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패권시대의 전략적 국가, 한국 – 기술·교육·연구가 만든 새 역할

기술이 외교를 대체하는 시대

21세기의 국제질서는 이제 군사력보다 기술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인공지능(AI)은 그 중심에 있다. RAND가 2025년 10월 발표한 분석 보고서는 미국과 중국의 ‘AI 패권 경쟁’을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경쟁”으로 규정하며, 그 균형추를 바꿀 수 있는 핵심 파트너로 대한민국을 지목했다. 보고서의 주제는 분명하다. AI의 시대는 단순한 산업전쟁이 아니라 가치와 체제, 그리고 지식생태계를 둘러싼 전면전이며, 이 경쟁에서 한국은 기술·인재·정책의 세 축을 모두 갖춘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시각에서 본 한국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인공지능과 반도체, 로봇과 데이터, 그리고 교육 인프라를 결합해 민주적 기술질서를 구현할 수 있는 잠재적 거점이다. RAND는 이를 “AI가 가져올 문명사적 전환 속에서 한국이 차지할 전략적 위치”로 표현했다.

AI는 이미 경제와 안보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알고리즘과 데이터는 무기가 되었고, 반도체는 새로운 석유로 불린다. 거대한 자본과 컴퓨팅 자원을 독점하는 국가가 곧 국제 규범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러한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은 ‘기술국가(tech state)’로서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이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인프라를 가진 고밀도 지식사회, 그리고 연구역량과 산업생태계가 결합된 국가. RAND는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을 “AI 시대의 전략적 자산”으로 평가했다.

기술국가로서의 한국 – 산업과 인프라의 결합

한국 정부는 2023년 「AI 혁신 청사진」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중심에는 데이터, 반도체, 컴퓨팅 파워, 인재라는 네 개의 기반이 있다. 정부는 국가 AI 컴퓨팅센터를 설립하고, 1만~1만5천 개의 고성능 GPU를 확보하기로 했다. 또한 600페타플롭급 슈퍼컴퓨터 개발을 추진하며, 이를 대규모 언어모델(LLM) 연구와 공공·산업 부문 AI 학습에 활용할 예정이다. 이러한 인프라 확충은 단순한 기술개발 차원을 넘어 국가 역량의 구조적 확장을 의미한다.

민간 부문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각각 ‘HyperCLOVA X’와 ‘Kanana’라는 대규모 언어모델을 출시하며 국내 AI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다. 두 기업은 모두 모델 일부를 오픈소스로 공개해, 글로벌 시장에서의 접근성과 현지화 경쟁력을 높였다. 이는 폐쇄적 생태계를 선호하는 미국의 대형 기업들과는 다른 전략으로, 지역별 맞춤형 AI 솔루션을 확산시키는 데 유리하다. 동시에 한국 반도체 산업은 AI 인프라의 물적 토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AI 연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미국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로봇산업에서도 세계 4위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제조업 노동자 1만 명당 로봇 보급률이 1,100대를 넘어서며, 자동화와 ‘실체지능(embodied intelligence)’ 연구가 결합되는 구조를 갖췄다. 정부는 2024년부터 2028년까지 24억 달러 규모의 「지능형 로봇 기본계획」을 시행해 산업 전반의 로봇 활용을 확대하고 있다. RAND는 이러한 산업구조를 “AI 생태계의 전방위적 통합 모델”로 평가한다. 반도체–로봇–클라우드–데이터센터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에너지와 네트워크가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체계,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학과 연구, 국가경쟁력의 새로운 축

AI 시대의 경쟁은 단지 알고리즘이나 하드웨어의 싸움이 아니라, 연구 인프라와 인재의 경쟁이다. RAND 보고서는 한국의 대학과 연구기관이 이 경쟁의 ‘지식 엔진’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은 현재 전 세계 AI 연구자 수 기준 9위, AI 논문 발표 수 기준 12위에 올라 있다. KAIST,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이 AI 대학원 및 융합연구센터를 운영하며, 산업계와의 공동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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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정부는 「AI 반도체 인재양성 프로젝트」를 통해 대학원생을 해외 유수 연구기관에 파견하고, 4개 과학기술원 중심으로 해외 석·박사급 연구자를 초청하는 ‘InnoCORE Postdoctoral Fellowship’을 신설했다. 2억2천만 달러 규모의 이 프로그램은 400명의 국제 AI 연구자를 유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한 교육정책을 넘어, 국가 차원의 연구 네트워크 재편이다.

대학의 역할은 기술인력 공급에 그치지 않는다. RAND는 “AI 윤리, 법제, 사회적 영향 평가 등 비기술적 영역에서도 한국 대학의 기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여러 대학이 인문사회계열과 공학계를 아우르는 AI 거버넌스 연구를 강화하고 있으며, AI 정책학과, 데이터윤리센터 등이 잇따라 설립되고 있다. 이는 기술패권 경쟁이 단순한 기술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문제라는 인식의 확산을 보여준다.

산업과 군사기술의 결합 –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

AI 기술은 국방 영역에서도 결정적 변수가 되고 있다. 한국은 ‘Generative Defense AI(GeDAI)’를 한미연합훈련에 시범 적용하며, 군사 의사결정 과정에 생성형 AI를 도입한 첫 사례로 주목받았다. 한화, 현대중공업, 한국항공우주산업 등 주요 방산기업은 미국의 팔란티어, 쉴드AI 등과 협력해 무인전력체계와 AI 전투지원 소프트웨어를 공동개발 중이다.

RAND는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AI 기반의 자주국방 역량 강화이자, 미국의 전략적 부담을 줄이는 구조”로 평가했다. 출산율 감소로 인한 병력 부족을 보완하고, 동북아 안보구도의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데 AI가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나아가 이러한 기술들은 향후 방산수출 경쟁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K2 전차, K9 자주포, KF-21 전투기 등 주요 무기체계가 AI 기반 제어와 분석 기능을 탑재하고 있으며, 폴란드·인도·베트남 등 해외 수출시장에서도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AI 국방기술은 단순히 전투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이 아니라, 데이터·통신·에너지 인프라의 통합을 촉진한다. 이는 국가 전체의 디지털 역량 확대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 민간 AI 생태계와 상호 강화효과를 낳는다. RAND는 “AI가 군사와 산업을 연결하는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의 중심에 한국이 있다”고 분석했다.

신뢰 가능한 AI와 기술규범의 리더십

한국은 2025년 3월 「인공지능기본법」을 제정해 아시아 최초로 AI 개발·활용에 관한 포괄적 법제 틀을 마련했다. 법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AI’를 국가원칙으로 규정하고, 개발자·이용자·정부의 책무를 명확히 했다. RAND는 이를 “민주적 기술거버넌스의 모델”로 평가하며, 중국식 ‘데이터 통제형 AI’와 대조되는 규범적 기반으로 주목했다.

2025년 초 발생한 중국발 AI 앱 DeepSeek 사태는 이러한 규범의 필요성을 입증했다. 개인정보 무단 전송이 확인되자 한국 정부는 앱 다운로드를 중단시켰고, 주요 기업과 공공기관이 일제히 사용을 금지했다. 이는 단순한 보안조치가 아니라, ‘데이터 주권’의 선언이었다. 이후 한국은 AI 보안협의회를 출범시키고, 개인정보보호법을 강화하며 AI 모델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발전시켰다.

이와 함께 2024년 AI 서울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서울선언(Seoul Declaration for Safe, Innovative and Inclusive AI)」은 한국이 AI 국제규범 논의의 중심으로 부상했음을 상징한다. 선언은 인류 중심의 AI, 민주적 가치, 인권 보호, 안전성 확보를 명시하며, 히로시마 AI 프로세스와 블레츨리 선언의 연장선에서 세계적 합의를 이끌었다. RAND는 이를 “한국이 기술표준 경쟁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 사례”로 분석했다.

AI 외교의 확장 – 아시아와 중동의 새로운 네트워크

한국의 AI 역량은 이미 동맹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 중동에서는 UAE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주요 파트너로 부상했다. 한국은 UAE와 함께 공공부문 AI 도입,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공동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사우디와는 아랍어 대형언어모델 공동개발 및 스마트시티 ‘네옴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협력 이상으로, 한국형 AI 생태계가 아랍권의 행정·도시·산업체계에 이식되는 과정이다.

동남아시아에서도 한국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은 한국과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확대하며, 데이터센터 구축과 ‘소버린 AI(국가 맞춤형 AI)’ 개발을 추진 중이다. 네이버클라우드는 필리핀 통신사와 협력해 현지 언어 기반 AI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으며, SK이노베이션은 말레이시아에 270MW급 AI 데이터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AI 외교’는 중국의 기술확산에 대한 대안으로 기능하며, 한국이 아시아형 민주적 기술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한국은 인도·일본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인도와는 AI 및 반도체 협정, 일본과는 3국(한·미·일) 공급망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RAND는 이를 “AI 경쟁의 지정학적 다극화 속에서 한국이 교량(bridge)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은 중국과의 경제적 의존도를 관리하면서도, 민주적 기술연합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다.

기술패권의 시대, 대학이 만드는 국가의 미래

AI는 산업혁명 이후 가장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불러오고 있다. 기술력은 외교력을 대체하고, 연구는 안보의 핵심이 되었다. RAND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다. 한국의 경쟁력은 반도체나 로봇 같은 하드웨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계하고 운용하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지식 인프라’에 있다는 것이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이제 기술패권 시대의 전선에 서 있다. AI 연구와 윤리, 정책, 산업의 결합을 통해 한국이 ‘신뢰 가능한 기술국가’로 자리 잡는다면, 그 기반은 결국 교육과 연구에서 나온다. RAND는 보고서의 마지막에서 “한국의 대학, 기술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민주적 AI의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세계질서의 균형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AI 패권시대의 전략적 국가는 단순히 기술을 잘 다루는 나라가 아니다. 기술을 통해 가치와 규범을 세우고, 인류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나라다. 지금 한국은 그 길목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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