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목록이 아니라, 질서 붕괴의 징후를 읽다
세계는 이미 여러 차례 위기를 경험해왔다. 전쟁, 팬데믹, 금융 불안, 기술 충격은 더 이상 낯선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6년을 앞두고 발표된 Eurasia Group의 『Top Risks 2026』 보고서는 기존의 위기 전망과는 분명히 다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 보고서가 던지는 질문은 “무슨 사건이 터질 것인가”가 아니라, “왜 이 세계에서는 위험이 끊임없이 증폭되는가”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번 보고서는 위기를 예측하기보다, 위기가 작동하는 세계의 조건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하는 진단서에 가깝다. 유라시아그룹은 매년 ‘Top Risks’ 보고서를 통해 다음 해를 규정할 정치·정책 리스크를 제시해 왔지만, 2026년판 보고서에서는 특히 하나의 전제가 강하게 드러난다. 국제 질서를 조정하던 장치들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그 결과 위험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상시적인 환경이 되었다는 인식이다. 이 전제 위에서 제시된 것이 바로 ‘Top Risks 10’이다. 이 목록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현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가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들에 가깝다.
Eurasia Group ‘Top Risks 2026’ – Top Risks 10
유라시아그룹은 2026년을 규정할 핵심 리스크로 다음의 10가지를 제시했다. 각각의 항목은 독립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보고서 전반에서는 이 위험들이 서로 연결된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첫 번째 리스크는 US political revolution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나 인물의 부상을 의미하기보다, 미국 정치 체제 전반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에 대한 진단이다. 정치적 양극화, 제도에 대한 불신, 행정부와 의회의 기능 약화는 미국의 국내 문제에 그치지 않고, 통상·안보·외교 정책 전반에 불확실성을 확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미국 정치의 불안정성은 곧 국제 질서의 불안정성으로 직결된다.
두 번째는 Overpowered다. 이 항목은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거나, 견제 장치 없이 행사될 때 발생하는 정치 리스크를 가리킨다. 강력한 행정부, 약화된 제도, 축소된 시민적 통제는 단기적으로는 결단력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책 실패의 비용을 증폭시키는 구조를 만든다. 보고서는 이러한 권력 집중 현상이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세 번째 리스크는 The Donroe Doctrine이다. 이는 특정 지역이나 국가를 지칭하기보다는, 영향권 정치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다. 강대국과 지역 강자들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주변 질서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국제 규범과 다자 협력의 공간을 점점 축소시키고 있다.
네 번째는 Europe under siege다. 유럽은 여전히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중요한 축이지만, 안보 불안, 정치적 분열, 경제 성장 둔화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구조적 압박을 받고 있다. 보고서는 유럽이 단일한 전략적 행위자로 기능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을 주요 리스크로 지적한다.
다섯 번째 리스크는 Russia’s second front다. 이는 러시아가 단일 전선이 아닌 복수의 전략적 압박을 동시에 가할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군사적 충돌뿐 아니라 에너지, 정보, 외교 영역에서의 복합적 행동은 국제 질서의 불확실성을 한층 높인다.
여섯 번째는 State capitalism with American characteristics다. 미국이 전통적으로 강조해온 자유시장 원칙에서 벗어나, 산업 정책과 국가 개입을 강화하는 흐름이 구조적 리스크로 제시된다. 이는 글로벌 통상 질서와 기술 경쟁의 규칙 자체를 바꾸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곱 번째 리스크는 China’s deflation trap이다. 중국 경제의 구조적 둔화와 디플레이션 압력은 중국 내부 문제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수요, 공급망, 금융 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 지적된다.
여덟 번째는 AI eats its users다. 인공지능 기술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로 주목받아 왔지만, 보고서는 AI가 정치, 사회, 정보 환경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기술 발전 속도가 제도와 규범을 앞지르는 상황 자체가 하나의 리스크라는 인식이다.
아홉 번째 리스크는 Zombie USMCA다. 북미 자유무역 질서가 형식적으로는 유지되지만, 실질적인 기능과 신뢰는 약화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는 특정 협정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 통상 질서 전반이 ‘유지되는 척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상태로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한다.
열 번째는 The water weapon이다. 물이라는 기본 자원이 기후 변화와 지정학적 갈등 속에서 전략적 무기로 전환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자원 문제는 환경 이슈를 넘어 정치·안보 리스크로 재구성되고 있다.
이 목록이 보여주는 것은 위기의 다양성만이 아니다. 유라시아그룹이 제시한 10대 리스크는 모두 권력, 제도, 자원, 기술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된 방향을 가리킨다. 이는 2026년의 세계가 단순히 더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흡수하고 조정하던 질서 자체가 약화된 상태로 진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10가지 리스크는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는가
유라시아그룹이 제시한 10대 리스크는 표면적으로는 정치, 경제, 기술, 자원 문제로 흩어져 있다. 그러나 이 목록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개별 위기의 강도가 아니라, 위기가 증폭되는 조건에 있다. 보고서는 특정 사건이 세계를 흔들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흡수하고 조정할 장치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환경에 주목한다. 미국 정치의 구조적 변화는 국제 질서의 핵심 축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권력 집중과 제도 약화는 정책 실패의 비용을 키운다. 지역 질서는 전면 충돌을 피하는 대신 상시적인 불안정 상태로 유지되며, 경제와 자원, 기술은 더 이상 중립적인 영역이 아니라 전략적 도구로 활용된다. 여기에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은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정보 환경과 정치적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이 모든 요소는 서로를 강화하며 작동하고, 그 결과 위험은 특정 시점에 폭발하는 사건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환경이 된다. 이 점에서 ‘Top Risks 10’은 10개의 예측이 아니라 하나의 진단이다. 세계가 더 위험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위험을 관리하던 질서가 더 이상 전제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리스크들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메시지다.
위기는 왜 더 이상 ‘대응의 대상’이 아닌가
보고서가 암묵적으로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은 정책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과거에는 위기가 발생하면 정책이 이를 수습하고, 제도는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그러나 지금의 환경에서는 정책과 제도 자체가 위기를 전제로 설계되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단기 정치와 장기 전략의 충돌, 국내 정치의 국제화, 협력 비용의 급격한 상승은 정책 대응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든다. 이로 인해 위기는 더 이상 ‘발생 이후 대응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정책 결정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조건이 된다. 정부와 제도는 위기를 제거하기보다, 위기 속에서 어떻게 손실을 관리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단계로 밀려난다. 유라시아그룹의 보고서는 이 점을 직접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지만, 10대 리스크의 구성과 설명 방식은 분명히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Top Risks 2026』이 요구하는 것은 불안을 과장하거나 공포를 증폭시키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 보고서는 기존의 관점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무엇이 위험한지를 묻기보다, 왜 위험이 상시화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가정, 질서가 복원될 것이라는 기대, 협력이 기본값이라는 믿음은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환은 단지 외교·안보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 정책, 산업 전략, 기술 규제, 연구 협력과 인재 이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정책 영역이 이 새로운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2026년의 리스크는 그래서 특정 국가나 특정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로 제시된다. 유라시아그룹이 제시한 2026년 Top Risks 10은 위기의 목록이라기보다, 관리되지 않는 세계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이 리스크들은 각각의 사건을 예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떤 조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배열돼 있다. 위기가 반복되는 이유는 세계가 더 취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취약함을 흡수하던 구조가 약화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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