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공지능 경쟁이 사실상 미·중 양강 구도로 고착되는 가운데,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략이 제시됐다. 초대형 컴퓨팅 인프라와 자본을 보유한 패권국에 대한 의존을 피하면서도 첨단 AI 개발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대안적 경로를 다국적 협력에서 찾자는 제안이다. KAIST는 과학기술과 글로벌발전연구센터(G-CODEs)가 캐나다 밀라연구소(Mila), 옥스퍼드대, 독일 아헨공대(RWTH Aachen), 뮌헨공대(TUM), 파리 고등사범학교(ENS-PSL) 등과 함께 정책 보고서 『AI 개발에 관한 다국적 협력의 청사진(A Blueprint for Multinational Advanced AI Development)』을 공동 발간했다고 18일 밝혔다.
보고서는 전 세계 AI 컴퓨팅 역량의 약 90%가 미국(75%)과 중국(15%)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자원 편중은 한국, 캐나다, 영국, 독일, 싱가포르 등 중견 기술 강국들의 독자적인 프론티어급 AI 개발을 구조적으로 제약하고, 특정 국가나 글로벌 빅테크에 대한 기술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진단이다. 보고서는 이들 국가를 ‘AI 브리지 파워(bridge power)’로 규정하고, 패권국과 비패권국 사이에서 새로운 협력 블록을 형성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보고서의 문제의식은 단순한 기술 격차를 넘어선다. AI가 경제·산업·국방·사회 인프라 전반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프론티어 AI에 대한 접근 여부는 곧 국가 경쟁력과 안보 역량을 좌우하는 변수로 작동한다. 미·중 AI 시스템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데이터 주권 침해, 핵심 서비스 차단 위험, 협상력 약화, 외부 가치와 규범의 비자발적 내재화 등 복합적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보고서는 지적한다.
이에 대한 정책적 대안으로 보고서는 다국적 공동 연구 체계를 제시한다.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와 유사한 모델을 상정해, 국가 간 경계를 넘어 컴퓨팅 인프라를 공동으로 구축·활용하고, 고품질 데이터 협력과 인재·연구 교류를 핵심 축으로 삼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프론티어급 AI 모델을 공동 개발하는 동시에, 윤리적 AI 사용과 언어·문화적 다양성이 반영된 포용적 AI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보고서 공동 저자인 AI 석학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는 지정학적 경쟁이 심화되는 환경에서 AI 브리지 파워 국가들이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책임 있는 AI 개발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 간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아헨공대의 홀거 후스 교수 역시 이번 구상이 AI 브리지 국가들의 기술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위치도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짚는다. 정부의 강력한 정책 의지와 우수한 ICT 인프라,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초대형 AI 인프라와 글로벌 인재 확보 측면에서는 미·중 대비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최근 정부가 강조해 온 AI 국제협력 확대 기조와도 맞닿아 있으며, 유럽에서 논의 중인 디지털 주권 담론과도 연결된다. 보고서는 한국이 AI 브리지 파워 연대의 핵심 축으로 참여할 경우, 기술 주권과 민주적 가치, 글로벌 AI 거버넌스에서의 영향력을 동시에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박경렬 KAIST 교수는 이번 보고서가 첨단 AI 역량이 소수 국가에 편중되는 현실 속에서 한국을 포함한 중견국들이 과학기술 연대를 통해 대안적 경로를 제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하며, 글로벌 도전 과제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의제를 선도함으로써 책임 있는 AI 리더십을 강화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보고서는 컴퓨터과학뿐 아니라 국제정치학, 경제학, 법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석학과 정책 전문가, AI 기업 관계자들이 참여한 숙의의 결과물이다. AI 개발을 둘러싼 논의가 기술 경쟁을 넘어 주권과 규범, 협력의 문제로 확장되는 시점에서, KAIST가 참여한 이 다국적 협력 구상은 미·중 중심 질서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어떤 파급력을 가질지 주목된다. 기술 패권의 양자택일이 아닌 다자 연대를 통한 제3의 경로가 실제 정책과 연구 협력으로 구현될 수 있을지가 향후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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