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도 현상과 같은 극저온 양자현상의 핵심에는 전자들이 언제 집단적으로 정렬되고, 언제 그 질서를 잃는지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오랫동안 이론과 간접 측정에 의존해 설명돼 왔다. 전자들이 실제 공간에서 어떤 무늬를 만들고, 온도 변화에 따라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직접 관측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 극저온 환경에서 전자 질서의 형성과 붕괴를 ‘눈으로 확인’한 연구 성과가 국내에서 나왔다. KAIST는 물리학과 양용수·이성빈·양희준·김용관 교수팀이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와의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양자물질 내부 전자 질서의 변화를 나노미터 정밀도로 시각화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고 1월 20일 밝혔다 .
이번 연구의 대상은 대표적인 양자물질인 2H-NbSe₂에서 나타나는 전하밀도파(Charge Density Wave)다. 전하밀도파는 극저온으로 물질을 냉각했을 때 전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며 줄무늬 또는 격자 형태의 ‘전자 무늬’를 만드는 현상으로, 초전도 상태와 경쟁하거나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 질서의 생성과 붕괴 조건을 이해하는 것은 고온 초전도체와 차세대 양자소재 설계의 핵심 과제로 꼽혀 왔다.
연구팀은 액체헬륨 기반 극저온 전자현미경과 4차원 주사투과전자현미경(4D-STEM)을 결합해, 약 –253℃에 이르는 환경에서 전자 무늬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관측했다. 이는 물이 얼면서 얼음 결정이 자라는 모습을 초고배율로 촬영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관측 대상이 분자가 아닌 전자이며, 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1 수준까지 볼 수 있는 정밀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기술적 난도가 극히 높다. 이러한 실험은 전 세계적으로도 소수 연구팀만 수행할 수 있는 영역으로 평가된다.
관측 결과는 기존의 평균적 이해와 달랐다. 전하밀도파는 물질 전체에 균일하게 형성되지 않았고, 어떤 영역에서는 선명한 전자 무늬가 나타났지만 바로 인접한 영역에서는 거의 관측되지 않았다. 이는 호수가 한 번에 얼지 않고 얼음과 물이 섞여 공존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연구팀은 이러한 공간적 불균일성이 물질 내부의 극미한 변형(strain)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정량적으로 밝혀냈다. 눈으로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 작은 압력이나 뒤틀림이 전자 질서 형성을 방해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온도가 상승해 대부분의 전자 무늬가 사라진 이후에도, 일부 영역에서는 전하밀도파가 ‘섬’처럼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현상으로, 극저온이 아닌 조건에서도 양자 질서가 국소적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더 나아가 전자 무늬를 이루는 전자들이 공간적으로 얼마나 멀리까지 서로 영향을 주는지를 세계 최초로 정량화해, 전자 질서의 연결성과 붕괴 과정을 새로운 분석 틀로 제시했다.
이번 성과는 초전도 연구와도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전하밀도파와 초전도 상태는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로 알려져 있는데, 전자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조건을 이해하면 초전도 전류가 더 효율적으로 흐르는 재료를 설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는 양자컴퓨터 소재, 차세대 에너지 재료 등 다양한 분야로의 확장 가능성을 내포한다.

연구를 주도한 양용수 교수는 그동안 이론과 간접 측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극저온 전자 질서의 미세한 변화를 이제는 직접 관측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하며, 이번 성과가 양자물질의 숨겨진 질서를 밝히고 미래 양자기술용 재료 개발을 가속할 중요한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에는 KAIST 홍석조·오재환·박제민 연구원이 공동 제1저자로 참여했으며, 결과는 물리학 분야의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 Physical Review Letters 2026년 1월 6일자에 게재됐다. 극저온 환경에서 전자 질서를 공간적으로 직접 영상화한 이번 성과는, 양자현상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관측 가능한 현상’으로 끌어내린 사례로 평가된다. 초전도의 비밀을 풀기 위한 연구는 이제 전자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를 실제 공간에서 추적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KAIST #초전도연구 #전자질서 #전하밀도파 #양자물질 #4DSTE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