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생대학의 실험 – 시험 없는 대학은 가능한가

HERA 이후 10년, New HEIs가 재설계한 대학 모델과 규제의 벽

영국 고등교육 체계에 균열이 생긴 것은 2017년 「고등교육 및 연구법(Higher Education and Research Act, HERA)」이 통과되면서부터였다. 이 법은 기존 대학 중심 구조에 새로운 진입 경로를 열어주겠다는 취지로 설계되었다. 일정 요건을 갖춘 기관이라면 대학과 유사한 고등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궁극적으로는 학위수여권(Degree Awarding Powers)을 신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법의 목표는 명확했다. 공급자 다양화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고, 학생 선택권을 확대하며, 고등교육의 혁신을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도적 변화 속에서 등장한 기관들이 이른바 ‘신생 고등교육기관(New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New HEIs)’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대학과 달리 오랜 역사나 대규모 캠퍼스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일부는 직업교육 중심의 추가교육기관(Further Education College)에서 출발했고, 일부는 공연예술학교나 비즈니스 특화 기관에서 확장되었다. 설립된 지 5~10년 남짓한 이 기관들은 처음부터 기존 대학 모델을 모방하기보다,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출발했다. 대학이라는 제도의 외형을 답습하기보다, 학위 교육의 내용과 전달 방식을 재설계하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이들이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수업과 평가 방식이었다. 전통적인 대규모 강의와 기말시험 중심 평가를 최소화하고, 블록 단위 집중 수업과 프로젝트 기반 학습을 도입했다. 학생들은 일정 기간 하나의 과목에 집중하고, 시험 대신 포트폴리오, 발표, 산업체 과제 수행 결과물로 평가를 받는다. 강의실은 일방향 전달 공간이 아니라 토론과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소규모 코호트 운영을 통해 교수와 학생 간의 접촉 밀도를 높이고, 개인화된 피드백을 제공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이러한 모델은 단순한 교수법 변화라기보다, 대학 교육의 목표를 ‘지식 축적’에서 ‘직무 준비도와 적용 능력’으로 이동시키는 방향 전환에 가깝다. 이 실험은 학생들에게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험 부담이 적고, 수업이 직무 환경과 유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 차별점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이 모델은 기존 대학 체계가 오랜 시간 유지해온 구조와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학위는 어떤 과정을 통해 부여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신생 기관들의 등장은 단순한 공급자 증가가 아니라, 대학의 정의를 둘러싼 구조적 논쟁을 촉발하는 사건에 가깝다.

혁신을 허용한 법, 혁신을 제약하는 규제

문제는 제도적 장치가 실제 운영 단계에서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HERA는 새로운 공급자의 진입을 허용했지만, 실제 등록과 학위수여권 확보 과정은 장기간의 심사와 복잡한 규제 절차를 요구한다. 감독 기관인 영국 학생청(Office for Students, OfS)에 등록하기까지 수년이 소요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신생 기관들은 반복적인 자료 보완 요구와 엄격한 기준 해석 속에서 초기 비전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특히 상징적인 장벽은 용어 사용 제한 문제다. 일부 기관은 정식 지위를 확보하기 전까지 ‘degree’, ‘module’, ‘university’와 같은 기본 용어를 사용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이는 교육 내용 자체보다 ‘대학’이라는 명칭이 강력한 제도적 보호 대상임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혁신적 모델을 설계하면서도, 외부에는 기존 체계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중적 상황에 놓인다. 다양성을 촉진하겠다는 법의 취지와, 기존 모델을 기준으로 품질을 심사하는 규제 체계 사이에 구조적 긴장이 형성되는 지점이다. 이 대목에서 질문은 단순해진다. 규제는 품질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인가, 아니면 기존 대학 모델을 표준으로 고정하는 장치인가. 신생 고등교육기관의 실험은 교육 방법의 혁신을 넘어, 국가가 정의한 ‘대학’의 기준이 어디까지 유연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과정이 되고 있다.

신생 고등교육기관이 직면한 또 하나의 장벽은 재정 구조다. 영국 고등교육 전반이 재정 압박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와 브랜드를 갖지 못한 기관은 더욱 취약하다. 등록금은 전통 대학과 유사한 수준이지만, 국제학생 유치나 기부금, 연구비 수입과 같은 다변화된 재원 기반은 아직 충분히 구축되지 않았다. 운영 초기 단계에서 필요한 시설 투자와 인력 확보 비용은 상대적으로 높고, 학생 모집 규모는 제한적이다. 소규모·개인화 모델이 차별성이자 장점이지만, 동시에 규모의 경제를 만들기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브랜드 신뢰 역시 핵심 변수다. 대학 선택은 단순한 교육 서비스 구매가 아니라 장기적 경력 투자에 가깝다. 오랜 역사와 동문 네트워크를 보유한 전통 대학과 달리,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관은 졸업생의 노동시장 성과로 신뢰를 입증해야 한다. 첫 졸업생들이 어떤 진로를 밟는지, 학위가 고용주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기관의 존속 가능성을 좌우한다. 학생 입장에서는 개인화된 교육 경험이라는 이점과, 제도적 안정성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선택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을 낳는다. 혁신적 모델을 유지하려면 소규모 운영이 필요하지만, 재정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규모 확대가 요구된다. 학생 수가 늘어날수록 개인화 강점은 희석될 수 있고, 비용 압박은 교육 설계에 타협을 요구한다. 신생 기관이 성장하는 순간, 처음의 실험 정신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가가 또 다른 시험대가 된다.

대체인가, 재정의인가 – 전통 대학에 던지는 질문

그렇다고 해서 이 모델이 전통 대학을 대체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신생 고등교육기관은 기존 체계를 흔드는 외부 경쟁자라기보다, 내부 변화를 촉발하는 자극에 가깝다. 블록 수업, 프로젝트 기반 평가, 산업 연계 강화와 같은 요소는 이미 일부 전통 대학에서도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다만 차이는 정도와 일관성에 있다. 신생 기관은 처음부터 해당 구조를 중심에 두고 설계되었고, 전통 대학은 기존 틀 안에서 부분적 조정을 시도하는 형태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이라는 제도의 본질이다. 대학은 특정 교수법이나 캠퍼스 규모로 정의되는가, 아니면 학위 수여 권한과 제도적 인정으로 규정되는가. HERA 이후 10년간의 실험은 이 질문을 구체적인 사례로 드러내고 있다. 신생 기관들은 교육 설계를 통해 대학의 모습을 바꾸려 하고, 규제 체계는 제도적 기준을 통해 대학의 범위를 관리한다. 두 축 사이의 긴장은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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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영국 신생 고등교육기관의 등장은 단순한 정책 변화의 결과가 아니다. 이는 대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도 차원에서 다시 꺼내든 사건이다. 시험을 줄이고, 수업을 직무 환경에 가깝게 재설계하며, 학생과 교수 간 거리를 좁히는 모델은 분명 기존 구조와 다른 선택지를 제시한다. 동시에 규제, 재정, 브랜드 신뢰라는 세 요소가 결합된 환경 속에서 생존 가능성을 시험받고 있다. 이 실험의 성패는 단기간에 판가름 나지 않을 것이다. 졸업생의 노동시장 성과, 학생 만족도, 재정 지속 가능성, 그리고 규제 환경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HERA 이후 등장한 신생 고등교육기관이 영국 고등교육에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대학은 전통의 축적을 통해 유지되는 제도인가, 아니면 시대 변화에 맞춰 설계될 수 있는 모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대학의 형식이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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