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암살자(들)」의 닫힌 추적과 역사적 상상력의 책임 – 질문하는 영화, 정해진 답

좋은 배우들이 모였다고 좋은 긴장까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해진과 박해일, 이민호가 이끄는 「암살자(들)」을 보고 남은 아쉬움은 배우들의 존재감과 이야기의 흡인력이 서로 다른 문제라는 데 있었다. 인물들은 절박하게 움직이고 사건의 의혹은 거듭 제시된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동안, 다음 단서가 지금의 판단을 어디로 바꾸어놓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추적이 길어질수록 미지의 답에 가까워진다기보다 이미 예고된 의심을 확인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어졌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다. 사건 현장의 경호를 맡았던 형사 철구,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 현장을 목격한 신입 기자 영일이 공식 발표와 현장의 흔적 사이에서 의문을 품는다. 역사적 사건에 가상의 인물과 영화적 상상력을 결합한 설정이다. 이들이 무엇을 발견하는지와 함께, 압력 속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가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런데 질문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것과 관객에게 질문할 여지를 주는 것은 다르다. 「암살자(들)」을 향해 던지고 싶은 물음은 여기에 있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설명하지만, 정작 관객에게는 답을 미리 정해주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는가.

추적은 계속되지만, 의심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추적극의 긴장은 정보의 양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단서가 앞선 설명을 흔들고, 믿었던 판단을 수정하게 만들 때 관객은 사건에 참여한다.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때로는 앞서 의심하고, 때로는 자신의 확신을 거두게 된다. 화면 속 이동과 관객의 생각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암살자(들)」에서 아쉬운 것은 그 두 움직임 사이의 간격이다. 형사의 수사와 기자들의 취재는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가지만, 관람의 인상은 여러 설명이 경쟁하는 과정보다 권력기관을 향한 의심이 축적되는 쪽에 가깝다. 공식 설명을 의심하게 만드는 힘에 비해, 그 의심에서 출발한 새로운 가설을 다시 시험하는 긴장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가온다.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는 일찍 선명해지고, 이후의 전개는 그 방향을 더욱 짙게 만드는 듯하다.

탄환의 행방을 반복해서 설명하는 구성은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허진호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사건의 구조를 관객이 이해하도록 중복을 감수했다고 설명했다. 복잡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은 이해할 만하다. 다만 관객이 상황을 알아듣는 것과 이야기에 새롭게 몰입하는 것은 별개의 성취다. 설명이 반복될 때마다 사건을 보는 관점까지 달라지지 않는다면, 명료함이 높아지는 만큼 서사의 속도는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

물론 모든 추적극이 반전을 거듭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도 인물의 선택과 대가를 통해 충분한 긴장을 만든다. 문제는 방향이 정해진 이후 무엇이 깊어지는가에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절박함이 커지는 속도만큼 관객의 의문이 복잡해지지는 않는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루함은 그 간격에서 생긴다. 사건은 계속 진행되지만, 관객이 새롭게 판단해야 할 몫은 충분히 늘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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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양심이 가설의 증거가 될 때

영화가 형사와 기자에게 부여한 직업적 책임은 분명한 공감의 근거다. 자신이 목격한 것과 조직이 발표한 것이 다를 때 질문하는 형사, 전달해야 할 사실을 권력의 편의에 따라 지우지 않으려는 기자는 존중받을 만하다. 그런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에게 관객의 마음이 기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신뢰와 그 인물이 좇는 가설의 신빙성은 구분되어야 한다. 용기 있는 사람이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며, 누군가가 부당한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추정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관객이 인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순간에도 사건을 설명하는 논리는 별도로 작동해야 한다.

이 구분은 영화 후반부가 언론인의 신념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때 더욱 중요해진다.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체포하는 결말 대신, 외압에 맞서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배치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선택은 작품이 도달하려는 감정의 방향을 설명해준다. 사건의 해명과 별개로 질문할 권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두겠다는 것이다. 그 선택은 존중할 수 있다. 다만 앞서 제기한 의혹이 어느 수준까지 뒷받침되었는지와 인물들의 저항이 얼마나 감동적인지는 여전히 다른 질문이다. 후자의 감정이 전자의 빈자리를 채운다면, 관객은 가설을 검토하기보다 가설을 믿는 사람을 응원하는 위치에 놓인다. 의심을 유보하는 태도마저 용기 있는 인물들과 거리를 두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음모론을 극화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이유도 그 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의혹을 다루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의혹을 검증하는 과정에 비해 그것을 믿게 만드는 감정적 설득이 앞선다는 느낌이 문제다. 쟁쟁한 배우들은 인물에게 무게를 더하지만, 그 무게가 사건의 논리까지 대신 지탱할 수는 없다.

말하지 않았다는 해명, 보이게 했다는 문제

역사 왜곡 논란에 대해 허진호 감독은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의 피격을 지시했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영화 속 ‘윗선’도 중앙정보부 내부의 권력 암투를 뜻하며 대통령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중정의 개입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과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상정하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동시에 감독의 설명만으로 관객에게 형성된 인상에 관한 질문이 끝나지는 않는다. 영화는 대사로만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어떤 인물의 설명을 오래 듣게 하는지, 누구의 의심에 감정을 실어주는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남겨두는지에 따라 관객은 화면에 명시되지 않은 관계까지 추론한다. 특정한 결론을 말하지 않았다는 설명과 그 결론을 연상하도록 만들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함께 검토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영화가 남긴 모호함을 곧바로 제작자의 악의로 번역하는 일이 아니다. 그 모호함이 실제로 여러 해석을 열어두는지, 아니면 특정한 의심을 강화하면서 판단의 책임만 관객에게 넘기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결론을 명시하지 않는 형식이 반드시 열린 서사를 뜻하지는 않는다. 의심의 방향을 강하게 제시한 뒤 마지막 문장만 비워둘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사의 의문점, 사후 은폐, 사건의 사전 기획, 대통령의 지시와 승인은 각각 다른 수준의 주장이다. 수사 과정에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수사기관이 사건을 기획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권력기관의 개입을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지시였는지는 다시 별도의 근거를 요구한다.

이 단계들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성실하게 다루는지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추적극의 설득력을 좌우한다. 기존 설명의 빈틈은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빈틈 자체가 새로운 답의 증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실화의 무게를 빌린 상상력의 책임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기록에 남지 않은 대화와 표정, 개인의 망설임까지 모두 확인한 뒤에만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공식 기록에 질문을 던지고 익숙한 해석을 뒤집는 작업도 창작의 영역이다. 누군가 불편해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시도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실존 인물을 중대한 범죄의 배후로 상상하게 만드는 선택은 그 무게에 상응하는 비평을 받아야 한다. 인물의 감정을 재구성하는 일과 살해의 책임을 연결하는 일은 같은 정도의 추정으로 취급하기 어렵다. 후자는 누군가의 삶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바꾸고,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 인식에도 흔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은 관련자와 유족, 당시의 충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역사다. 이들에게 사건은 장르적 흥미를 위한 소재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기억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은 모두 부당하다는 뜻도 아니다. 필요한 질문은 충격을 주었느냐를 넘어선다.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충격을 만들었으며, 확인된 사실과 창작한 가설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신중하게 다루었느냐는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이미 알려진 사건의 무게와 현실감을 얻는다. 관객은 완전히 허구인 이야기와 다른 관심으로 화면을 바라본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허구라는 설명만으로 모든 평가를 피할 수는 없다. 실화가 주는 신뢰가 서사의 설득력을 높였다면, 그 신뢰를 어디까지 사용했는지도 작품의 일부로 검토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이런 평가와 양립한다. 영화를 만들고 상영할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추정이 빈약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실존 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했는지 물을 수도 있다. 작품에 대한 비판을 곧바로 창작의 억압으로 돌리는 것도, 작품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상영을 막으려는 것도 영화가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질문을 흐리게 한다.

「암살자(들)」의 아쉬움은 결국 처음의 관람 경험으로 돌아온다. 형사와 기자들이 끝까지 질문하는 모습에 비해, 그들이 좇는 의심을 관객이 다시 질문할 공간은 좁게 느껴졌다. 그 간격이 추적의 긴장을 약화하고, 인물들의 뜨거운 신념에도 선뜻 동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는 영화라면, 그들의 확신이 틀릴 가능성 또한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자유는 소중하다. 그 자유로 만들어낸 영화에는 질문이 다시 돌아간다. 당신은 관객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했는가. 그리고 그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얼마나 남겨두었는가.「암살자(들)」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은 그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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