳐 사고 방식과 전문성을 형성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는 많은 국가에서 대학이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중·저소득국의 대학에서는 디지털 및 AI 관련 교육과정이 산업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례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수 대학이 5년 이상 커리큘럼을 개편하지 않았으며, AI·데이터 분석·컴퓨팅 관련 실습 인프라도 제한적이다. 이는 단순한 예산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고등교육 체계 전반이 기술 변화에 대응하도록 설계돼 있지 않다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대학은 AI 시대의 인재를 길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 시장에서 요구되는 역량과 점점 괴리되는 제도적 공간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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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보고서가 던지는 가장 불편한 메시지 중 하나는, AI 혁신의 중심이 이미 대학을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첨단 AI 연구와 모델 개발은 점점 더 대규모 컴퓨트 자원과 방대한 데이터 접근성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주체는 주로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소수의 연구 집약적 기관들이다. 많은 대학은 재정과 인프라의 제약으로 인해 이 경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AI 연구의 주도권은 학문 공동체에서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연구 환경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대학이 AI 연구와 교육의 중심에서 밀려날수록, 고급 AI 역량을 체계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통로 역시 좁아진다. 이는 다시 인재 부족과 기술 의존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월드뱅크는 이 지점에서 AI를 둘러싼 문제를 ‘기술 도입의 속도’가 아니라 ‘제도와 조직이 변화를 흡수하는 능력’의 문제로 재정의한다. 대학이 변화하지 못할 경우, AI 시대의 경쟁은 자연스럽게 대학 바깥에서 결정되며, 고등교육은 그 결과를 뒤늦게 따라가는 역할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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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초체력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월드뱅크 보고서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AI 격차는 기술 보급이나 단기 프로젝트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연결성, 연산능력, 맥락, 역량으로 구성된 AI 기초체력은 오랜 기간 누적된 정책 선택과 투자, 교육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이 때문에 AI 경쟁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과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지금 무엇을 도입할 것인가보다, 어떤 체계를 유지하고 강화해 왔는지가 국가의 위치를 결정한다. 보고서가 AI를 ‘새로운 일반 목적 기술’로 규정하면서도 기존의 기술 혁신과 구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역량과 교육의 영역은 가장 늦게 효과가 나타나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인재를 양성하고, 교육 체계를 전환하며, 대학과 연구기관이 기술 변화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일은 수년, 때로는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AI 시대에 뒤처진 국가는 단순히 기술을 늦게 도입한 것이 아니라, 기초체력을 축적할 기회를 오랫동안 놓쳐온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월드뱅크가 이 보고서를 통해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의 격차’다. AI 경쟁은 이제 시작 단계가 아니라, 이미 축적의 차이가 드러나는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자연스럽게 대학과 고등교육 체계로 수렴된다. 대학은 AI 기초체력 중 ‘역량’을 가장 체계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공간이며, 동시에 변화에 가장 느리게 반응해온 제도이기도 하다. AI가 대학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현실은, 더 이상 고등교육이 기술 변화의 외곽에 머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대학이 스스로를 AI 시대의 중심으로 재정의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AI 전략 역시 공허한 구호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1회차에서 살펴본 월드뱅크의 진단은 단순한 국제 비교나 기술 전망이 아니다. 그것은 AI 시대에 국가와 대학이 어떤 선택을 해왔고, 또 어떤 선택을 미루어왔는지를 되묻는 구조적 질문이다. AI 경쟁의 본질이 모델이나 알고리즘이 아니라 기초체력이라면, 그 체력을 어디에서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답 역시 명확해진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대학에 던진다. AI 시대, 대학은 여전히 중심인가, 아니면 이미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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