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연구진이 우리나라 자생 약용식물인 광대싸리에서 항암 효과로 알려진 알칼로이드 ‘세큐리닌(securinine)’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처음으로 규명했다. 1956년 물질이 발견된 이후 70년간 밝혀지지 않았던 생합성 경로를 분자 수준에서 해명한 성과로, 천연물 기반 신약 개발과 합성생물학적 대량 생산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광대싸리는 한반도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약재로 사용돼 왔다. 이 식물에는 세큐리닌을 포함한 130종 이상의 세큐리네가 알칼로이드가 존재하며, 일부는 항암 효과나 신경 재생 관련 효능을 보이는 것으로 보고돼 왔다. 그러나 이들 물질이 식물 안에서 어떤 효소와 중간 단계를 거쳐 만들어지는지는 오랫동안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었다. 알칼로이드는 구조가 복잡하고 반응 경로가 다양해 생합성 연구가 특히 어려운 물질군이다. 모르핀, 카페인, 니코틴처럼 의약학적으로 중요한 천연물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하지만, 생성 메커니즘이 규명되지 않으면 안정적 생산과 응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 연구는 생명과학과 화학의 장기적 협업에서 출발했다. 식물 유전체와 단일세포 전사체 분석에 강점을 가진 생명과학과 김상규 교수 연구팀과, 세큐리닌 계열 물질의 화학적 합성을 연구해 온 화학과 한순규 교수 연구팀이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진은 성남시 불곡산 일대의 KAIST 생태림에서 광대싸리 시료를 확보하고, 세큐리닌 생성이 활발한 잎 조직을 중심으로 단일세포 전사체 분석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어떤 세포에서 어떤 유전자가 활성화되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했다. 동시에 화학적 가설을 바탕으로 세큐리닌 생성 직전 단계의 전구체인 ‘비로신 B’를 특정하고, 실험실에서 이를 직접 합성해 반응 과정을 검증했다.
연구 결과, 광대싸리 내 황산전이효소가 비로신 B를 항암 물질 세큐리닌으로 전환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효소는 단순히 화학 작용기를 부착하는 보조 인자가 아니라, 알칼로이드 분자 골격 자체를 재배열하는 데 관여한다는 점에서 기존 인식을 뒤집는 발견으로 평가된다.
특히 단일세포 분석 결과, 세큐리닌 생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이 광대싸리 잎의 특정 관다발 세포군에서 집중적으로 발현된다는 점도 확인됐다. 이는 약효 성분의 생합성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세포 환경에서 체계적으로 조율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도자료에 첨부된 생합성 경로 모식도(8쪽)는 이러한 과정을 단계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이번 성과의 의미는 규명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세큐리닌 계열 물질은 광대싸리에서 직접 추출하는 방식에 의존해 왔고, 이는 공급 안정성과 생태 훼손 측면에서 한계를 지녔다. 연구진이 밝혀낸 생합성 유전자와 효소를 미생물이나 세포 기반 합성생물학 플랫폼에 도입할 경우, 항암 물질을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김상규 교수와 한순규 교수는 “이번 연구는 우리나라 자생 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고부가가치 천연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분자 수준에서 규명한 것”이라며 “향후 신약 개발뿐 아니라, 다양한 천연물 연구로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게재됐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 농촌진흥청, KAIST 생태연구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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