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의 도구로 전락한 학문 교류, 그러나 세계를 잇는 진짜 연결은 아직 가능하다
국제협력의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다
한때 고등교육의 국제화는 지구촌을 잇는 지식의 다리였다. 기후위기, 보건 불평등, 사회 양극화 등 국경을 초월한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대학 간 협력은 ‘공공선’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2000년대 초까지는 학문은 자유롭고 비경쟁적인 공공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2025년 현재, 그 이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 국가 안보 논리, 과도한 성과 중심 경쟁 체제는 고등교육의 국제협력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은 2025년 초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이제 극도의 경쟁성과 거래 중심 지정학의 시대에 깊숙이 들어섰다.”.
이 말은 더 이상 상징이 아니다. 고등교육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술 교류는 외교 전략이 되었고, 파트너십은 국가 이익의 수단으로 재편되며, 때로는 기술 안보와 산업 전쟁의 전선이 되기도 한다.
후퇴하는 국제개발지원, 남반구 대학은 고립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24년부터 ODA(공적개발원조) 삭감에 들어갔다. 미국 역시 USAID 교육지원 예산을 동결했으며, 그 여파는 즉각 나타났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대학들은 장학금 감소, 공동연구 중단, 연구장비 공급 불가 등의 사태를 겪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재정 축소가 아니다. 이는 지식 생산의 탈중심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며, 글로벌 지식 네트워크에서 남반구를 배제하는 구조적 단절을 의미한다. 국제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선진국 중심의 착취적 모델’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협력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핵심은 협력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의롭고 수평적인 방식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확인되는 남반구의 혁신력
스웨덴 KTH 왕립기술연구소(Global Development Hub)는 아프리카 대학들과 10년 넘게 협력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체감했다. 남반구 대학들은 자원 제약, 정치 불안, 기술 격차 등 복합 위기 속에서도 창의적인 생존 전략과 독창적 해결모델을 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케냐의 청년들은 고비용 장비 없이도 로컬 중심의 디지털 헬스 플랫폼을 개발했고, 나이지리아에서는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저비용 주택 모델이 공공건축 솔루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Ubuntu 철학을 교육 커리큘럼에 통합하며 ‘공동체 중심의 학문 윤리’를 정립하고 있다. 이는 협력이 단순한 ‘원조’가 아니라, 서로의 지식과 생존 전략을 배우는 상호 학습의 장임을 보여준다.
도전 기반 교육: 미래 세대가 준비해야 할 것
2050년까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아프리카에 거주하게 될 것이며, 그 다수가 청년과 젊은 성인일 것으로 전망된다. 동시에 이 세대가 맞닥뜨릴 과제는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기후 재난, 디지털 전환, 글로벌 이주, 사회 갈등 같은 복합 위기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도전 기반 교육(Challenge-driven education) 이다. 이는 단지 지식전달을 넘어, 윤리적 판단력, 문화적 겸손, 시스템적 사고, 협업적 문제 해결력과 같은 핵심 역량을 길러야 한다. 학생들이 국경을 넘어 다양한 맥락에서 실질적 문제를 해결해보는 경험은, 학문과 사회를 잇는 다리이자, 미래 세대의 시민성을 함양하는 교육 방식이다.
문제는 많은 국가들이 고등교육의 국제화를 정치적 무기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지정학·산업·기술 안보 전략과 연결되면서, 대학 간 협력은 국가 경쟁력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연구 협력을 기술 유출 위험으로 간주하고 규제하고 있으며 유럽 일부 국가들은 ‘민감 기술 분야’에 대해 외국인 연구자 비자 제한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한국, 독일은 ‘산업 생태계 보호’를 이유로 공동 연구 예산을 특정 동맹국에 한정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국제 협력을 “상호 신뢰 기반 네트워크”에서 “정치·경제적 전략 연합”으로 바꾸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소외된 지역 대학은 더욱 배제되고 있다.

협력의 재정의: 착취에서 공동 창조로
진정한 국제협력은 지식 착취(extractive model)가 아니라 공동 창조(co-creation)에 기반해야 한다. KTH의 글로벌개발허브는 다음과 같은 협력 원칙을 제안한다. 연구 의제 설정에서부터 다양한 지역 파트너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프로젝트의 성과와 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하고, 현지 기여자들을 인정한다. 공동체 기반의 지식 생산 모델을 개발한다. 협력 연구에 학부 및 대학원생의 참여를 보장하여, 차세대 인재가 글로벌 감각을 익히도록 한다.
이는 단지 이상적인 선언이 아니다. 이미 남아공, 케냐, 탄자니아, 필리핀 등지에서 다양한 대학들이 이러한 모델을 실현하고 있으며, 이는 국제 공동 연구의 새로운 윤리적 표준이 될 수 있다.
세계는 위기 속에 있다. 그러나 그 위기의 해답은 한 국가, 한 대학, 한 학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기후 변화, 보건 격차, 기술 윤리, 빈곤, 이주, 민주주의 위기… 이 모든 복합 문제는 지식의 국경 없는 연대 없이는 풀리지 않는다. “국제 협력이 경쟁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장은 이제 도덕적 요청을 넘어,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문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거점이며, 이들이 지금 협력의 철학을 재정의하지 않으면, 미래는 더욱 파편화되고 위협적으로 변할 것이다. 국제협력은 외교가 아니라 학문이기에 가능한 신뢰의 언어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결단이 지금, 여기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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