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육’이라는 말만으로는 더 이상 대학의 존재를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햄프셔 칼리지의 폐교는 실험적 교육이 시장의 압력 앞에서 무너진 사건으로 읽혔지만, 그 이후 제기된 또 다른 질문은 더 불편하다. 문제는 시장이 좋은 교육을 알아보지 못한 데에만 있었을까. 혹은 대학이 자신이 제공하는 교육의 가치를 학생과 가족,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햄프셔 칼리지는 오랫동안 전통적 학과 체계와 성적 중심 평가를 벗어난 실험대학의 상징으로 불렸다. 학생이 스스로 학습 경로를 설계하고, 프로젝트와 독립 연구를 통해 배움을 구성하는 방식은 기존 대학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신입생 감소, 장기 부채, 토지 개발 지연, 높은 교육비 부담이 겹치면서 2026년 12월 운영 중단을 예고했다. 기존 스포트라이트유 기사는 이 사건을 단순한 한 대학의 경영 실패가 아니라, 고등교육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다시 묻는 사건으로 다뤘다.
햄프셔 이후의 논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미국 보수 성향 싱크탱크 AEI에 실린 새 글은 햄프셔 폐교를 애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실험적 인문교육이 스스로 직면해야 할 질문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필자인 새뮤얼 J. 에이브럼스는 자신이 새라 로런스 칼리지에서 오랫동안 가르쳐왔고, 햄프셔와 베닝턴 같은 실험적 교육 모델의 가치를 사랑한다고 밝히면서도 “사랑은 분석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그의 문제 제기는 간단하다. 햄프셔가 상징했던 교육은 여전히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만으로 학생과 가족의 선택을 설득하기에는 고등교육 시장이 이미 달라졌다는 것이다.
실험교육의 승리, 그리고 역설적 약화
햄프셔가 출발했던 1960년대 미국 대학은 지금과 달랐다. 당시의 고등교육은 전공 장벽이 견고했고, 시험과 정해진 과제, 표준화된 교과 체계가 강했다. 햄프셔는 바로 그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했다. 학생은 수동적으로 지식을 전달받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탐구하고, 자신의 배움에 책임지는 존재여야 한다는 믿음이 그 대학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AEI 글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햄프셔의 문제의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대학 안으로 흡수됐다. 오늘날 미국 대학의 상당수는 학제 간 교육, 유연한 전공 설계, 프로젝트 기반 학습, 서사형 평가, 전인적 성장, 멘토링을 자신의 장점으로 내세운다. 햄프셔가 기존 대학을 향해 던졌던 비판은 일정 부분 승리했고, 그 결과 햄프셔만의 차별성은 약해졌다.
이 대목은 한국 대학에도 낯설지 않다. 지금 한국의 대학들도 저마다 융합교육, 자기설계전공, 비교과 포트폴리오, 프로젝트 수업, 지역문제 해결형 교육, 학생 맞춤형 진로 설계를 말한다. 과거에는 특색으로 보였던 언어가 이제는 거의 모든 대학의 홍보 문구가 됐다. 문제는 그 말들이 실제 교육 경험과 졸업 후 삶의 경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학생과 학부모가 확인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모두가 좋은 교육을 말할 때, 좋은 교육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설득력을 잃는다. 햄프셔의 폐교가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실험교육이 틀렸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실험교육의 언어가 널리 퍼진 뒤, 원조에 가까웠던 대학이 왜 더 이상 선택받지 못했는가의 문제다. 독창성은 처음에는 강점이지만, 그 독창성이 제도 전체에 흡수되면 더 이상 생존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대학은 “우리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다르고, 그 다름이 학생의 삶에 어떤 결과를 남기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변혁적 교육’과 ‘거래적 교육’ 사이의 빈틈
햄프셔를 둘러싼 논쟁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도는 변혁적 교육과 거래적 교육의 대립이다. 변혁적 교육은 학생의 내면적 성장, 비판적 사고, 자기 발견, 사회적 상상력,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한다. 반대로 거래적 교육은 학위, 취업, 소득, 사회적 지위, 투자 대비 수익을 중시한다. 햄프셔의 폐교를 안타까워하는 시각은 대체로 전자가 후자에게 밀려난 사건으로 이 장면을 읽는다. 그런 해석에는 분명한 설득력이 있다. 대학이 취업 준비기관으로만 좁아질 때 인문학과 예술, 기초학문, 시민성 교육, 비판적 사고는 뒤로 밀린다. 학생은 배움의 참여자가 아니라 교육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로 바뀌고, 교수와 학생의 관계도 공동 탐구의 관계에서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계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기존 스포트라이트유 기사가 햄프셔의 폐교를 “좋은 교육과 살아남는 교육이 더 이상 같은 의미가 아니게 된 사건”으로 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후속 논쟁은 이 구도가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지적한다. 학생을 형성하는 교육과 졸업 후 삶을 책임 있게 설명하는 교육은 반드시 반대말이 아니다. AEI 글은 다트머스가 진로 설계 센터를 통해 졸업생의 취업과 진학 성과를 제시하는 사례를 언급하며, 이것을 단순한 자격증 장사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학생의 성장과 졸업 후 경로를 함께 설명하는 것은 거래적 교육이 아니라, 형성 교육을 사회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한국 대학에도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취업률을 말하는 순간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취업률만으로 대학을 평가하려는 시각도 강하다. 두 시각 모두 절반만 맞다. 대학은 취업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과 가족이 감당하는 등록금, 생활비, 시간,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대학은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 학생의 성장을 말하려면, 그 성장이 어떻게 역량이 되고, 관계가 되고, 일의 기회가 되고, 사회적 참여가 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좋은 교육은 말로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경로로 증명된다. 어떤 수업을 들었는지,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했는지, 어떤 피드백을 받았는지, 어떤 포트폴리오를 남겼는지, 졸업 후 어떤 길로 나아갔는지, 전공과 무관해 보이는 경험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 이것을 설명하지 못하면 학생과 학부모는 결국 더 익숙한 지표로 돌아간다. 대학 이름, 취업률, 입결, 수도권 여부, 졸업생 연봉 같은 지표가 다시 선택을 지배하게 된다.
높은 비용 앞에서 이상은 더 엄격한 설명을 요구받는다
햄프셔 이후 논쟁에서 가장 불편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대목은 비용이다. 실험적 교육은 소규모 세미나, 긴밀한 교수-학생 관계, 개별화된 학습 설계, 풍부한 피드백을 필요로 한다. 이런 교육은 대량 강의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문제는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하느냐다. AEI 글은 베닝턴과 새라 로런스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한다. 베닝턴의 기금 규모가 윌리엄스에 비해 훨씬 작고, 학비 부담은 매우 높으며, 졸업 후 중위소득 지표가 낮다는 점을 언급한다. 새라 로런스 역시 연간 총비용이 높고, 졸업률과 졸업 후 소득 지표가 가족에게 쉽게 납득될 수준인지 질문받고 있다. 특히 일부 학생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 출신이 아니라 실제 부채와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교육의 가치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논점은 실험교육에 대한 공격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좋은 교육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질문에 가깝다. 대학이 학생에게 높은 비용을 요구한다면, 그 교육이 왜 그만한 비용을 필요로 하는지, 학생이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는지, 졸업 후 어떤 형태의 가능성이 열리는지 설명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교육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아니라, 교육의 공공성과 책임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한국 대학은 미국 사립 인문대학과 비용 구조가 다르지만, 본질적 질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도권 대학에 비해 낮은 브랜드 인지도, 지역대학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학령인구 감소, 등록금 동결, 재정지원사업 의존, 취업 성과 압박이 겹친 상황에서 대학은 더 이상 추상적 가치만으로 학생을 설득하기 어렵다. “우리 대학은 학생을 잘 돌본다”, “우리 교육은 따뜻하다”, “우리 대학은 지역과 함께한다”는 문장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돌봄이 중도탈락을 얼마나 줄였는지, 그 교육이 학생의 진로 탐색을 어떻게 바꿨는지, 지역 연계 경험이 실제 취업과 창업, 정주 가능성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설명해야 한다. 특성화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많은 대학이 특성화를 말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그 특성화가 자신의 시간표와 프로젝트, 교수와의 만남, 현장 경험, 졸업 후 경로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성화가 사업계획서의 언어로만 남아 있으면 학생은 체감하지 못한다. 대학이 좋은 교육을 증명한다는 것은 거창한 성과지표를 내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학생 한 명이 입학해 졸업하기까지 어떤 성장 경로를 경험하는지, 그 경로가 얼마나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지 보여주는 일이다.
한국 대학에 더 필요한 것은 ‘설명 가능한 교육’이다
햄프셔 이후의 질문은 한국 대학의 구조개혁 논의와도 맞닿아 있다. 한국은 이미 학령인구 감소와 지역대학 위기, 사립대학 구조개선 제도화라는 흐름 속에 있다. 기존 기사에서 다뤘듯이 한국의 대학 위기는 단순한 폐교 문제가 아니라 지역 경제, 청년 유출, 도시 쇠퇴, 생활 인프라 약화까지 연결되는 문제다. 대학의 존속 여부는 한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과 국가의 미래 전략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대학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생존 홍보가 아니다. 대학은 자신이 제공하는 교육을 설명 가능한 구조로 바꿔야 한다. 여기서 설명 가능하다는 말은 취업률 하나로 줄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취업률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교육의 가치를 더 정교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지역대학이라면 지역 산업과 연결된 현장 프로젝트가 학생의 역량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줘야 한다. 인문사회계열이라면 비판적 사고와 글쓰기, 조사 역량, 문제 정의 능력이 어떤 직무와 사회적 역할로 연결되는지 설명해야 한다. 예술·문화계열이라면 학생의 작업 포트폴리오가 어떻게 축적되고 외부 평가와 연결되는지 보여줘야 한다. 보건·공학·ICT 계열이라면 자격과 취업만이 아니라 윤리, 협업, 지역 문제 해결 능력을 어떻게 길러내는지 제시해야 한다. 학생지원도 마찬가지다. 장학금 규모나 상담센터 운영 여부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학생이 어떤 시점에 위험 신호를 보이고, 대학은 어떻게 개입하며, 그 결과 중도탈락과 학업 부진, 진로 미결정 문제를 어떻게 줄였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자퇴상담으로는 학생을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은 결국 대학이 학생의 삶을 사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입학부터 졸업까지 학습과 진로, 정서와 생활을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대학의 경쟁력은 “무엇을 가르치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육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좋은 교육은 내부 구성원끼리만 아는 미덕이어서는 안 된다. 학생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학부모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하며, 지역사회와 노동시장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의 이상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 이상은 이제 더 투명한 언어와 더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받고 있다.
성과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성과를 말해야 한다
대학이 성과를 말해야 한다고 하면 곧바로 우려가 뒤따른다. 교육이 숫자로 환원되고, 취업률이 낮은 학문은 주변화되며, 단기 수요에 맞춘 전공만 살아남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이 우려는 타당하다. 실제로 고등교육 정책은 종종 측정하기 쉬운 지표에 과도하게 의존해왔다. 취업률, 충원율, 유지취업률, 연구비, 논문 수, 재정지원사업 선정 실적은 대학의 일부만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성과주의의 한계를 이유로 성과를 말하지 않는 것도 대안이 되기 어렵다. 오히려 대학이 스스로 교육의 성과를 더 풍부하게 정의하지 않으면, 외부는 가장 단순한 지표로 대학을 판단하게 된다. 대학이 인문학의 가치를 설명하지 않으면 인문학은 취업률로만 평가받는다. 대학이 지역교육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면 지역대학은 충원율로만 평가받는다. 대학이 학생 성장의 과정을 설명하지 않으면 학생지원은 예산 항목으로만 보인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성과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의 언어를 다시 만드는 일이다. 대학은 학생을 몇 명 취업시켰는지만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떤 학생을 어떤 방식으로 성장시켰는지 말해야 한다. 어떤 학생이 입학 당시에는 진로를 정하지 못했지만, 수업과 프로젝트, 상담과 현장 경험을 거치며 자신의 방향을 찾았는지 보여줘야 한다. 어떤 지역 문제가 수업 안으로 들어왔고, 학생들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량을 길렀는지 설명해야 한다. 어떤 졸업생이 단순히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갔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전공과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삶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추적해야 한다. 이것은 대학을 기업처럼 만들자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이 기업의 언어에 포획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대학이 스스로 교육의 가치를 설명하지 못하면, 시장은 대학을 더 거칠게 평가한다. 대학이 스스로 학생의 성장을 증명하지 못하면, 사회는 대학을 졸업장 발급기관으로만 본다. 대학이 스스로 지역과 지식, 시민성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면, 구조조정의 언어는 더 쉽게 대학을 정리 대상으로 만든다.

햄프셔 이후, 한국 대학이 붙들어야 할 질문
햄프셔의 문이 닫히는 장면은 실험교육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험교육이 더 이상 낭만적 언어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햄프셔가 제기했던 질문은 여전히 중요하다. 학생은 왜 배워야 하는가. 대학은 지식을 전달하는 곳인가, 사람을 형성하는 곳인가. 교육은 취업을 위한 준비인가, 삶과 세계를 해석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인가. 이 질문들은 결코 낡지 않았다. 다만 이제 또 다른 질문이 더해졌다. 대학은 그 좋은 교육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학생과 가족이 감당하는 비용 앞에서,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현실 앞에서, 지역이 쇠퇴하는 구조 앞에서, 노동시장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 앞에서 대학은 자신의 가치를 어떤 언어로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좋은 교육을 한다”는 말은 출발점일 수는 있지만 결론이 될 수는 없다.
한국 대학은 햄프셔보다 더 복잡한 조건 위에 서 있다. 학령인구 감소는 빠르고, 수도권 집중은 강하며, 학벌 구조는 노동시장과 사회적 지위 체계에 깊게 연결돼 있다. 이 상황에서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 취업과 산업 수요에 응답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학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반대로 대학의 이상만 말하면서 학생의 졸업 후 삶을 외면하는 것도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의 대학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하나는 학생을 성장시키는 교육의 본질을 지키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그 성장이 실제 삶의 기회와 사회적 신뢰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설명하는 일이다. 좋은 교육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교육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 명백한 가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학은 자신의 교육이 왜 좋은지, 누구에게 어떤 변화를 남기는지, 그 변화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햄프셔 이후 남은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대학은 학생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약속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대학은 규모와 전통, 선의와 이상만으로 버티기 어렵다. 반대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대학은 학령인구 감소의 시대에도 단순한 생존을 넘어 새로운 신뢰를 만들 수 있다. 대학의 미래는 좋은 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 좋은 교육을 사회가 알아볼 수 있도록 증명하는 데서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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