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학, ‘성장의 시대’ 끝났다…글로벌·지역·로컬 대학으로 분화

HEPI, 2024년 고등교육 미래 시나리오 2년 만에 재검토

재정위기에 AI·학생 변화·공공 신뢰 하락 겹쳐…“기존 체제 유지 아닌 대학 운영모델 재설계 필요”

영국 고등교육이 단순한 재정위기를 넘어 대학의 형태와 기능 자체가 달라지는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 지원 확대나 등록금 인상만으로 기존 대학 체제를 복원하기는 어려우며, 앞으로 대학들은 글로벌 연구중심대학과 지역 거점대학, 로컬 교육대학, 전문특화대학 등 서로 다른 유형으로 분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영국 고등교육정책연구소 HEPI(Higher Education Policy Institute)는 7월 발간한 보고서 《새로운 선택: 잉글랜드 고등교육의 미래 다시 보기(New Choices: Revisiting Futures for Higher Education in England)》에서 2024년 제시했던 영국 고등교육의 네 가지 미래 시나리오를 2026년 상황에 맞춰 재검토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크리스 허즈번즈 전 셰필드할람대학교 총장은 영국 대학의 재정 악화가 2년 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으며, 생성형 AI의 확산과 학생 생활 방식의 변화, 대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 약화가 기존 고등교육 모델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흔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HEPI는 2024년 보고서에서 영국 고등교육의 미래를 네 가지 시나리오로 구분했다. 재정 압박 속에서 기존 체제가 점진적으로 축소되는 ‘현재의 연장’, 교육과 연구의 실제 비용을 충분히 지원해 2010년대 초반의 성장 모델을 복원하는 시나리오, 지역 단위의 고등교육·직업교육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시나리오, 대학의 역할을 연구·교육·전문직업교육 등으로 분화하는 시나리오다. 2년 뒤의 평가는 분명하다. 충분한 재정 지원을 통해 기존 체제를 복원하는 두 번째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더 낮아졌다. 반면 재정 악화와 학과 축소가 이어지는 첫 번째 시나리오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보고서가 인용한 영국 학생청(OfS) 전망에 따르면 2025~2026학년도 잉글랜드 고등교육기관의 45%가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45개 기관은 보유 유동성이 30일분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됐다. 100개가 넘는 대학이 인력 감축을 포함한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4~2025년 대학들의 퇴직·해고 비용은 3억300만 파운드로 전년보다 71% 증가했다. 잉글랜드 학부 등록금 상한이 9,790파운드로 인상됐지만 대학 재정에 미친 효과도 제한적이었다. 등록금 인상으로 연간 약 3억9,000만 파운드의 수입이 늘어났지만, 고용주 부담 국민보험료 증가액이 약 3억7,200만 파운드에 달해 실질적인 순증가분은 1,800만 파운드에 그쳤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이를 구조적 적자를 해소하기에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으로 평가했다. 대학들이 등록금과 국제학생 수입의 증가를 전제로 성장전략을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수입 확대만으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와 국제학생 불확실성, 중하위권 대학 압박

영국 대학이 직면한 문제는 당장의 재정 적자에 그치지 않는다. HEPI는 영국의 18세 인구가 2030년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2030년부터 2040년 사이 약 20% 줄어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대학진학률이 크게 상승하지 않으면 전체 고등교육 수요도 함께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학생 수요의 양극화도 나타나고 있다. 선호도가 높은 대학들이 이전보다 더 넓은 범위의 학생을 모집하면서, 과거 중위권이나 하위권 대학으로 진학했을 학생까지 흡수하고 있다. 그 결과 중간 수준 대학들은 상위권 대학과 지역·직업교육기관 사이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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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국제학생 모집 역시 안정적인 재정 보완책으로 보기 어려워졌다. 영국 정부의 비자정책 변화와 동반가족 비자 제한, 졸업 후 체류기간 축소, 국제학생 부담금 도입 등이 대학의 국제학생 모집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국제학생 수입으로 국내 학생 교육과 연구의 적자를 보전해온 대학일수록 정책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보고서는 재정압박과 인구감소에 가장 취약한 대학으로 지역 학생과 통학생 비중이 높고 입학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학을 지목했다. 대학 전체의 위기라기보다 대학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위험이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AI, 평가 부정행위 넘어 대학의 핵심 기능 흔든다

생성형 AI는 2024년 보고서가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가장 큰 변화로 제시됐다.

2026년 HEPI와 Kortext의 학생 생성형 AI 조사에서 학생의 95%가 어떤 형태로든 AI를 사용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학으로부터 AI 활용을 권장받았다고 응답한 학생은 36%에 그쳤다. 학생의 실제 활용과 대학의 공식 교육체계 사이에 큰 격차가 존재하는 셈이다.

대학의 초기 대응은 과제 표절과 평가 신뢰성 문제에 집중됐다. 하지만 보고서는 AI가 교육과정, 수업, 평가, 학생지원, 취업역량, 연구지원, 행정운영까지 대학의 거의 모든 기능을 바꾸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기존 대학들은 오래된 정보시스템과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어 AI 기반 운영모델로 빠르게 전환하기 어렵다. 반면 새롭게 설립된 사립·영리 교육기관은 처음부터 디지털 기반 시스템을 구축해 학생 모집과 교육운영을 유연하게 설계할 수 있다. 보고서는 충분한 디지털 기반과 투자 여력이 없는 대학이 AI를 단순한 교수학습 도구나 평가 규정의 문제로만 다룰 경우, 기존 대학과 신생 교육기관 간 경쟁력 격차가 커질 수 있다고 봤다.

‘전일제 기숙형 학생’을 전제로 한 대학생활도 흔들려

학생의 생활 방식도 기존 대학 운영모델과 멀어지고 있다.

HEPI가 인용한 2025년 학생 학업경험조사에서는 학생의 68%가 학기 중 시간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비 부담으로 거주지에서 대학을 통학하는 학생도 늘어나고 있으며, 수업과 일, 이동, 정신건강 문제를 함께 관리해야 하는 학생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 시간표와 학생상담, 학생회 활동, 장학·생활지원 제도는 여전히 캠퍼스 인근에 거주하며 학업에 전념하는 전일제 학생을 기준으로 설계돼 있다. 보고서는 대학이 근로시간이 길고 통학거리가 멀며 캠퍼스 이용이 제한적인 학생을 전제로 교육과 학생지원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온라인과 대면수업의 조합, 유연한 시간표, 접근성이 높은 상담체계, 모듈형 교육과정 등이 일부 학생을 위한 보완책이 아니라 미래 대학의 기본 운영조건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학생 정신건강 문제도 대학 운영모델 전환과 연결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대학생의 37%가 중간 이상 수준의 우울 또는 불안 증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온라인 교육이 불안이 있는 학생에게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지만, 통학생의 고립과 AI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인간관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됐다.

대학에 대한 공공 신뢰도 흔들려

영국 사회에서 대학의 가치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보고서가 인용한 2026년 영국 사회태도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4%가 대학 교육이 투입되는 시간과 비용만큼 가치가 없다고 답했다. 2005년 14%였던 것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다른 조사에서는 영국인의 47%가 질이 낮은 학위과정이 지나치게 많다고 답했고, 71%는 직업교육을 확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대학이 노동계층과 지역사회로부터 멀어졌고, 등록금과 학자금대출 부담에 비해 취업 성과가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HEPI는 이를 대학의 ‘사회적 허가’ 또는 공공적 정당성의 문제로 봤다. 대학이 교육과 연구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지지를 유지하기 어렵고, 지역경제와 공공서비스, 문화, 고용, 혁신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들이 재정위기에 대응해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에 집중하면서 지역사회와의 협력은 오히려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는 대학이 모든 지역·국가·글로벌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려 하기보다, 실제로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지역적 역할을 명확히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래 대학, 네 가지 유형으로 갈라질 가능성

HEPI는 향후 영국 고등교육이 네 가지 유형으로 분화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소수의 글로벌 연구중심대학이다. 이들 대학은 세계적 수준의 기초연구와 첨단혁신, 국제적 영향력에 집중하며, 연구성과를 대학의 사회적 역할과 정당성의 핵심으로 삼게 된다.

두 번째는 대형 지역대학 또는 대학연합이다. 지역정부와 기업, 보건·공공기관과 협력해 지역혁신과 인력양성을 담당하고, 전일제와 시간제, 평생교육을 결합한 유연한 학위과정을 운영한다. 일부는 전문대학이나 직업교육기관과 결합한 고등·직업교육 통합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로컬대학이다. 지역 학생에게 교육과 진학경로를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다른 대학이나 민간기관과 학점이동 및 공동운영체계를 구축한다. 일부 대학은 소수의 교육과정만 직접 운영하고 행정·학생지원 기능을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할 가능성도 있다.

네 번째는 전문특화대학이다. 특정 학문이나 산업, 전문직, 독자적인 교육방식에 집중하는 소규모 기관이다.

이러한 분화는 정부가 계획한 고등교육 구조개편의 결과라기보다 재정위기와 시장변화에 대응하는 대학들의 개별 선택을 통해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는 영국 고등교육이 현재 대학 쇠퇴와 연구 집중, 지역 중심 개편이 명확한 정책체계 없이 동시에 진행되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평가했다.

“명성이 아니라 생존 가능성을 위한 대학 운영 필요”

대학에 요구하는 핵심은 구조조정의 목적을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현재 많은 대학이 교직원 감축과 학과 폐지, 선택과목 축소, 행정조직 개편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기존 대학의 운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비용 절감인지, 새로운 대학모델로 전환하기 위한 변화인지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단순한 비용 절감은 당장의 퇴출을 막을 수 있지만, 교육과정 축소와 학생경험 악화, 반복적인 인력감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학은 자신이 지속할 수 있는 연구 분야와 교육 분야를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운영모델과 인력구조, 기술투자, 지역 역할을 하나의 전략 안에서 재설계해야 한다.

보고서는 대학 이사회와 경영진이 순위와 외형적 명성이 아니라 기관의 지속 가능성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대학이 연구 확대와 국제화, 지역혁신, 평생교육, 디지털 전환을 동시에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도 역할을 요구했다. 다년간의 교육재정 계획과 전략적 학문분야 지원, 평생학습제도의 실행체계, 국제학생 정책과 대학재정의 모순 해소, 연구 집중에 대한 명확한 정책, 대학 통합과 퇴출을 관리하는 공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특히 대학이 실제로 파산한 이후 긴급 개입하는 방식보다, 재정위험을 조기에 확인하고 통합이나 사업이전, 질서 있는 퇴출을 지원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비용과 학생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봤다.

영국과 한국은 등록금과 연구비, 입시, 국제학생 정책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HEPI 보고서가 던지는 질문은 한국 대학에도 낯설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 속에서도 모든 대학이 종합대학의 외형을 유지하고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할 수 있는지, 지역대학의 역할을 재정지원사업 참여로만 설명할 수 있는지, AI를 평가 부정행위의 문제로만 다뤄도 되는지, 통학과 취업을 병행하는 학생을 고려해 대학 교육을 다시 설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국내에서도 대학 통합과 학과 구조조정, 지역혁신, 성인학습자 확대, 무전공 입학, AI 교육혁신이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들이 어떤 대학모델을 향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HEPI 보고서는 대학위기의 본질이 재원이 부족하다는 데만 있지 않다고 본다. 지난 성장기의 대학 운영모델을 유지한 채 수입을 늘리는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대학의 미래는 모든 기능을 유지하면서 규모를 줄이는 방식보다, 어떤 역할을 남기고 어떤 역할을 포기할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영국 대학이 마주한 ‘새로운 선택’은 한국 고등교육에도 대학의 규모가 아니라 대학의 기능과 운영방식을 다시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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