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점국립대 지원도 일부 대학 선정 방식…교수노조 논평, 경쟁형 재정지원의 구조적 한계 지적
대학별 자율 사용·최소 5년 단위 평가·교원 인건비 활용 가능한 안정적 지원체계 제안
정부가 대학을 공모사업에 참여시켜 일부 대학을 선정하고 성과에 따라 사업비를 배분하는 현행 대학 재정지원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단기간의 선정 경쟁이 대학의 자율성을 약화하고, 교육과 연구의 장기적 발전보다 평가 지표와 사업계획서 작성에 대학 역량을 집중하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전국교수노동조합은 7월 13일 김명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사업비 방식 지원을 극복해야 우리 고등교육의 미래가 열린다’는 제목의 교수논평을 배포했다. 김 교수는 전국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지냈다.
김 교수는 논평에서 경쟁을 통해 일부 대학을 선정하고 정해진 사업 목적에 따라 예산을 집행하게 하는 방식이 민주화 이후 정부의 대학 재정지원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됐다고 진단했다. 대학의 자율성이 헌법적 가치로 규정돼 있지만, 실제 대학 운영에서는 정부 재정지원 사업의 선정 기준과 성과지표가 교육·연구 방향을 결정하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거점국립대도 다시 ‘선정 경쟁’으로
논평은 이른바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의 사업화 과정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김 교수는 해당 정책이 당초 9개 거점국립대의 전반적인 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시됐지만, 실제 사업 공고 과정에서는 일부 대학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논평에 따르면 거점국립대들은 지원 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사업계획과 평가 지표를 중심으로 다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선정 경쟁이 대학 내부의 교육·연구 제도까지 평가 기준에 맞춰 재편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교원 승진과 정년보장 심사 기준 강화, 국제학술지 게재 실적 확대, 영어강의 비율 제고 등이 대학의 학문적 특성과 구성원의 충분한 논의보다 사업 선정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은 연구 성과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학문적 소통 구조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정부 사업이 특정한 국제학술지 게재 실적이나 정량지표를 중심으로 대학을 평가하면, 대학은 학문 분야별 차이보다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공통 지표를 우선하게 된다는 것이 논평의 문제의식이다. 대학이 자율적으로 발전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주관하는 정부가 제시한 기준에 맞춰 대학의 제도와 자원을 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평가 순위가 교육·연구의 목표가 될 때
논평은 세계대학평가 순위가 대학 재정지원의 주요 성과지표로 활용되는 문제도 함께 제기했다. 외국인 유학생 유치와 국제 연구협력 확대를 위해 대학이 세계대학평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평가 순위 자체가 대학 교육과 연구 발전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특히 국제화 지표와 평판도 점수를 단기간에 높이기 위한 대학 간 경쟁이 실제 교육과 연구의 질적 개선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봤다. 논문 공동저자 구성이나 해외 연구자 채용, 외국인 교수 비율 확대 등이 장기적인 학문 발전보다 평가 점수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논평에는 일부 대학의 해외 연구자 겸임 임용과 연구실적 활용, 국제학술지 실적 경쟁 등에 대한 강한 비판도 담겼다. 다만 이는 김 교수의 논평을 통해 제기된 주장으로, 개별 사례의 사실관계와 해당 대학의 입장은 별도의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다.
핵심은 대학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평가에서 유리한 지표를 만드는 일이 교육과 연구의 실질적인 개선보다 앞설 때, 대학 재정지원이 오히려 대학의 목적을 왜곡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다.
“일정 예산 배정하고 대학에 사용 자율권 줘야”
김 교수는 모든 경쟁형 재정지원 사업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대규모 시설과 연구비를 신속하게 투입해야 하는 일부 첨단연구 분야에서는 경쟁을 통한 사업 선정이 불가피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거점국립대의 공공성과 지역적 책무를 강화하기 위한 재정지원은 개별 프로젝트를 선정하는 방식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점국립대에 일정한 예산을 안정적으로 배정하고, 대학이 자체 발전계획에 따라 예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 주기도 최소 5년 단위로 설정할 것을 제안했다. 단년도 또는 단기 성과를 반복적으로 평가하기보다 대학이 중장기 계획을 추진할 시간을 보장한 뒤, 성과가 부족하면 지원을 줄이고 성과가 확인되면 지원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대학 내부에서는 구성원들이 교육과 연구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력과 예산을 배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세부 사업과 지표를 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학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구조가 자율성과 책무성을 함께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업비는 늘어도 사람을 채용하기 어려운 구조
사업비 중심 재정지원의 또 다른 문제로는 예산 사용의 경직성이 제시됐다. 대학이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려 해도, 사업비를 교수와 박사급 연구원 등 안정적인 인력 확보에 활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시적인 사업 예산은 사업 종료 이후에도 계속 부담해야 하는 교원 인건비로 전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학은 새로운 센터와 프로그램, 비교과과정, 시설과 장비에는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교육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담당할 전임교원과 연구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김 교수는 대학 교육과 연구의 질을 높이려면 우수한 연구자와 교원의 수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주요 대학과 경쟁하려면 교수뿐 아니라 박사급 연구원과 박사과정 학생까지 포함한 연구 인력의 규모를 확대해야 하지만, 현행 사업비 방식으로는 지속적인 인력 확충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대학 재정지원 확대는 지역대학의 위기와 고등교육 경쟁력 저하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 정책으로 꼽힌다. 그러나 재정지원 규모가 늘어나는 것만으로 대학의 교육·연구 기반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이 지원을 받기 위해 매번 새로운 사업에 참여하고, 선정 이후에는 정해진 항목에 따라 예산을 집행하며, 다시 후속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면 재정지원 확대가 대학 운영의 안정성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대학 본부와 교직원의 역량이 교육과 연구보다 사업계획 수립과 실적 관리에 집중되는 문제도 피하기 어렵다.
반대로 대학에 재정 사용의 자율성을 확대하면 책임성에 대한 요구도 커진다. 대학이 자체적으로 설정한 발전계획이 구성원의 충분한 논의를 거쳤는지, 특정 조직이나 보직자의 이해에 따라 예산이 배분되지 않는지, 교육과 연구의 실질적인 개선으로 이어졌는지를 평가할 장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쟁점은 경쟁과 평가를 완전히 없앨 것인지가 아니다. 어떤 영역을 경쟁형 사업으로 지원하고, 어떤 영역을 대학 운영을 위한 안정적 재정으로 보장할 것인지 구분하는 일에 가깝다.
이번 논평은 정부가 대학에 얼마를 지원할 것인가와 함께, 어떤 방식으로 지원할 것인가를 고등교육 정책의 중심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요구한다. 대학을 반복적인 선정 경쟁에 세우는 방식이 지역 거점대학의 장기적인 역량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인지, 안정적인 기관 지원과 중장기 평가로 전환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다. 대학 재정지원의 목적이 단기간에 측정 가능한 사업 성과를 만드는 데 있는지, 대학이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데 있는지에 따라 지원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거점국립대 육성정책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재정의 규모뿐 아니라 배분과 평가, 사용 권한을 둘러싼 논의도 함께 시작돼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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