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반대를 둘러싼 거짓 정보와 신학적 오용, 그리고 그리스도 정신의 파괴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차별금지법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성별, 장애, 성적지향, 나이 등 다양한 이유로 차별받는 이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자는 이 단순한 취지의 법안이 17년째 통과되지 못하는 현실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 중 유례를 찾기 어려운 퇴보이자 부끄러움이다. 그 중심에는 한국 보수 개신교가 있다.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해 왔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교회를 찾고, 개신교 언론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그러한 영향력이 최근 수년간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신념을 공공연하게 확산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우려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반대 운동은 혐오와 가짜뉴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기독교가 지켜야 할 사랑과 정의의 정신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물론 모든 개신교인들이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형 교단과 주요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차별금지법을 ‘기독교 말살법’이라 규정하고, ‘성소수자에게 특혜를 주는 악법’이라는 허위 프레임을 반복적으로 유포하며, 정치인들을 상대로 조직적 압박을 가하는 현실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이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한국 보수 개신교의 강력한 반대 목소리다.
이 글은 한국 개신교의 차별금지법 반대 논리를 면밀히 검토하고, 그 허구성과 모순을 밝히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 정신이 무엇인지 되묻는 시도이다. 단지 종교 비판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가 다시금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진지한 반성을 촉구하는 글이기도 하다.

역사적 맥락과 가짜뉴스의 기원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2007년 법무부가 첫 번째 차별금지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부터다. 당시 법안은 성별, 장애, 인종,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점부터 보수 개신교계는 법안에 대해 격렬한 반대 운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내세운 반대 논리는 대개 동성애와 성적지향 관련 조항을 문제 삼으며 시작된다. “동성애는 죄인데 이를 법적으로 옹호하면 교회에서 설교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목사가 동성애 비판 설교를 하다가 감옥에 간다”,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교육하게 된다” 등의 주장은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고, 일부 보수 정치인들에 의해 공식 발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중 상당수는 명백한 허위 정보이거나 왜곡된 해석이다. 실제로 차별금지법은 설교를 금지하는 내용도, 종교적 신념을 억압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교계는 이러한 가짜뉴스를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반복적으로 유포해 왔다. 이런 방식은 불안을 자극해 대중의 감정을 동원하는 전형적인 선동의 수법이다.
문제는 이 허위 정보들이 단지 종교집단 내부에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주요 언론, 유튜브 채널, 종교 매체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공공 담론을 왜곡시켜 왔다. 특히 선거철마다 보수 개신교계는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운동’과 함께 국회의원들을 압박하며 법안 상정을 저지해 왔고, 정치인들 역시 조직표에 기대어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가짜뉴스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동성애 비판 설교를 하면 징역형에 처해진다”는 주장이다. 이는 차별금지법의 입법 취지와 전혀 무관한 억측이며, 현행 형법이나 인권법 체계에서도 설교 내용으로 처벌되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법조계와 시민단체, 언론은 수차례 반박했지만, 교계는 반박 사실을 무시하거나 또 다른 왜곡으로 맞섰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실질적인 정책적 검토나 인권적 원칙보다는 종교적 선동과 감정적 혐오의 수사로 전락하는 사태가 반복되어 왔다. 합리적 토론의 부재는 결국 사회 전반의 성숙한 인권 감수성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해 왔다.
이처럼 가짜뉴스에 기반한 반대운동은 단순한 오해의 수준을 넘어서 의도적인 왜곡이며, 종교의 이름으로 사실을 희생시키는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폭력의 중심에 선 세력이 바로 한국 보수 개신교다.
성경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이들 – 신학의 왜곡
차별금지법 반대 논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담론은 성경 해석에 기반한 것이다. 보수 개신교 진영은 성경이 동성애를 명백히 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비판할 수 없게 된다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너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성경 해석의 일면만을 강조한 결과이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오도하는 행위다.
우선, 성경의 시대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본문을 절대화하는 방식은 수많은 해석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왔다. 대표적으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창세기 19장)는 고대 도시의 환대 부족과 폭력성에 대한 경고로 해석될 수 있으며, 로마서 1장의 동성애 관련 구절들 또한 당시 헬레니즘 세계의 성적 타락을 비판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현대의 상호 합의에 기반한 성소수자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맥락이 다른 셈이다.
또한 성경은 무엇보다 ‘사랑’의 메시지를 중심에 두고 있다. 예수는 소외된 이들, 세리와 창녀, 병든 자들과 함께했고,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전하는 삶을 살았다. 이와 같은 복음의 정신은 ‘성적지향을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보수 개신교는 복음을 도리어 정죄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악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신학 자체가 도그마화되고, 다원적인 신학적 논의가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수 교계는 동성애에 대한 복음주의적 거부감을 절대화하며, 이를 반대하지 않는 이들에게 “기독교 이름을 떼라”고 윽박지른다. 이는 신학적 대화와 교회 안의 다양성을 말살하고, 이견을 죄로 몰아세우는 전체주의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성경의 이름으로 포장된 이 같은 반대 논리는 ‘신학적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해석에 불과하다.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고, 인간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신학은 그 자체로 신앙의 타락이며, 그것이 한국 개신교의 현재 모습이라면 우리는 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

혐오와 배제의 문화가 된 신앙 실천
한국 보수 개신교계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가장 우려스러운 모습은, 종교적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려는 태도이다. 이는 단지 의견 차이를 넘어, 폭력적인 언행과 집단행동으로 이어지며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차별금지법이 발의될 때마다 등장하는 거리 시위는 그 대표적인 예다. 일부 교계 단체들은 “차별금지법은 기독교 말살법이다”, “차별금지법은 사탄의 법이다” 같은 자극적인 구호를 내걸고 청와대 앞, 국회의사당 앞, 기독교회관 앞 등에서 대규모 반대 집회를 열어왔다. 이런 집회에서 ‘성소수자=악마’, ‘동성애자=타락자’라는 메시지를 대놓고 외치는 것은 더 이상 종교적 주장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이 과정에서 교계 일각은 자신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기독교 단체나 개인을 향해서도 적대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독여민회, 차세기연 등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이들을 ‘적그리스도’, ‘이단’, ‘사기 집단’이라 비난하며 교계 내부의 균형 잡힌 논의조차 봉쇄하고 있다. 신앙의 다양성과 교회 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가장 위험한 장면이다.
더 나아가 혐오 표현은 종종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퀴어 축제 현장에서 성경책을 던지거나, 혐오 발언을 확성기로 외치는 행동은 단순한 의견 표현을 넘어 물리적·심리적 폭력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이 같은 행위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러한 혐오와 배제의 정당화는 결국 기독교의 공공적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30대 청년층 사이에서 개신교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단지 종교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적극적인 회피와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가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내부의 혐오적 언행과 권위주의적 구조에서 먼저 자각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랑과 포용, 용서와 연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보수 개신교가 보여주는 모습은 이 메시지와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혐오와 정죄, 분열과 배제를 내세우며 교회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자신을 다시 성찰하지 않는 한, 점점 더 고립되고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짜 기독교인의 목소리 – 침묵하지 않는 신앙인들
차별금지법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거센 반대 속에서도,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는 분명 존재해 왔다. 이들은 자신이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이를 품는 신앙’을 외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해 왔다.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차세기연)이다. 이들은 2007년부터 공식 활동을 시작해,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과 성명 발표, 성소수자 인권 포럼 참여 등을 꾸준히 이어왔다.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인이라면 동성애에 반대해야 한다’는 보수 교계의 주장에 맞서, “진정한 기독교인은 차별에 침묵하지 않는다”는 점을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 다른 단체인 ‘기독여민회’는 여성과 성소수자,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기독교 신앙 안에서 지지하고 옹호해 온 단체다. 이들은 예수의 복음이야말로 차별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복음이며, 성경은 어떤 이유로든 인간을 정죄하거나 배제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가 반동성애 입장을 공식화하자, 이에 반대하는 공개 성명을 내고, 이후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신앙인들은 단지 윤리적 당위를 넘어서, 신학적·신앙적 이유를 들어 그 필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포용’과 ‘연대’, ‘사랑’이라는 핵심 가치를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성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특히 이들은 예수가 가장 먼저 찾아간 이들이 병들고 소외된 자들이었음을 기억하며, 교회가 오늘날 가장 연약한 이들의 친구가 되지 않는다면 복음의 본질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동성애를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자는 것”이라며 차별금지법은 바로 그 존중의 최소한의 사회적 기틀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앙인들의 목소리는 단지 교회 내 소수의견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성서의 선언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실천에 옮기려는 용기 있는 시도이다. 그리고 그들은 외친다. “차별은 결코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한국 보수 개신교의 정치화와 퇴행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의 이면에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가 깊이 얽혀 있다. 한국 보수 개신교는 오랜 시간 동안 선거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은 종교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전락해 왔다.
보수 교계는 조직적인 반대 운동을 통해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을 낙선 대상자로 지목하며 대대적인 탄압 캠페인을 벌여왔다. 이러한 방식은 종교의 자유를 넘어 정치적 협박으로 읽히며, 교회의 공공성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특히 이들의 정치적 연계는 선거 때마다 보수 정당과의 결탁으로 이어졌고, 그 대가로 정치권은 차별금지법을 무력화하거나 외면하는 모습을 반복해 왔다.
이러한 움직임은 종교의 정치화, 더 정확히 말해 교회의 정치 도구화로 귀결된다. 종교는 본래 사회의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하지만, 한국 보수 개신교는 특정 이념과 정파적 목적에 봉사하며 공익의 수호자가 아닌 권력의 동맹군으로 전락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좌파’나 ‘종북’ 등의 정치적 레토릭을 섞어 쓰는 것은 그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일부 보수 교계 인사들은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허위 정보를 정치적 목적에 맞게 편향되게 해석하거나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차별금지법의 독소조항을 거론하며 정부 정책 전반을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유튜브나 SNS 등에서 특정 정당 지지나 반대 운동을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신앙의 진정성과 종교적 도덕성을 동시에 훼손하는 행위다.
교회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하며, 인간 존엄성과 공동체적 정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한국 보수 개신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치 권력과 손을 잡고, 신앙의 이름으로 타인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이념의 진영에 동원된 집단으로 인식될 위험을 낳고 있다.
결국 정치화된 보수 개신교는 종교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신앙 공동체 내부의 건강한 토론과 성찰을 가로막는다. 이는 단지 교회 안의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도 큰 장애물이 되고 있으며,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다.
정말 ‘특권’인가? 보수 교계 주장의 논리적 붕괴
한국 보수 개신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대표적 이유 중 하나는 “성소수자에게 특권을 주는 법”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가 되며, 반대 의견은 모두 처벌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관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위 정보와 혐오 감정을 기반으로 한 왜곡된 프레임이다.
차별금지법은 특정 집단에 특혜를 부여하는 법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사회 구조 안에서 다양한 이유로 차별을 받아 온 소수자들에게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제공하겠다는 최소 기준이다.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단지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 때문에 해고되거나 교육, 의료, 주거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헌법 정신과도 일치한다.
보수 교계의 ‘역차별론’은 실제 사례에 비춰볼 때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과잉 보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들은 공공연히 차별과 혐오에 노출돼 있으며, 자살률·우울증·사회적 고립 등 수많은 지표에서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자는 입법 시도를 ‘특권화’로 해석하는 것은, 기득권 집단의 불안이 만들어낸 반작용에 불과하다.
또한 ‘비판할 자유’와 ‘혐오할 자유’는 엄연히 다르다. 누구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동성애를 죄라고 믿을 자유는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거나 모욕할 권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표현의 자유는 타인의 인권과 충돌할 때 반드시 조정되어야 하며, 이 균형이야말로 성숙한 민주주의의 토대다. 종교적 신념이 모든 경우에 우선될 수 없듯이, 종교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은 특정 집단의 권리를 과잉 보장하는 ‘특혜 법안’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가 평등과 존엄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 규범이다. 이를 왜곡된 특권 담론으로 비틀며 반대하는 것은, 결국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한 방어적 반응이며, 사회적 연대와 인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자유와 권리의 이중잣대 – 종교의 자유와 타인의 권리
보수 개신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주요 논리는 “종교의 자유 침해”다. 그들은 설교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것조차 금지당할 수 있으며, 이는 신앙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논리는 권리의 경계를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타인의 권리와 충돌할 때 자기 권리만을 우선시하려는 위험한 논리다.
종교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본권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무제한이 아니다. 어떤 종교적 신념도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 존엄을 침해하는 데까지 확대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특정 인종이나 장애인을 향해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표현이 아니라 명백한 혐오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에게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하는 것도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폭력적 언사일 수 있다.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타인의 권리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성소수자 역시 신앙인처럼 존엄한 인간으로서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종교가 인권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으며, 헌법 질서 아래에서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하는 수많은 권리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사회적 참여를 가로막는 것은 자유의 행사라기보다는 억압이다.
차별금지법은 종교를 탄압하는 법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 안에서도 다양한 해석과 신앙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적 틀을 만드는 법이다. 종교 내부의 신학적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어선 안 된다. 종교가 자신만의 잣대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권력의 행사가 된다.
이중잣대는 한국 보수 개신교의 반대 논리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자신들의 신념은 표현의 자유라 주장하면서,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누구든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가치에는 동의한다고 말하는 이율배반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합리화의 정치적 언술일 뿐이다.
종교의 자유는 소중하다. 하지만 그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와 충돌할 때 스스로를 성찰하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와 더불어 사는 길을 고민할 때에야 비로소 공공의 선이 될 수 있다.
‘사랑’ 없는 교회가 된 이유
오늘날 한국 보수 개신교의 차별금지법 반대 논리는, 그 신학적 오류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궁극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데서 비롯된다. 복음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선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정신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실종되었고, 대신 율법적 정죄와 도덕적 우월감이 교회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예수는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배제했던 세리와 죄인, 병든 자들과 식탁을 함께했고, 여인과 이방인,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존귀하게 여겼다. 그가 강조했던 사랑은 단지 감정적 공감이나 시혜적 나눔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받는 이들과의 연대이며, 배제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환대였다. 그 정신은 오늘날 차별금지법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한국 보수 교계는 이 사랑의 복음을 고작 ‘성적 지향’ 하나로 가려버리고 있다. ‘동성애는 죄’라는 판단 하나로, 그 사람이 겪는 고통과 차별, 억압에 대한 공감은 철저히 삭제되고, 신앙은 판단과 정죄의 무기가 된다. 이는 신앙의 이름을 빌린 폭력이며, 예수가 가르친 사랑과는 정반대의 태도다.
예수는 차별받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셨고, 바리새인의 위선에 맞서 싸우셨다. 지금 보수 개신교가 보여주는 모습은, 오히려 당시 예수가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율법주의자들과 닮아 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앞세우며 자신의 정결함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 말씀이 지향하는 사랑과 정의에는 눈감는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 수 감소와 사회적 신뢰 추락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는 단순히 세속화나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다. 복음의 본질을 외면한 교회의 자기 상실 때문이다. 교회가 다시 신뢰받기 위해서는, 사랑 없는 교회, 타인을 향한 심판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다시금 환대와 포용, 평등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고백이 빈말이 되지 않기 위해, 교회는 먼저 자신 안의 혐오를 직면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온 배제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교회가 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며,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좁은 길이다.

차별금지법은 교회를 위한 법이기도 하다
차별금지법은 단지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이 아니다. 이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차별 없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적 선언이자 약속이다. 그렇기에 이 법은 오히려 교회가 먼저 나서서 지지하고, 그 제정에 힘을 보태야 할 신앙의 과제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고,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이들을 향해 먼저 손을 내미셨다. 복음은 바로 그 사랑과 환대의 이야기이며, 예수를 따르는 교회 역시 이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그 사랑의 사회적 표현이며, 혐오와 차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과 상충된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더 이상 복음의 길을 걷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차별금지법은 교회가 혐오와 배제의 구조에 갇히지 않도록 돕는 법이다. 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신뢰를 잃어가는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세상과 싸우는 투쟁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연대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은 동의하는 자만이 아니라, 낯설고 불편한 이들까지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교회는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이제 교회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여전히 정죄의 언어로 자신을 고립시킬 것인가, 아니면 포용과 평등의 길로 나아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할 것인가. 세상은 변하고 있고, 교회는 그 안에서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존속할 수 없다. 변화는 두려움이 아니라 소명이며, 그 첫 걸음은 차별금지법이라는 시대의 요청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기독교를 위협하는 법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가 본래 지향해야 할 방향을 다시 일깨워주는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교회는 자신을 성찰하고, 사랑의 복음을 다시금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진정한 신앙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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