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지원보다 중요한 ‘독립성’… 기술혁신과 사회적 기여의 가교가 되는 고등교육기관
대학과 산업의 접점, 단순한 협력 그 이상의 가치
고등교육과 기술 발전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오늘날, 대학과 산업 간 협력은 단순한 자금 확보 수단이나 채용 통로를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혁신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대학은 산업계와의 공동 연구, 기술 이전, 교육 과정 공동 개발 등을 통해 이론과 실무의 간극을 좁히고 있으며, 산업계는 대학을 통해 우수 인재와 미래 기술을 조기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결정적 요소가 있다. 바로 대학의 ‘자율성’이다.
대학이 산업과 협력하면서도 독립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단순한 기술적 협업의 범주를 넘어서며, 사회 전반의 공공성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지식의 진화, 대학 밖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응하라
전통적으로 새로운 지식의 중심은 대학이었지만, 이제는 구글과 같은 민간 기업에서도 노벨상 수상급 연구가 나오는 시대다. 2024년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단백질 구조 해석 분야에서 기술적 돌파를 이룬 연구진에게 돌아갔는데, 그중 상당수는 구글 또는 구글 출신 연구자였다. 이는 대학이 더 이상 유일한 ‘프론티어 지식 생산지’가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학이 경쟁자를 막을 수는 없지만, 산업계와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산업 특화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은 제품 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실전 데이터를 학술지에 공개하지 않는다. 대학은 이러한 미공개 지식을 공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산학협력’을 활용할 수 있다.
학과 개편에서 교육과정까지: 산업의 요구를 반영하라
산업과의 협력을 통해 대학은 현장 중심 역량을 반영한 교육과정을 개발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대학원 과정에서 더욱 중요하다. 실제 산업에서 통용되지 않는 전통적 커리큘럼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석사학위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자격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 협력을 통해 교육 내용을 업그레이드하면 학생의 취업률이 높아지고, 대학 역시 지역과 산업계에서 신뢰를 얻는다. 이는 단지 교육과 연구를 넘어서 ‘사회적 기여’라는 대학의 제3사명(third mission) 수행으로 확장된다.
독립성과 중립성: 대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
산업계는 대학을 통해 뛰어난 인재풀에 접근하고, 최첨단 장비와 실험실 환경을 활용할 수 있으며, 공공적 검증이 이뤄지는 연구 수행을 통해 기업 내부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창의적 문제 해결 방식을 얻을 수 있다.
이때 대학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자산은 ‘중립성’이다. 기업은 내부 이해관계와 단기 성과 압박에 따라 한정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지만, 대학은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다. 특히 지속가능한 에너지, 공공보건 같은 분야에서는 이러한 중립성과 장기성이 결합될 때 혁신이 가속화된다.
대학과 산업의 협력은 팬데믹 기간 동안 그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백신 개발 과정에서의 초고속 협력은 대학의 이론 기반 연구와 산업계의 대규모 생산 및 유통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이러한 성공적 사례는 앞으로도 기후 위기, 감염병 대응 등 전지구적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모델로 기능할 수 있다.

산학 간 충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산학협력도 실제로는 다양한 장애물을 마주하게 된다. 우선 시간 개념부터 다르다. 대학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시간표와 탐색적 연구를 중시하지만, 기업은 엄격한 마감과 구체적 성과 중심의 업무 문화가 지배적이다. 이로 인해 프로젝트 착수와 진행 속도에서 마찰이 생기기 쉽다.
또한 대학 내부의 행정적 절차는 느리고 복잡해 초기 신뢰 형성 과정에서 산업계의 요구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제도적 간극을 줄이기 위해 대학은 산업계 경험이 있는 인력을 영입하거나, 외부 협력 전담 부서를 전문화할 필요가 있다.
협력 과정에서 창출되는 특허와 저작물의 권리 귀속 문제는 자주 갈등의 원인이 된다. 기업은 독점적 권리와 상업화를 원하고, 대학은 연구자에게 인정과 창업 기회를 제공하길 원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력 초기부터 IP 소유권, 수익 배분, 연구자 보상 방식을 명시한 명확한 계약이 필요하다. 이는 갈등 방지의 핵심 열쇠다.
델프트공대 화학공학과 피드코 교수는 얀센파마슈티카와의 협력을 통해 AI 기반 그린촉매 개발 분야에서 12년 이상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협력은 초기에는 자문위원 참여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논문 공동 저자, 기술 이전, 인재 교류로 확장되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니토덴코와의 협력이 있다. 피드코 교수가 10년 전 발견한 기술이 해당 기업의 관심을 끌면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후 수많은 논문과 특허로 이어졌다. 이들은 현재 지속가능 에너지 분야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대학의 정체성, 자율성이 지켜주는 균형의 축
대학이 산업과 협력하더라도 반드시 유지해야 할 핵심은 ‘자율성’이다. 재정 지원을 받더라도 연구 방향과 결과 해석에서 독립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대학이 산업계, 정부,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는 기반이며, 결국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본질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피드코 교수와 공동 저자들은 “자율성은 산학협력을 지속시키는 접착제”라며, 대학의 독립적 입장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협력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 장기적 성공의 열쇠임을 강조한다.
대학은 단지 졸업장을 제공하는 기관이 아니다. 독립성과 중립성을 유지한 채 산업과 협력할 때, 대학은 기술 혁신의 전진기지이자 사회 문제 해결의 촉매가 된다. 기업은 대학과의 협력을 통해 인재를 얻고, 대학은 산업의 실전 노하우와 문제 인식을 반영한 실용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이 상호 보완적 관계는 전 세계 고등교육기관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로 자리잡아야 한다.
앞으로 대학은 자율성을 기반으로 산업계와의 전략적 연계를 통해 사회적 가치 창출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더욱 강력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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