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달러 AI 학위가 등장하기 전, 고등교육의 오래된 약속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대학의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
대학은 오랫동안 미래를 위한 가장 안정적인 선택으로 여겨졌다. 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더 넓은 사회적 기회를 얻기 위해, 개인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대학 진학은 거의 당연한 경로로 받아들여졌다. 대학 졸업장은 단순히 교육과정을 마쳤다는 증명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정한 지적 능력과 성실성, 사회적 적응력과 직업적 가능성을 동시에 압축해 보여주는 신호였다.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어떤 전공을 했는지, 어떤 학위를 받았는지는 개인의 미래를 설명하는 중요한 언어였다. 그러나 그 언어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 대학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 미래가 보장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졌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전공과 무관한 직무로 이동하거나, 학위가 필요하지 않은 일자리에 머무르는 졸업생들이 늘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는 대학이 여전히 필요한지 묻는 것을 넘어, 그 비용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 따지기 시작했다. 기업은 학위보다 실제 수행 능력을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려 한다. 사회는 대학이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증명하며, 어떤 사람을 길러내는지 다시 묻고 있다.
최근 살 칸, TED, ETS가 결합한 Khan TED Institute, KTI의 등장은 이런 질문을 전면에 끌어올렸다. KTI는 총 1만 달러 미만의 AI 중심 학사 학위를 구상하며, 학점과 수업 시간보다 실제 역량을 중심에 두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 시도는 고등교육 시장에서 하나의 새로운 프로그램이 등장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모델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다. KTI가 대학의 위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흔들리고 있던 대학의 신뢰 구조가 KTI 같은 실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이 시리즈의 첫 질문은 KTI가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 질문은 2부에서 다룰 문제다. 1부에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왜 대학 학위의 권위가 약해졌는가, 왜 시간과 학점을 기준으로 한 고등교육 모델이 충분하지 않게 되었는가, 왜 학생과 기업은 대학 이름보다 역량의 증거를 요구하게 되었는가이다. 새로운 학위 모델의 등장은 결과다. 그 결과를 낳은 원인은 대학 내부와 외부에서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다.
한때 학위는 미래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신호였다
대학 학위가 오랫동안 강력한 힘을 가졌던 이유는 분명하다. 학위는 개인의 능력을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사회가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신호였다. 기업은 모든 지원자의 지적 능력과 성실성, 협업 능력과 문제 해결력을 일일이 검증하기 어렵다. 이때 대학은 선별과 교육, 인증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특정 대학에 들어가고, 정해진 교육과정을 마치고, 졸업 요건을 충족했다는 사실은 노동시장에 일정한 신뢰를 제공했다.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도 학위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당장 큰 비용과 시간을 들이더라도, 졸업 이후 더 안정적인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대학 교육은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이동의 통로였다. 특히 중산층에게 대학은 자녀 세대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신호는 신뢰를 전제로 작동한다. 학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회가 공통으로 믿을 때, 학위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반대로 학위가 실제 능력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는다고 인식되면 그 힘은 약해진다. 오늘날 대학이 마주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학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학위가 설명해야 할 내용이 훨씬 더 복잡해졌고, 기존 방식만으로는 그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등교육 관련 분석 자료는 미국 사회에서 대학 교육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지난 10년 동안 눈에 띄게 낮아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고등교육의 가치에 확신을 가진 미국인의 비율은 10년 전 57%에서 36%로 떨어졌고, 졸업생의 52%가 졸업 후 1년 안에 전공과 무관하거나 학위가 필요하지 않은 직종에 종사하는 저고용 상태에 놓인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이 수치는 대학에 대한 회의가 단순한 정서가 아니라 실제 진로 성과와 연결된 문제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수치만으로 대학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대학 교육은 여전히 개인의 사고력과 세계 이해, 전문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대학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과, 대학 학위가 과거처럼 충분한 신뢰를 제공한다는 말은 다르다. 오늘날의 위기는 대학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자신의 필요성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데 있다.
‘대학을 나오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충분한 답이 아니다
오랫동안 대학 진학은 질문보다 답에 가까웠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해답이었다.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는 이후의 문제였고, 우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미래의 가능성을 넓히는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학생과 가족은 대학에 갈 것인지뿐 아니라, 어떤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 어떤 전공이 어떤 역량으로 이어지는지, 졸업 이후 어떤 직업 세계와 연결되는지를 묻는다. 대학 진학이 여전히 중요한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이유는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막연한 기대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비용과 시간이 너무 커졌다. 이 변화는 특히 고비용 고등교육 체제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학위 취득에는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 기회비용, 진로 지연, 부채 부담이 함께 따라온다. 4년 동안 대학에 다니는 동안 학생은 다른 경로로 일하거나 경험을 쌓을 기회를 포기한다. 졸업 후 높은 소득과 안정적 경력이 보장된다면 이 투자는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 보상이 불확실해질수록 대학은 더 어려운 질문을 받게 된다.
“왜 대학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대학을 공격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이 다시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마주해야 할 질문이다. 대학이 직업훈련기관만은 아니라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대학은 자신이 제공하는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깊이 있는 지식, 비판적 사고, 사회적 성숙, 연구 경험, 네트워크, 진로 가능성 중 무엇을 어떻게 제공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학위의 권위가 약해진 시대에는 전통만으로 설득할 수 없다.
시간 기반 학위 체제의 오래된 한계
오늘날 대학 교육의 기본 구조는 여전히 시간과 학점에 기반을 둔다. 학생은 정해진 기간 동안 수업을 듣고, 일정한 과제를 수행하고, 시험을 통과하며, 필요한 학점을 채우면 졸업한다. 이 방식은 매우 익숙하다. 대학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기업, 정부 모두 학점과 이수 시간을 교육의 기본 언어로 사용해 왔다. 이 구조의 뿌리에는 카네기 단위로 대표되는 시간 기반 교육 체제가 있다. 본래 이 방식은 산업화 시대에 교육의 표준화를 가능하게 한 장치였다. 학생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수업에 참여했는지, 어느 정도의 학습량을 이수했는지를 제도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했고, 학교와 대학 간 교육과정 비교를 가능하게 했다. 대량 교육을 운영하고, 학위의 최소 요건을 설정하는 데에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학습의 조건일 수는 있어도 학습의 결과 자체는 아니다. 같은 시간을 수업에 참여했다고 해서 같은 수준의 이해와 역량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3학점 과목을 이수한 두 학생도 실제 수행 능력은 크게 다를 수 있다. 한 학생은 배운 내용을 실제 문제 해결에 적용할 수 있지만, 다른 학생은 시험을 통과하는 수준에 머물 수 있다. 그럼에도 두 학생의 성적표에는 같은 과목명과 같은 학점이 남는다.
이것이 시간 기반 학위 체제의 핵심 한계다. 이 체제는 학생이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보다, 어떤 과정을 얼마나 이수했는가를 더 쉽게 기록한다. 수업에 참여한 시간, 제출한 과제, 시험 점수는 측정할 수 있지만, 실제 역량의 깊이와 맥락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학위는 교육 경험의 총량을 보여주지만, 그 경험이 어떤 능력으로 전환되었는지는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산업화 시대에는 이 한계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직무 변화가 상대적으로 느렸고, 대학이 제공하는 일반적 지식과 사회적 선별 기능만으로도 노동시장은 어느 정도 작동했다. 그러나 기술 변화가 빨라지고, 직무가 세분화되며, 기업이 더 구체적인 역량을 요구하는 시대에는 학점과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학이 “학생이 얼마나 배웠는가”를 넘어 “학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적표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숨기는가
대학 성적표는 한 학생의 학습 이력을 압축해 보여준다. 어떤 과목을 들었고, 몇 학점을 취득했으며, 어떤 등급을 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보는 행정적으로 유용하고, 일정한 비교 기준을 제공한다. 그러나 성적표가 학생의 실제 역량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글쓰기 과목에서 A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설득력 있는 정책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지, 팀 프로젝트 과목을 이수한 학생이 갈등 상황에서 협업을 조정할 수 있는지, 데이터 분석 수업을 들은 학생이 현실의 불완전한 데이터를 정리하고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는 성적표만으로 알기 어렵다. 과목명과 등급은 출발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실제 수행 능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기업이 학위보다 포트폴리오, 프로젝트 경험, 인턴십, 직무 테스트, 기술 인증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위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학위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AI와 데이터, 디지털 기술이 결합된 직무에서는 실제 도구를 다룰 수 있는지, 새로운 문제에 적응할 수 있는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ETS가 KTI 논의에서 평가와 역량 인증의 역할을 맡는 것도 이런 흐름과 연결된다. 기존의 입학시험 중심 평가에서 벗어나, 고등교육 이후의 직업 준비도와 실제 역량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학위와 성적표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영역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이다. Inside Higher Ed 기사에서도 ETS는 FutureNAV와 같은 역량 평가 플랫폼을 통해 학생들이 보유한 기술과 소프트 스킬을 고용주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성적표를 구상하고 있다.
이 변화는 대학에 중요한 압력을 준다. 대학은 더 이상 학생을 졸업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학생이 졸업 시점에 어떤 역량을 갖추었는지, 그 역량을 어떤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지, 사회와 노동시장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까지 설명해야 한다. 성적표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성적표만으로 충분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학위 비용의 상승은 신뢰 위기를 키웠다
대학 교육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 커진 데에는 비용 문제가 결정적이다. 교육이 비싸질수록 사람들은 그 교육이 제공하는 가치를 더 엄격하게 묻는다. 학위가 여전히 의미 있다 하더라도, 그 학위를 얻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비용이 지나치게 커지면 판단은 달라진다. 미국 고등교육에서는 이 문제가 오래전부터 사회적 쟁점이었다. 주요 대학의 등록금과 생활비는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많은 학생들은 학위를 얻기 위해 상당한 부채를 부담한다. 학위가 안정적 직업과 소득 상승으로 이어진다면 이런 비용은 투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졸업 이후의 결과가 불확실해지고, 저고용 문제가 커지며, 전공과 일자리의 연결이 약해질수록 학위의 투자 대비 수익은 의문에 놓인다.
KTI가 총 1만 달러 미만의 AI 학위를 내세웠다는 점이 주목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낮은 가격 자체가 교육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높은 비용의 전통 대학 모델이 충분한 설명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저비용 대안은 강한 메시지를 갖는다. KTI는 단지 싸기 때문에 주목받은 것이 아니라, 기존 대학이 요구해온 비용의 정당성을 다시 묻게 만들기 때문에 주목받았다. 비용의 문제는 단순히 등록금 비교로 끝나지 않는다. 대학 교육에는 시간이라는 비용도 포함된다. 4년이라는 기간은 청년기 전체의 중요한 시간을 차지한다. 성인 학습자나 커리어 전환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시간이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미 직장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동일한 4년 과정을 요구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고정된 학위 기간은 지나치게 느릴 수 있다.
따라서 고등교육의 비용 논쟁은 “비싸다”는 불만을 넘어선다. 그것은 “왜 이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한가”라는 구조적 질문이다. 대학이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더 저렴하고 빠르며 직무와 직접 연결된 대안들이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은 학위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대학의 위기를 대학 내부만의 문제로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더 큰 변화는 대학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 노동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특히 AI의 확산은 직무와 기술의 수명을 짧게 만들고 있다. 과거에는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이 졸업 후 상당 기간 유효했다. 그러나 지금은 특정 기술이 몇 년 사이에 기본 역량이 되거나, 새로운 도구에 의해 빠르게 대체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대학 커리큘럼은 빠르게 바뀌기 어렵다. 새로운 전공이나 과목을 만들려면 교수진, 학과 구조, 심의 절차, 인증 기준, 예산과 시설이 필요하다. 교육과정은 안정성과 검증을 중시한다. 이 점은 대학의 장점이기도 하다. 대학은 일시적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지식의 구조와 학문적 엄밀성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기술 변화가 매우 빠른 분야에서는 이 안정성이 곧 지연으로 나타날 수 있다.
AI 분야가 대표적이다. 도구와 모델, 활용 방식이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4년 전 설계한 교육과정이 졸업 시점에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고등교육 관련 분석 자료도 AI의 발전이 특정 기술의 유효 기간을 단축시키고 있으며, 전통적인 4년제 커리큘럼은 설계부터 졸업까지 시차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 시차는 대학에 어려운 과제를 안긴다. 대학은 변화하는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반영해야 하는가. 기초 학문과 장기적 사고력을 가르치는 역할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당장 기업이 원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과, 학생이 장기적으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대학은 노동시장과 점점 더 멀어질 수 있다.

AI의 등장은 대학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던지지 않는다. AI는 대학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던진다. 생성형 AI는 지식 접근과 생산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 학생은 더 이상 정보를 찾기 위해 오래 검색할 필요가 없고, 기본적인 초안 작성이나 코드 작성, 요약과 번역, 문제 풀이의 일부를 AI와 함께 수행할 수 있다. 이 변화는 단순히 부정행위 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AI는 학습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지식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능력이 중요한 평가 대상이었다. 그러나 AI가 정보를 빠르게 제시하는 시대에는 무엇을 물을지, 어떤 답이 타당한지, 맥락에 맞게 어떻게 수정할지, 윤리적 문제는 없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지식의 보유보다 지식의 사용과 판단이 교육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이 경우 대학 교육은 강의 전달과 시험 재현을 넘어야 한다. 학생이 AI를 활용해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팀과 협력해 의미 있는 산출물을 만드는 과정을 평가해야 한다. 이는 기존 학점 체계와 시험 중심 평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수행 평가, 동료 평가, 현장 문제 해결 경험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AI는 또한 개인 맞춤형 학습의 가능성을 넓힌다. 학생마다 이해 수준과 속도가 다르다면, AI 튜터는 각자의 수준에 맞는 설명과 연습을 제공할 수 있다. 반복 학습과 즉각적 피드백은 AI가 강점을 보이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교수는 단순 지식 전달자에서 학습 경험의 설계자, 비판적 사고의 코치, 윤리적 판단의 안내자로 이동해야 한다. 이 변화는 대학에 위협이자 기회다. 대학이 AI를 단순히 기존 강의의 보조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변화의 폭은 제한적일 것이다. 반대로 AI를 계기로 교육과 평가, 학생 지원, 교수 역할을 다시 설계한다면 대학은 오히려 더 깊은 교육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역량 기반 교육은 ‘학위 이후’를 준비하는 언어다
역량 기반 교육은 이런 변화 속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역량 기반 교육의 핵심은 학생이 일정 시간을 채웠는지가 아니라, 특정 역량을 실제로 입증했는지를 기준으로 학습을 진행하는 것이다. 학생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은 빠르게 통과하고, 부족한 부분은 더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 교육의 중심이 공급자의 시간표에서 학습자의 숙달 수준으로 이동한다.
이 방식은 새로운 발명품이 아니다. 역량 기반 교육은 1960년대 교사 교육의 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등장했고, 이후 여러 차례 제도적 실험을 거쳤다. 1999년 서부 주지사 대학이 역량 기반 학위 수여 권한을 인정받으면서 고등교육 안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고, 이후 연방 재정 지원과 연결되며 제도적 기반을 넓혔다. 역량 기반 교육이 다시 중요해진 이유는 노동시장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기업은 학습자가 어떤 과목을 들었는지보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학습자는 긴 시간과 높은 비용을 감수하기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역량을 빠르게 확보하고 싶어 한다. 대학은 학위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학생의 실제 성장을 더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물론 역량 기반 교육에도 위험은 있다. 모든 교육을 측정 가능한 기술 목록으로 환원할 경우, 대학 교육의 깊이와 공공성이 약화될 수 있다. 철학적 사유, 시민적 판단, 역사적 이해, 윤리적 성찰, 예술적 감수성은 단순한 직무 기술과 다르다. 따라서 역량 기반 교육은 대학 교육을 직업훈련으로 축소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대학이 길러야 할 고차원적 역량을 더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것을 실제 학습 경험과 연결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대학의 이름 자체가 중요한 신뢰의 근거였다. 특정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능력을 대신 설명했다. 물론 지금도 대학 브랜드는 강력하다. 최상위 대학의 학위는 여전히 큰 사회적 신호로 작동한다. 그러나 전체 고등교육 시장에서 보면 기관의 이름만으로 충분한 시대는 약해지고 있다. 신뢰의 중심은 점차 학습의 증거로 이동하고 있다. 학생이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했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 어떤 기술을 다룰 수 있는지, 어떤 협업 경험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지가 중요해진다. 학위는 여전히 필요할 수 있지만, 학위는 더 많은 증거와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KTI와 연결된 스킬프린트 논의는 이 변화의 상징이다. 기존 성적표가 과목과 등급을 보여주었다면, 스킬프린트는 학습자의 실제 역량과 수행 경험을 더 세밀하게 보여주려 한다. ETS가 학생의 기술뿐 아니라 의사소통, 협업, 회복탄력성 같은 소프트 스킬까지 측정하려는 것도 학습의 증거를 더 구체화하려는 시도다. 이 변화가 확산되면 대학은 학생의 성장을 더 투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우리 대학을 졸업했다”는 말만으로는 충분 하지 않다. “우리 대학에서 학생은 이런 문제를 다루었고, 이런 역량을 입증했으며, 이런 방식으로 사회와 연결되었다”는 설명이 필요하다. 대학은 더 이상 권위의 기관으로만 남을 수 없다. 신뢰의 근거를 계속 생산해야 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대학의 중간지대가 가장 먼저 압박을 받는다
고등교육의 변화는 모든 대학에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장 강한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큰 곳은 중간지대에 있는 대학들이다. 최상위 대학은 강력한 브랜드와 동문 네트워크, 연구 역량, 선별 효과를 바탕으로 상당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매우 저렴하고 빠른 온라인 교육과 직무 인증 프로그램은 특정 수요를 선명하게 겨냥하며 성장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사이에 있는 많은 대학이다. 이들은 비용은 낮지 않지만, 최상위 대학만큼 강한 브랜드와 네트워크를 갖고 있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인 4년제 학위 모델을 유지하지만, 학생과 기업에게 그 학위가 어떤 차별적 가치를 제공하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이 경우 학생들은 더 저렴한 대안이나 더 강한 브랜드를 가진 대학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하게 된다.
Inside Higher Ed 기사에서도 KTI가 단순히 또 하나의 AI 학위를 내놓는 데 그친다면 이미 인증을 받은 여러 대학의 AI 프로그램과 경쟁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차별화된 학습자 집단과 명확한 시장 필요를 정의하지 못하면 같은 경쟁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KTI뿐 아니라 전통 대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학은 누구를 위한 교육기관인지, 어떤 학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 어떤 산업과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모든 대학이 모든 학생에게 같은 방식의 학위를 제공하던 시대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대학의 생존은 규모가 아니라 역할의 선명성에 달려 있을 수 있다.
대학에 대한 비판이 커질수록 대학은 실용성을 요구받는다. 학생은 취업 가능성을 묻고, 기업은 직무 역량을 묻고, 사회는 비용 대비 성과를 묻는다. 이 요구는 정당하다. 대학이 학생의 삶과 노동시장 현실을 외면한 채 추상적 가치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학이 시장 요구에만 맞춰진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대학은 단순히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빠르게 공급하는 기관이 아니다. 대학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공적 문제를 숙고하며, 기술의 윤리적·사회적 영향을 따져볼 수 있는 시민을 길러야 한다. 특히 AI 시대에는 이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KTI에 대한 비판 중 하나도 이 지점에 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맥킨지 등 기업들이 교육과정 설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경우, 교육의 목적이 기업의 요구에 맞는 인력 양성으로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다. Inside Higher Ed 기사에서는 이런 기업 파트너십이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소개된다. 대학의 미래는 시장성과 공공성을 어떻게 함께 붙잡느냐에 달려 있다. 취업 가능성을 높이는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취업 가능성만으로 대학의 존재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대학은 학생이 노동시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그 노동시장과 기술 사회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KTI와 미국 고등교육 논의는 한국 대학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은 미국과 제도와 비용 구조가 다르지만, 대학이 직면한 근본 질문은 유사하다. 학령인구 감소, 지역대학 위기, 전공과 직업의 불일치, 청년 취업난, AI 교육 전환, 성인 학습 수요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한국 대학은 오랫동안 입시와 학위, 대학 서열을 중심으로 작동해 왔다. 대학 이름은 개인의 사회적 가능성을 설명하는 강력한 신호였고, 학생들은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긴 시간을 준비했다. 그러나 학령인구가 줄고, 산업 구조가 빠르게 바뀌며, 청년의 진로 경로가 다양해지면 이 신호 체계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역대학은 더 직접적인 압박을 받는다. 학생 수 감소는 대학 운영의 기반을 흔들고, 수도권 집중은 지역대학의 선택지를 좁힌다. 이 상황에서 지역대학이 기존의 학과 중심, 강의 중심, 학위 중심 모델만 유지한다면 설득력이 약해질 수 있다. 지역사회와 산업, 성인 학습자와 재교육, AI와 디지털 전환을 결합한 새로운 역할 정의가 필요하다.
한국 대학이 KTI 모델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대학은 공공성과 지역 균형, 정부 정책과 법제, 등록금 규제, 학문 생태계의 구조가 다르다. 그러나 KTI가 던지는 질문은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대학은 학생에게 어떤 역량을 길러주는가. 그 역량은 어떻게 확인되는가. 학위는 어떤 사회적 신뢰를 제공하는가. 대학은 AI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다시 설계할 것인가.
대학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단순한 종말론이다. 대학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연구와 전문직 양성, 공적 지식 생산, 청년기의 사회적 경험, 지역사회와의 연결, 민주사회의 시민 교육은 여전히 대학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기능이다. AI와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했다고 해서 이 모든 기능이 곧바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대학이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은 더 강한 설명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학생과 사회가 더 이상 대학의 가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대학은 자신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학위의 권위가 약해질수록 대학은 교육의 실제 성과와 공공적 가치를 더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KTI 같은 모델은 대학에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왜 학위는 4년이어야 하는가. 왜 학점은 역량을 대신하는가. 왜 기업은 대학 졸업장을 그대로 신뢰해야 하는가. 왜 학생은 자신의 역량을 더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가. 왜 교육은 더 저렴하고 유연해질 수 없는가. 이 질문들이 모두 정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은 이 질문들을 피하기 어렵다. 대학은 이제 과거의 권위가 아니라 현재의 설득력으로 평가받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어떤 학생을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그 성장이 어떤 증거로 남는지, 사회가 왜 그 대학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 이 설명을 해낼 수 있다면 위기는 재정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학위의 형식은 남아도 신뢰의 내용은 약해질 수 있다.
새로운 모델의 등장은 대학을 향한 질문이다
KTI의 등장은 앞으로 더 많은 논쟁을 낳을 것이다. 이 학위가 실제로 인증을 받을 수 있을지, 기업이 인정할지, 학생들이 신뢰할지, 교육의 깊이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과 유명 기관의 결합만으로 학위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KTI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실험이다. 그럼에도 KTI가 중요한 이유는 그 자체의 성공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KTI는 대학이 이미 받고 있던 질문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학위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 교육과 평가를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AI 시대의 직무 변화에 대학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기업과 대학의 관계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학생의 역량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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