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성격검사(SPQ) 기반 생물심리학적 분석 통해 정신·신체적 증상 구조 규명… 맞춤형 치료 가능성 제시
그동안 한국의 고유 정서인 ‘한(恨)’과 사회적 억압 문화가 만들어낸 상징적 질환으로 여겨졌던 ‘화병(Hwabyung)’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다시 정의됐다. 부산대학교(총장 최재원) 한의학전문대학원 채한 교수 연구팀이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강동한방병원 김종우 교수팀, 경성대학교 심리학과 이수진 교수팀과 공동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화병의 정신병리적 임상 특징을 규명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논문은 국제학술지 BioPsychoSocial Medicine(Springer Nature, SSCI 등재) 10월 30일자 온라인판에 게재되었다. 논문명은 “Biopsychological pattern underlying the psychosomatic symptoms of patients with Hwabyung from a universal perspective”(DOI: 10.1186/s13030-025-00340-0)이다.
‘화병’은 오랜 기간 누적된 스트레스와 감정 억압이 몸속의 ‘열’로 전환되는 심신질환으로, 분노·불면·우울·가슴 답답함·두통·호흡곤란 등 다양한 정신·신체 증상을 동반한다. 그동안 문화적 특수성 탓에 객관적 진단 기준이 부재했지만, 이번 연구는 화병의 생물심리학적 패턴을 데이터로 규명해냈다. 연구팀은 화병 환자 118명을 대상으로 한의학의 음양심리이론을 표준화한 ‘사상성격검사(SPQ)’를 적용해, 행동·인지·정서 영역에서의 특징을 분석했다.
그 결과, 화병 환자에게서 △높은 행동적 과민성·충동성(SPQ-B), △낮은 인지적 경직성·비관주의(SPQ-C), △낮은 정서적 공감·취약성(SPQ-E)이라는 독특한 패턴이 관찰됐다. 이 세 가지 성향이 결합하면서 화병 환자의 심리 증상의 26%, 신체 증상의 14%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높은 행동적 과민성은 분노 폭발과 불안·우울을 유발하고, 낮은 인지·정서 점수는 스트레스의 내면화와 신체화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채한 부산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마치 지문처럼 화병만의 고유한 정신병리 프로파일을 확인한 것으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과 구별되는 진단적 기준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상성격검사는 한의학적 체질 진단에도 활용되는 표준 도구로, 정신질환의 맞춤형 치료 접근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동연구자인 김종우 경희대 교수는 “화병의 악화 과정은 감정 억압 → 신체화(가슴 답답함·열감) → 분노 폭발로 이어지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며, “스트레스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사소한 자극에도 폭발적 분노가 나타나는 임상 경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경성대 이수진 교수는 “치료적 관점에서 SPQ-B(행동적 충동성)를 낮추고, SPQ-C·E를 높여 긍정적 사고와 정서적 공감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화병은 한때 중·장년 여성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질환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젊은 세대와 국내 체류 외국인에게서도 발병률이 높아지는 추세다. 사회적 관계의 단절, 경쟁적 환경, 감정 억압이 심화되면서 문화적 질환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심리 패턴이 관찰되고 있다. 이번 연구는 화병이 단순한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규명된 정신신체질환(psychosomatic disorder)’임을 국제적으로 입증한 첫 사례로 평가된다.
이번 연구를 통해 화병은 정신·신체·정서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복합 질환임이 명확히 드러났다. 연구팀은 향후 화병 환자 맞춤형 치료 모델과 감정조절 교육 프로그램 개발로 연구를 확장할 계획이다. 채한 교수는 “화병의 과학적 규명은 한국형 정신건강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정신의학 연구가 세계 정신건강의 다양성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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