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는 그 어떤 복수극보다 현실적이고, 그 어떤 스릴러보다 조용한 공포를 품고 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 작품은 개봉 전부터 “박찬욱의 가장 사회적인 영화이자, 자본주의의 초상화”라는 평을 받았다。 감독은 이번 작품을 두고 “복수가 사라진 시대의 인간”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올드보이〉가 억눌린 분노의 폭발이었다면,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는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서 생존이 어떻게 폭력으로 전이되는가를 탐구한다.
이 영화는 미국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The Ax』(1997)를 원작으로 하지만, 박찬욱은 배경을 1990년대 산업 구조조정에서 2020년대 AI 자동화 시대로 옮겼다. 그는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기술과 무감한 시장의 논리를, “살인보다 잔혹한 경쟁”의 은유로 형상화한다. 실제로 작품의 주인공이 종이회사 직원이라는 설정은 감독의 의도적 선택이다. 디지털 전환으로 몰락하는 ‘종이 산업’은 곧 사라져가는 인간 노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평단은 이 작품을 두고 “〈기생충〉 이후 가장 섬세하게 체제의 폭력을 포착한 영화”라 평했다. 외형상 블랙코미디로 포장된 이 영화는 실직, 가족, 경쟁, 자동화라는 단어들이 교차하며 인간이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는가’를 그린다. 박찬욱은 피와 잔혹 대신 정교한 웃음과 불편한 공감으로 세계를 절단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늦여름 저녁의 평화로운 바비큐다. 유만수(이병헌)는 제지회사에서 받은 ‘감사의 선물’인 장어를 굽고 있다. 가족은 잔디밭에서 웃으며 식사를 준비하고, 개 두 마리가 뛰논다. 카메라는 천천히 이동하며 이 완벽한 중산층의 풍경을 비춘다. 그러나 곧 드러난다. 그 장어는 사실상 해고 통보의 상징이다 — 외국계 기업의 인수로 회사는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그에게 남은 것은 퇴직금뿐이다. 이 오프닝 장면은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가장 평온한 공간에서 가장 잔혹한 현실이 시작된다. 장어의 미끈한 질감은 종이처럼 부드럽지만, 손에 쥐면 쉽게 찢어진다. 평론가들은 “종이라는 소재가 유만수의 삶을 은유한다 — 일자리를 지탱하던 산업이 이제는 그를 삼켜버린다”고 분석했다. 이 장면 이후 영화는 급격히 무너지는 가장의 일상을 따라간다. 25년간 일한 회사에서 쫓겨난 그는 이력서를 수십 곳에 보낸다. 면접에서 “요즘은 온라인 협업이 중요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시대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자신을 느낀다.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종이 인간입니다.” 그의 대사는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라, 기술 진보가 인간 존엄을 대체하는 현실의 선언문처럼 들린다.
집에서는 아내 미리(손예진)가 현실적인 태도로 말한다. “당분간 쉬어요. 당신이 일 안 하면 어때요.” 그러나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상실의 확인이다. 가족의 식탁은 여전히 정갈하지만, 그 위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긴다. 박찬욱은 대사를 거의 배제한 채, 카메라를 거실 벽의 거울에 고정시켜 가족의 단절을 반사한다. 평온한 가족 초상화가 서서히 붕괴의 전조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유만수는 오랜 구직 실패 끝에 ‘한 자루의 연필’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는 ‘새로운 제지회사 임원 모집’이라는 가짜 구인광고를 무역 전문지에 싣는다. 조건은 단 하나, “지원서는 반드시 종이로, 우편으로 제출할 것.” 이 한 줄은 디지털 시대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한 함정이다. 서류로 제출된 이력서에는 이름, 주소, 경력, 가족관계까지 모든 정보가 담겨 있고, 그는 그 정보를 이용해 경쟁자를 한 명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살인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다. 첫 번째 살인은 희생자가 만들어놓은 음향실에서 시작된다. 총성을 감추기 위해 음악을 지나치게 크게 틀어두는 바람에, 만수의 계획은 엉망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실패의 순간이 영화의 가장 잔혹하고 웃긴 장면으로 남는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통해 블랙코미디의 본질을 보여준다. 피 대신 리듬이 흐르고, 살인은 광기라기보다 절망의 의식처럼 연출된다. 관객은 놀라기보다 피식 웃게 되며, 바로 그때 불편함이 시작된다. 그의 일상은 점점 살인을 위한 행위들로 채워진다. 우편물 정리, 차량 운전, 출퇴근처럼 살인도 하나의 루틴으로 흡수된다. 박찬욱은 이를 “노동의 연장선으로서의 폭력”처럼 묘사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만수의 살인은 체제의 산물이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생존의 기계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은 살인자의 심리가 아니라, 생존이 얼마나 손쉽게 비윤리로 전환될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이다.
평론가 크리스 코너(Chris Connor)는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가장 섬뜩한 점은, 살인이 범죄가 아니라 경제활동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라 평했다. 실제 영화 속 만수는 이력서를 정리하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살해 계획을 세우며 통계표를 업데이트한다. 그에게 살인은 ‘업무 효율’의 다른 형태다. 박찬욱은 이 냉소적 장면들을 통해 ‘살인’이라는 단어 대신 ‘조정’, ‘관리’, ‘최적화’ 같은 기업 언어를 들려준다. 그리하여 영화는 점점 사회풍자의 리듬을 띠며, “인간이 시스템을 닮아가는 과정”을 스릴러의 문법 속에 녹여낸다.

만수의 범죄가 진행될수록 집안의 공기는 점점 달라진다. 아내 미리(손예진)는 남편의 거짓말을 눈치챈다. 이해할 수 없는 차의 주행거리, 연결되지 않은 전화, 그리고 끝내 그가 누군가를 죽였음을 직감하게 되는 순간.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고발’이나 ‘도주’로 가지 않는다. 대신 미리는 남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가족의 일은, 우리가 같이 해결해야지.” 이 한 문장은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윤리적 심장을 관통한다. 그녀는 남편을 용서하지 않는다. 다만, 왜 그렇게까지 몰렸는지를 이해한다. 그 이해는 곧 공모가 된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동시에 가장 위험한 언어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정적이고 긴 롱테이크로 처리한다. 조명은 따뜻한 전등빛이지만, 그 온기 속에 냉기가 스민다. 관객은 두 사람의 대화보다 그 침묵을 듣게 된다.
이 장면에서 손예진의 연기는 영화 전체의 도덕적 무게를 바꾼다. 그녀는 두려움 대신 연민을 택한다. 그 순간, 범죄는 가족의 일로 재정의되고, 죄의 무게는 부부의 비밀로 봉인된다. 그들은 더 이상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니라, 같은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윤리를 거래한 인간들이다.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는 이 장면을 두고 “박찬욱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사랑이 죄의 피난처로 등장했다”고 썼다. 그의 말처럼 이 부부의 연대는 구원이 아니라 타락의 공존이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묘한 감정을 느낀다 — 안도, 슬픔, 그리고 서늘한 공감. 왜냐하면, 만수가 저지른 범죄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 또한 그들의 공모자가 되기 때문이다.
살인과 불안, 자기합리화의 연쇄가 끝난 뒤, 영화는 뜻밖의 고요로 닫힌다. 유만수는 마침내 새 직장을 얻는다. 그가 손에 쥔 명함에는 ‘솔라페이퍼 인더스트리 리뉴얼사업부 매니저’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관객은 곧 알아차린다. 그가 돌아온 회사는 더 이상 사람이 일하는 곳이 아니다. 공장은 완전히 자동화되었고, 컨베이어벨트는 로봇 팔과 인공지능 시스템이 대신 움직인다. 만수의 자리는 모니터와 알고리즘 사이, “사람이지만 이미 불필요한 존재”로 남은 단 하나의 빈 좌석이다. 이 장면에서 박찬욱은 어떠한 음악도 삽입하지 않는다. 형광등의 윙윙거림, 기계의 반복음, 먼지 날리는 공기. 이것이 그가 쟁취한 생존의 환경이다. 그는 무심히 커피를 들고 시스템에 로그인하고, 그래프가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는 화면을 바라본다. 그는 기계와 자신만이 남은 커다란 공장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환호성을 외친다. 그 환호성은 승리의 표출이지만, 곧 공허함으로 변한다. 그가 이뤄낸 것은 ‘생존’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체제 속에서의 잔류다. 어쩌면 이 장면은 AI 시대의 가장 잔인한 해피엔딩인 듯 하다.
영화는 이 엔딩을 통해 기술적 진보가 가져온 냉혹한 역설을 드러낸다. 노동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생존은 단지 시스템에 남아 있는 오류로서만 존재한다.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는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는 ‘생존한 자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살아 있을 이유는 사라졌다”고 적었다. 박찬욱은 마지막 숏에서 카메라를 천천히 만수의 얼굴로 줌인시킨다. 배경은 서서히 흐릿해지고, 모니터의 빛만 남는다. 그의 얼굴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데이터처럼 빛난다. 그리고 화면이 암전될 때, 관객은 미묘한 죄책감과 피로감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고, 그를 구원할 수도 없다. 그는 단지 “시스템이 만들어낸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Cinema Escapist는 이를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폭력은 존재 그 자체”라고 요약했다.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엔딩은 그렇게 해서 비극을 초월한 냉정한 선언이 된다 — 살인보다 잔혹한 것은, 아무도 죽지 않아도 인간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시각적 구성은 이야기의 감정선을 그대로 투사한다. 영화는 초반부의 따뜻한 햇빛에서 시작해, 점점 푸른빛과 회색의 스펙트럼으로 가라앉는다. 촬영감독 김우형은 이번 작품에서 “자연광과 인공광의 충돌”을 주제로 삼았다고 밝혔다. 그의 카메라는 해고 이전의 장면에서는 황금빛 조명과 자연스러운 질감으로 ‘가정의 안정’을 그린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만수가 범죄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빛은 차갑고 인공적인 색으로 변한다. 박찬욱의 세계에서 색은 감정이 아니라 도덕의 온도를 가리킨다.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는 “이 영화의 빛은 인간의 양심처럼 점점 식어간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영화 중반 이후, 집 안의 벽지는 희미한 회백색으로 바뀌고 카메라는 인물보다 그림자에 더 오래 머문다. 거실 장면에서 조명은 인물의 얼굴보다 창문을 비춘다. 그 창은 종이창처럼 얇은 반투명 필름으로 덮여 있으며, 바깥의 빛이 스며들지 못하고 표면에서 반사된다. 이 반사 효과는 “세상과 단절된 인간”을 상징한다. 관객은 만수가 살아 있는 공간 안에서도 이미 사회로부터 분리된 존재임을 느낀다.
색채의 변주도 인상적이다. 초반의 따뜻한 베이지 톤은 ‘가족의 환상’을, 중반의 녹색 조명은 ‘윤리적 균열’을, 후반의 푸른 톤은 ‘인간 부재의 세계’를 암시한다. AI 자동화 공장 장면에서는 LED 빛이 인물의 피부를 메탈릭하게 비추며, 그는 마치 인간이 아닌 합금처럼 보인다. 박찬욱은 이를 통해 “살아남은 인간이 이미 비인간화된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명시한다. 종이 질감 같은 색조와 사운드 믹싱은 영화 전반의 테마와 교차한다 — ‘종이 인간’이 시스템에 흡수되는 과정이 빛의 변화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거울과 반사’의 사용이다. 박찬욱은 거울을 인물의 양심을 비추는 장치로 사용해왔다. 〈아가씨〉에서는 욕망의 분열을, 〈결심의 끝〉에서는 진실의 왜곡을 반사했다면, 〈어쩔 수가 없다〉에서 거울은 자기부정의 증거다. 만수는 거울 앞에서 중얼거린다. “이제는 진짜로 일할 수 있겠지.” 그의 눈빛은 자신을 확인하지 못한다. 거울은 빛을 반사하지만, 인물의 얼굴을 완전히 담지 않는다. 그의 존재는 더 이상 하나의 이미지로 완결되지 않는다 — 그가 이미 인간이 아닌,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Tatler Asia는 이 영화를 “빛과 반사의 미학으로 구성된 자본주의의 장례식”이라 불렀다. 실제로 박찬욱의 카메라는 이번 작품에서 피보다 빛, 폭발보다 침묵, 붉음보다 회색을 택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폭력의 미학이 아닌 퇴색의 미학으로 완결된다. 그것은 인간의 시대가 끝난 자리를 비추는 빛이며, 한 세대의 윤리와 노동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하는 시각적 증언이다.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중심에는 두 배우의 절제된 연기가 있다. 이병헌은 유만수라는 인물을 연민과 공포의 경계에 세운다. 그의 표정은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피하고, 오히려 감정의 공백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만수는 분노도, 미움도, 의지도 다 잃은 사람이다. 그가 하는 일은 그저 살아 있는 척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연기는 바로 그 ‘척하는 연기’다.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에도 그는 당황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를 바라보는 미묘한 시선의 흔들림 속에서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나도 모른다”는 무력감을 드러낸다. 평론가 케일라 톰슨(Kayla Thompson)은 “이병헌은 절망을 분노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정지 상태다. 그것이 영화의 리듬을 만든다”고 썼다. 이병헌의 연기는 박찬욱 영화 특유의 형식미 속에서도 이질적인 ‘정적’이다. 그는 감정의 폭발 대신 시선과 호흡으로 인물을 만들어간다. 면접 장면에서 떨어진 후, 창밖을 바라보는 시퀀스는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연기의 정점이다. 대사는 없고, 얼굴에는 미묘한 빛의 반사만 흐른다. 그 표정 속에는 분노, 수치, 그리고 체념이 한꺼번에 담겨 있다. 평단은 이 장면을 두고 “〈올드보이〉의 망치 대신,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무기는 이병헌의 눈빛이다.”라고 평했다. 그의 시선은 폭력보다 강력한 무기다 — 그는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폭력의 주체가 아니라 희생자처럼 보인다. 이 모순된 인상은 관객을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불안하게 만든다.

손예진의 연기는 이병헌의 정적에 균열을 낸다. 그녀가 연기하는 미리는 남편의 절망을 바라보며 두려움보다 이해를 택한다. 그녀는 남편 묻어놓은 시체를 발견하고 남편을 의심하는 아들에게 거짓말로 둘러댄다. 이 한 장면은 손예진의 내면 연기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공포를 외면함으로써 공모자가 된다. 평론가 케이시 리(Casey Lee)는 “손예진의 얼굴은 ‘이해’와 ‘포기’의 중간에 있다. 그 표정은 사랑의 형태로 가장한 현실의 타협이다.”라고 평했다No Other Choice 어쩔수가없다. 손예진은 이 영화에서 단 한 번도 큰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대사보다 더 크다. 특히 남편에게 “가족의 문제는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지만, 눈빛은 단단하다. 그녀는 도덕적 판단을 중단한 대신, 감정의 윤리를 선택한다. 박찬욱은 이 대목을 ‘사랑이 타락으로 이어지는 장면’이라고 표현했다. 그녀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깊은 윤리적 함정을 형성한다. 관객은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그 이해가 죄의 공모임을 깨닫는다. 이병헌과 손예진의 조합은 단순한 부부 연기가 아니라, ‘도덕의 붕괴를 함께 체험하는 두 인물의 리듬’이다. 그들의 사랑은 살아 있지만, 그 사랑이 더 이상 인간적인가에 대한 질문만 남는다.
Cinema Escapist는 이 두 배우의 연기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병헌은 인간의 소멸을, 손예진은 인간의 잔여를 연기한다. 그 사이에서 관객은 공감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가 냉혹한 체제의 풍자로만 남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박찬욱은 두 배우의 얼굴 위에 체제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림자 속에서 인간의 표정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제목은 변명이 아니라 진단이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그 상황을 유지하는 쪽도 결국 우리 자신이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단지 한 남자의 범죄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도덕적 붕괴를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보고서다. AI, 자동화, 경쟁, 가족, 생존 — 이 단어들은 영화 속에서 서로 엮이며 ‘현대의 폭력’을 정의한다. 그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대신 해고 통보, 데이터 삭제, 자동화 설비, 면접 탈락의 언어 속에서 조용히 인간을 지워나간다.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진짜 공포는 그 조용함에 있다.
박찬욱은 이번 작품을 통해 폭력을 미학의 차원에서 해체한다. 〈올드보이〉의 망치와 〈박쥐〉의 피, 〈아가씨〉의 욕망은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에서 종이와 서류로 대체된다. 그는 “폭력의 시대는 변했다”고 말한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지우는’ 시대가 왔다. 그 지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박찬욱은 그 질문을 관객에게 남긴다. 이 영화는 끝났지만, 현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는 결국 ‘생존 이후의 윤리’를 묻는다. 살아남은 자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만수가 내뱉는 승리의 환호성은 사실상 생존을 위한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었고, 시스템의 일부로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절박함’은 우리 자신의 초상과 겹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수를 비난하면서도, 그의 선택을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는 순간, 이미 같은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어쩔 수가 없다(No Other Choice)』의 마지막 문장은 없다. 영화는 암전으로 끝난다. 그러나 암전 뒤에도 남는 것은 빛의 잔상이다. 그 잔상은 스크린 속이 아니라, 스크린 밖 — 우리의 일상과 노동, 그리고 생존의 피로 속에 남는다. 그곳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변명이 아니라, 현대인의 윤리적 자화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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