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베리티」, 작가가 독자가 되는 순간

믿고 싶은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인 대가, 그 믿음은 행동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소설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등장인물의 과거를 결정하고, 그들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하며, 독자들이 무엇을 의심하고 누구를 믿을 것인지 설계한다. 때로는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때로는 거짓을 진실처럼 내세우면서 독자들을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이끈다. 적어도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안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그런 소설가도 다른 사람이 쓴 이야기를 읽을 때는 한 명의 독자가 된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자신에게 허락된 정보만으로 판단해야 하고, 작가가 숨겨놓은 진실 앞에서는 다른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을 겪는다.

마이클 쇼월터 감독의 영화 「베리티」는 바로 이 역설에서 출발하는 심리 스릴러다.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 베리티 크로퍼드(앤 해서웨이)와 그녀의 작품을 대신 집필하게 된 무명 작가 로웬 애슐리(다코타 존슨). 두 사람은 모두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들의 위치는 기묘하게 뒤바뀐다. 베리티가 남긴 원고를 읽기 시작한 로웬은 어느 순간 자신이 읽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근거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녀 앞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가 진실인지 끝내 확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욱 불편한 질문 하나를 남긴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이야기를 근거로 저지른 행동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베리티」는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진실을 찾기 위해 들어간 집, 믿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다

로웬은 성공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작가다. 그녀에게 유명 작가 베리티의 시리즈를 대신 집필해달라는 제안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기회다. 사고 이후 정상적인 집필 활동이 불가능해진 베리티를 대신해 작품을 이어간다는 일은 경제적인 돌파구인 동시에 작가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렇게 로웬은 베리티의 남편 제러미(조시 하트넷)가 머무는 저택에 들어간다. 외부와 떨어진 넓은 집, 가족에게 닥친 비극, 의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베리티.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남편 제러미까지. 저택은 처음부터 쉽게 설명되지 않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로웬은 베리티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남겨진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자전적인 고백처럼 보이는 원고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베리티가 남편에게 품었던 집착과 아이들을 향한 충격적인 감정, 딸의 죽음에 얽힌 끔찍한 내용이 적혀 있다. 원고가 제시하는 베리티는 더 이상 불행한 사고의 피해자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의 비극을 초래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영화는 관객에게도 하나의 시선을 제공한다.

베리티는 정말 아이를 죽였을까. 사고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그녀의 모습은 진실일까. 로웬이 집 안에서 목격하는 이상한 상황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원고를 읽기 전까지 설명되지 않던 장면들은 원고를 읽은 뒤부터 새로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베리티의 침묵은 위협처럼 느껴지고, 그녀의 작은 움직임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행동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로웬이 발견한 것은 범죄의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한 작가가 쓴 원고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진실을 기록한 고백인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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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로웬은 점차 원고에 적힌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 이유는 베리티가 이야기를 너무 잘 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로웬에게는 그 이야기를 믿고 싶은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쉽게 진실이 된다

로웬이 베리티의 원고를 믿게 되는 과정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가는 과정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저택에 머무는 동안 로웬은 베리티가 누리던 세계에 점점 가까워진다. 성공한 작가의 명성과 경제적 풍요, 아름다운 집과 가족. 로웬에게는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삶이다. 여기에 제러미를 향한 감정까지 더해진다. 제러미는 아내와 아이를 둘러싼 비극을 견디며 살아가는 남자로 등장한다. 로웬의 눈에 그는 깊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자 자신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베리티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로웬이 제러미에게 가까워질수록 베리티의 존재는 불편해진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두 사람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처럼 놓여 있다. 그런 상황에서 베리티의 원고는 로웬에게 결정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베리티가 끔찍한 사람이라면, 제러미는 그런 아내에게서 벗어나야 할 피해자가 된다. 베리티가 저지른 일이 사실이라면, 그녀를 향한 의심과 적대감은 정당한 감정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아가 로웬이 제러미에게 품는 감정 역시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설명될 여지를 얻는다.

물론 영화가 로웬의 모든 심리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처음부터 이런 계산을 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리티의 원고가 로웬의 감정과 욕망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사람은 언제나 충분한 증거를 확보한 뒤 믿음을 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믿고 싶은 결론에 가까워지고,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정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로웬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베리티의 행동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원고를 믿은 것인지, 원고를 믿었기 때문에 베리티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워진 것인지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진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은 쉽게 모습을 감춘다. 그렇게 로웬은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발견한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읽기 시작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때로 진실이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영화 속 베리티의 원고가 위험한 이유도 그 안에 거짓이 담겨 있을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읽는 사람이 원하는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그 설명을 의심할 필요마저 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쓰던 작가가 타인의 이야기 속 독자가 되다

「베리티」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로웬 역시 소설가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는 사람이다. 작가가 독자의 감정을 어떻게 유도하고, 어떤 정보를 감추며, 무엇을 진실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로웬이 베리티의 원고에 사로잡힌다. 처음 로웬에게 원고는 베리티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원고는 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자신이 읽은 이야기에 비추어 해석한다. 이것은 단순히 잘 쓰인 소설에 몰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현실을 통해 이야기의 진위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진위를 결정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로웬은 작가의 자리에서 내려와 독자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베리티가 만들어놓은 서사의 규칙을 따라 현실을 읽는 독자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쓴 이야기에서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수 있지만, 독자는 작가가 허락한 만큼만 알 수 있다. 독자는 주어진 장면을 바탕으로 다음 사건을 예상하고, 인물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작가는 언제든 새로운 정보를 꺼내 그 해석을 뒤집을 수 있다.

영화에서 로웬이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베리티가 남긴 원고는 로웬에게 하나의 완결된 설명을 제공한다. 로웬은 그 설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판단을 쌓아간다. 그리고 그 판단이 충분히 확고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행동에 나선다. 문제는 그녀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현실에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평범한 독자는 소설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반전을 예상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악인을 선인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그 오독은 대개 한 편의 이야기를 잘못 읽은 경험으로 남는다.

로웬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읽은 이야기를 근거로 현실의 누군가를 판단했고, 그 판단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다. 소설 속 진실이 뒤집히는 순간 독자는 놀라지만, 현실에서 믿었던 진실이 뒤집히는 순간 누군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당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베리티」는 흔한 반전 스릴러의 구조를 넘어선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한 작가가 다른 작가를 속였을 가능성이 아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자기 삶의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읽는 동안 자신 역시 그 서사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 사람의 모습이다.

믿었다는 이유로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을까

로웬만 베리티의 원고를 진실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제러미 역시 그 원고를 통해 아내를 판단한다. 사랑했던 아내가 자신과 아이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믿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베리티를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분노와 배신감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특히 자녀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라면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정의 정당성과 행동의 정당성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제러미는 원고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결국 그녀를 죽인다. 로웬은 그 과정을 멈추기보다 죽음을 사고로 위장하는 데 가담한다. 이 장면은 영화가 제시해온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뒤흔든다. 베리티가 정말 아이를 죽였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더라도 제러미에게 아내를 죽일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로웬 역시 그의 행동을 도왔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들이 믿었던 내용이 진실이라면 행동을 이해할 근거는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반대로 그 원고가 허구였다면 어떨까. 제러미는 죄가 없는 아내를 잘못된 믿음으로 살해한 사람이 되고, 로웬은 자신이 품었던 의심과 욕망을 진실로 확신한 채 한 사람의 죽음에 가담한 사람이 된다. 어느 쪽이든 두 사람의 행동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남겼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언제나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더라도, 자신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고 믿으면 그 행동을 견딜 수 있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설명은 때로 자신의 잘못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해준다. 제러미와 로웬에게 베리티의 원고는 바로 그런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베리티가 그런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원고의 진실 여부는 단순한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 원고가 진실이어야만 자신들의 행동에도 명분이 남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된다. 이제 그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인 동시에, 자신이 믿었던 이야기가 진실이기를 바라야 하는 사람들이 된 셈이다.

마지막 원고, 무너지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명분이다

베리티가 죽은 뒤 로웬과 제러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베리티의 작품을 대신 집필했던 로웬은 작가로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고, 제러미와 함께 미래를 준비한다. 그녀는 한때 외부인이었던 저택의 삶 안으로 들어왔으며, 베리티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도 가까워졌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로웬은 베리티가 남긴 또 다른 편지를 발견한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앞서 읽었던 원고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베리티의 주장에 따르면 끔찍한 고백처럼 보였던 원고는 실제 범죄의 기록이 아니라, 자신을 악인으로 설정하고 극단적인 감정을 써 내려간 창작의 결과물이었다. 아이의 죽음 역시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제러미가 원고를 오해하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사고 이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도 남편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관객이 믿었던 이야기는 완전히 뒤집힌다.

희생자로 여겼던 제러미는 아내를 살해한 가해자가 되고, 괴물로 보였던 베리티는 자신이 쓴 허구 때문에 죽음에 이른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 편지 역시 진실이라고 보증하지 않는다. 베리티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원고와 편지 중 무엇이 진실인지 확인할 결정적인 근거는 주어지지 않는다.어쩌면 베리티는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의 판단을 흔들 수 있는 작가였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가 베리티의 결백을 입증했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 편지 한 장으로 로웬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왔던 근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로웬은 이미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러미가 아내를 죽이는 일을 돕고 그 죽음을 사고로 감추는 행위가 정당한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믿었던 베리티의 모습은 그 행동을 설명하는 명분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베리티가 정말 무고했다면 어떨까. 원고가 실제로는 한 작가의 허구였고, 자신이 그 허구를 사실로 믿으며 한 사람의 죽음에 가담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로웬에게 남는 것은 단지 판단을 잘못했다는 후회가 아닐 것이다.자신의 범죄적 행동을 합리화할 마지막 근거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더구나 로웬은 그 편지를 제러미에게 알리지 않고 감춘다. 이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처음 베리티의 원고를 발견했을 때 로웬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했고, 결국 제러미에게 내용을 알렸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를 발견한 뒤에는 그것을 공개하기보다 숨기는 쪽을 택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설명해주었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이미 얻은 현실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일까.

로웬의 침묵은 그렇게 읽을 여지를 남긴다. 그녀는 여전히 어느 이야기가 진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이야기가 진실이기를 바라는지는 이전보다 분명해졌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베리티의 진실을 알고 싶었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이 믿어온 진실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어쩌면 로웬에게 가장 두려운 가능성은 베리티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

자신의 욕망과 판단이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진실로 선택했고, 그 믿음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왔다는 사실이야말로 로웬이 가장 마주하기 어려운 진실일 수 있다.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 그러나 누구도 진실을 소유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인 ‘Verity’는 진실 또는 진실성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가장 불확실한 것이 바로 진실이다. 베리티가 남긴 두 이야기는 서로 충돌하고, 제러미와 로웬의 기억과 판단에는 각자의 감정이 개입한다. 관객은 누구의 설명이 진실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까지 하나의 확정된 답을 내놓지 않는다.이러한 결말은 장점인 동시에 한계를 드러낸다. 영화는 고립된 저택과 움직이지 못하는 베리티의 존재, 그녀가 남긴 원고를 통해 효과적인 긴장감을 만든다. 특히 앤 해서웨이가 연기하는 베리티는 긴 설명 없이도 화면의 분위기를 바꾸는 인물이다. 침묵하는 동안에도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다코타 존슨의 로웬 역시 그 반대편에서 기능한다. 처음에는 불안한 외부인처럼 보이지만, 베리티의 원고를 읽고 저택에 익숙해질수록 점차 적극적인 판단과 선택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조시 하트넷이 연기하는 제러미는 그 사이에서 관객이 누구를 믿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인물로 놓인다.

그러나 영화의 반전이 모두 충분한 설득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사건은 더욱 극단적으로 전개되고, 인물들의 행동은 섬세한 심리적 변화보다 충격적인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선택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특히 마지막 편지가 등장하는 방식은 앞선 서사를 풍부하게 재해석하게 만들면서도, 지나치게 편리한 반전 장치처럼 보일 위험을 안고 있다. 진실을 확정하지 않는 결말이 언제나 깊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구축되지 않은 사건의 논리를 모호함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두는 것과, 서로 다른 진실의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공존시키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베리티」는 이 두 영역의 경계에 서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남긴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전의 진위를 따지는 데서 한 걸음 벗어나 인물들이 무엇을 믿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돌아볼 때 영화는 조금 더 흥미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베리티가 진실을 조작했는지, 제러미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로웬이 끝내 무엇을 믿기로 했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남는다.

그들이 무엇을 믿었든, 이미 저지른 행동까지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책을 덮은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베리티」의 결말이 흥미로운 이유는 관객 역시 로웬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로웬이 읽는 원고를 함께 받아들인다. 베리티를 의심하고, 제러미에게 공감하며, 어느 순간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스스로 판단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하면 다시 판단을 바꾸거나, 처음의 믿음을 유지하려 한다. 여기서 관객에게도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정말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판단했던 것일까. 아니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고, 믿도록 유도한 것을 믿었던 것일까. 물론 영화를 보는 관객과 현실에서 행동하는 로웬은 다르다.

관객은 이야기를 잘못 읽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신의 믿음이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때로는 확인하지 않은 정보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자신이 확신하는 사실을 근거로 다른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문제는 잘못된 정보를 믿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면서 그 믿음이 자신의 행동을 어디까지 허용하는지 의심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로웬과 제러미가 보여준 것도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행동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보에는 언제나 다른 가능성이 존재했고, 그 가능성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행동한 책임은 결국 자신들에게 남는다. 어쩌면 이 영화가 끝까지 숨긴 진실은 베리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욕망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린 사람이 어디까지 잘못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로웬은 끝내 베리티가 남긴 두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마주해야 할 사실이 있다. 자신이 읽은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소설을 쓰던 작가가 다른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든 독자가 되었을 때, 그녀가 잊어버린 것은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는 능력만이 아니었다.자신이 읽고 있는 이야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을 외면한 채 내린 선택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었다.

독자는 책을 덮으면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현실을 바꿔버린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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