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일본경제 장기침체 분석 보고서 통해 구조개혁·정책 방향 제시… “지금 선택이 미래를 좌우한다”
‘성공의 유혹’ 너머에서 마주한 경제의 전환점
2025년 6월 한국은행은 ‘일본경제로부터 되새겨볼 교훈’이라는 제목의 심층 이슈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고도성장기를 지나 구조적 전환기에 들어선 한국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세계사적 사례로부터 어떤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보고서는 단순한 역사 비교에 그치지 않고, 자산시장 버블, 저출산·고령화, 기술구조 전환 등 구조적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한국경제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보고서는,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제적 전환기의 중심에 한국이 서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국가의 흥망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라는 노르베르그 역사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독자적인 활로를 열 것인지에 대한 분기점에 도달했음을 선언한다.
한국경제는 전후 산업화, 수출주도형 성장, 그리고 반도체와 IT 중심의 제조업 고도화를 통해 단기간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일본과 유사한 궤적을 밟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글로벌 통상질서의 균열, 중국 특수의 약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령화와 부동산 중심의 부채 누증이라는 구조적 문제 앞에 서 있다. 이러한 구조 변화는 일본이 1990년대부터 겪었던 위기와 다르지 않다.
버블과 부채, 일본의 그림자
보고서는 가장 먼저 일본 버블경제의 형성과 붕괴 과정을 조명한다. 1980년대 후반, 느슨한 금융규제와 부동산 투기를 기반으로 일본의 자산가격은 급등했다. 이른바 ‘토지불패 신화’ 속에 민간부문 부채는 GDP 대비 214%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일본은행이 금리를 2.5%에서 6.0%까지 16개월 만에 급격히 인상하면서 버블은 붕괴했고, 이내 부실채권이 은행 시스템을 마비시키며 1997년에는 은행위기로 번졌다.
이후 일본은 장기침체 국면에 들어섰다. 실업률은 5.4%까지 치솟았고, 금융기관 부실채권 손실액은 96조 엔에 달했다. 구조조정은 지연됐고, 생산성 높은 산업보다 부동산 중심의 좀비기업이 자금을 잠식하면서 자원배분 왜곡이 심화됐다. 일본은행은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지만, 저성장·저물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교훈은 “구조개혁은 타이밍이 전부”라는 점이다. 보고서는 만약 일본이 2010년부터 인구감소를 막았더라면 성장률은 0.6%p 상승하고 정부부채비율은 4.5%p 하락했을 것이라 분석한다.

인구의 역습: 고령화의 경제학
일본은 1995년을 정점으로 생산연령인구가 줄기 시작했고, 2009년에는 총인구마저 감소세로 돌아섰다. 고령화율은 2023년 기준 30%를 넘었으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같은 인구구조 변화는 성장률 저하, 수요 위축, 복지지출 확대를 초래했다.
한편 일본 정부의 대응은 느렸다. 노동시장 개혁과 여성·고령층의 경제참여 확대는 2010년대 들어서야 본격화되었으며, 외국인 노동자 유입 확대는 더 늦은 2020년대부터 시행되었다. 그 사이 일본은 취업빙하기, 청년층 미취업, 기대수명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재정압박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렸다.
보고서는 한국도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경고한다. 한국의 생산연령인구는 이미 2017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총인구 역시 2020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있다. UN은 한국의 고령화율이 2024년 20%를 돌파해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한다. 노동투입의 성장률 기여도는 2000년대 초반의 30% 수준에서 급감했으며, 인구 감소로 인해 취업자 수 증가에 기대할 여력은 거의 사라졌다.
한국은행은 보고서에서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고령화가 고착되기 전에 구조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경력단절 여성, 은퇴 후 재취업 가능성이 있는 숙련 고령층, 잠재적 노동시장 진입자인 청년 ‘쉬었음’ 인구에 대해 체계적인 재교육과 노동유인을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본다. 또한 외국인 노동력 유입은 단순히 ‘일손 부족’ 대응이 아니라, 산업 구조 전반의 지속가능성과 연결해 장기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기술구조의 함정: 수직통합에서 수평분업으로
1980~90년대 일본 제조업은 세계를 선도했다. 철강, 자동차, 반도체, 정밀기기 등에서 품질과 기술력을 무기로 미국과 유럽 시장을 장악했다. 이 성공의 이면에는 정부의 보호무역, 저리 자금 공급, 기업간 긴밀한 수직계열화와 같은 ‘일본식 시스템’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글로벌 경제는 디지털화·표준화의 물결 속에 수평분업으로 전환되었다. 중국은 WTO 가입(2001년)을 기점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생산기지로 부상했고, 미국은 고부가가치 기술·서비스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겼으며, 글로벌 가치사슬(GVC)은 복잡하게 재편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일본은 둔감했다. 기업들은 여전히 국내 중심, 수직계열화 모델을 고수했고, 과거 성공경험에 대한 집착은 신사업 전환과 창업을 지연시켰다. IT자본 축적은 경쟁국보다 뒤처졌으며, 고령화와 기업의 보수적 문화는 디지털 전환에도 제약이 되었다.
보고서는 일본의 실패가 ‘신기술을 몰라서가 아니라, 아는 데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전자기기, 반도체 등 주력 품목에서 한국과 중국의 추격을 허용한 것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전략 부재였다. 일본은 GVC 상에서 ‘업스트림(중간재 수출)’ 국가로 남기를 원했지만, 후방참여는 약했고 시장 전략도 좁았다.
한국, 어디로 갈 것인가: 성공의 유혹을 넘어
보고서는 한국이 이제 유사한 경로에서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반도체·IT 중심의 제조업 경쟁력에 안주할 것인지, 아니면 AI·바이오·디지털 서비스 등 새로운 산업구조로 전환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현재 한국은 중국 특수의 약화, 반도체 글로벌 경쟁 심화, 수출의 서비스화 등 복합적인 구조변화에 직면해 있다. 반면, 기회도 존재한다. K-콘텐츠의 소프트파워, 의료·교육 분야의 디지털화 가능성, 제조업의 고도화 역량 등은 새로운 수출전략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I·반도체·로봇 등 국가 전략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한 인센티브, 그리고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IT, 의료, 콘텐츠 등)에 대한 규제 완화와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과 정부 모두 과거 성공방정식에서 벗어나 ‘창조적 파괴’를 감행할 용기를 갖는 것이다.
한국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우리는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성장서사를 써 내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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