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의 겉과 속: 고소득국 아이들이 겪는 ‘조용한 위기’
UNICEF Innocenti Report Card 19(2025)을 통해 들여다본 고소득국 아동 웰빙의 현주소
위기에 처한 아이들: 성장 대신 침잠하는 지표들
‘아동은 국가의 미래’라는 말은 상투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미사여구로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이 2025년 발간한 『Innocenti Report Card 19: Child Well-being in a World of Uncertainty』는 이 상투어 뒤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고소득 국가에 거주하는 수많은 아동들이 삶의 만족도, 정신건강, 신체건강, 학습 및 사회적 역량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악화된 지표를 보이고 있다.
이번 Innocenti 보고서는 유럽연합(EU)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의 39개 고소득 국가를 대상으로, 아동의 ‘주관적 행복’부터 ‘디지털 역량’에 이르기까지 다섯 개 핵심 영역에 대한 정량적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알려진 국가들조차 아동의 정서적 웰빙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조용한 위기’ 속에 아동의 삶은 점점 침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만족도: 풍요 속의 불만족
‘만족’이라는 개념은 아동의 삶을 진단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척도다. 단순히 경제적 수준이 아니라, 아동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하는지 보여주는 주관적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아동의 약 20%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일부 국가는 그 비율이 30%를 상회했다.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그리스, 폴란드와 같은 국가에서는 3명 중 1명꼴로 삶에 불만을 표했으며, 이는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결핍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반면,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크로아티아는 높은 삶의 만족도를 보이며 상위권을 기록했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아동의 사회적 지지망이 강하고, 교육 및 정신건강 지원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정신건강: 침묵 속에서 울리는 경고음
정신건강은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악화된 영역 중 하나다. 특히 여아의 경우 남아보다 우울증과 불안감, 외로움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팬데믹과 기후위기, SNS와 디지털 환경의 과도한 노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사회적 지지망의 결여 역시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아동이 일상 속에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나 또래가 부족할 경우, 정서적 외로움은 심화되고 이는 우울, 수면장애 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아동의 정신건강은 단순히 개인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네트워크의 약화, 시스템의 부재 등 구조적 요인을 반영한다.
신체건강: 정적인 삶, 움직이지 않는 사회
신체건강 부문에서는 비만과 운동부족 문제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여아는 남아보다 활동량이 현저히 적으며, 이는 체력 저하뿐만 아니라 심리적 위축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WHO의 권장 기준(하루 60분 이상 신체활동)을 충족하는 아동은 소수에 불과하다.
국가 간 격차도 분명하다. 일부 국가는 학교 체육 및 지역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활발한 운동 문화를 제공하지만, 여전히 많은 국가에서는 안전한 놀이 공간이나 체계적인 운동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기술·사회·감정 역량: 디지털 세계의 역설
디지털 역량은 현대 아동의 중요한 생활자산이 되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자기표현의 공간을 가지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과도한 기기 사용, SNS 중심의 비교문화, 개인정보 노출 등 부작용도 심각하다.
이번 보고서는 여아가 디지털 기술 활용에 능숙하지만, 동시에 디지털 피로와 정서적 고립을 더 크게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불어 사회적 역량과 감정 조절 능력은 학교 교육이나 가족환경에 따라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학습 역량: 멈춰선 배움, 벌어지는 격차
읽기, 수학, 과학 등 학습 능력에서도 상위국과 하위국 간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의 학습 손실이 장기적인 성취도 격차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온라인 수업의 질적 차이, 가정의 디지털 접근성, 부모의 교육 지원 역량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면서 아동 간 학습 불균형은 구조화되고 있다.
보고서는 가정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학습 역량에 미치는 영향이 여전히 막대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맞춤형 교육 지원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위기의 구조적 성격
보고서는 아동의 웰빙이 단지 ‘개인의 적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제공하는 구조적 자원에 의해 형성된다고 강조한다. 즉, 삶의 만족도나 정신건강, 학습 역량은 사회의 지지 시스템, 교육 정책, 건강 제도, 디지털 인프라 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은, ‘고소득국’이라는 지위가 반드시 ‘높은 아동 복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적 성장만으로는 아동의 행복을 담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시스템의 민감성과 포용력이 결정적이다.
고요한 위기의 신호: 외면당하는 미래세대
이번 보고서는 고소득 국가 내에서도 아동의 삶이 점점 더 불확실성과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심리적·사회적 후퇴가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수치로 입증했다. 경제, 기후, 전염병, 기술 등 다양한 전환기의 변수들이 아동에게 ‘위험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은 그 자체로 구조적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이 위기는 ‘소리 없는 위기’로 존재한다. 아동은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정치적으로 표현하거나 제도적으로 호소할 권한이 부족하다. 그만큼 더 큰 사회적 감수성과 제도적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음 회차 예고: 위기의 원인과 복원의 조건
이번 1회차에서는 아동 웰빙 지표 전반의 악화 양상과 그 구조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구체적 원인’과 더불어 아동의 회복력(resilience)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적 조건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특히 기후변화, 디지털 불평등, 전염병, 경제위기 등 복합적 변수들이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하고, 상위권 국가들의 대응전략을 통해 ‘회복의 조건’을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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