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 역량, 대학이 키워야 할 미래의 조건 – 폴란드 사례로 본 고등교육의 변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더 이상 환경학 전공자만의 과제가 아니다. 기후위기, 사회적 불평등, 기업의 윤리경영 등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힌 오늘날, 대학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을 넘어 미래의 책임 있는 시민과 전문가를 길러내는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연합과 유네스코는 고등교육기관에 ‘지속가능발전 교육(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ESD)’의 중심축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구호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은 과연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이끌고 있을까? 폴란드 대학을 대상으로 한 실증 연구는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논문 「The Role of Universities in Sustainability-Oriented Competencies Development」(Sady et al., 2019)는 폴란드 대학들이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교육과 비교과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역량을 길러주고 있으며, 학생들은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참여하는지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폴란드 대학, CSR·지속가능 과목 도입은 활발… 대학원은 미흡
연구진은 폴란드의 23개 공립대학(경제·경영계열 운영 대학)을 분석해, 지속가능발전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관련 교육과정 운영 현황을 살폈다. 그 결과 70% 이상의 대학이 CSR 또는 윤리경영 관련 정규 과목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는 학사·석사·박사 등 모든 과정에 걸쳐 분포돼 있었다. 그러나 대학원 수준에서의 전문 교육은 아직 제한적이었다. CSR 관련 대학원 전공을 운영 중인 대학은 단 3곳에 불과했으며, 다수는 전공과정이 아닌 교양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부 대학들이 노년층(University of the Third Age), 청소년(Youth Academies), 아동 대상의 프로그램(Children’s Universities)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와의 지속가능한 관계 형성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학의 제3사명(third mission)’인 지역 연계와 사회참여 역할을 실천하는 사례로 주목된다.
비교과 활동, 지속가능 역량 함양의 숨은 주역
대학이 운영하는 비교과 활동은 정규수업 외의 경험학습 공간으로, 지속가능 역량을 키우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설문에 응답한 크라쿠프 지역 3개 대학 재학생 261명 중 53%가 대학의 비교과 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자원봉사(30%), 학술 동아리 및 학생조직 참여(27%), 캠퍼스 내 행사 기획(25%) 등이 주요 활동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PRME(책임경영교육원칙, Principles for Responsible Management Education)에서 강조하는 6대 핵심 역량—팀워크, 윤리의식, 커뮤니케이션, 글로벌 마인드, 리더십, 문제 해결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특히 국제기구(AIESEC, ESN 등) 참여는 문화 간 소통 능력(intercultural skills), 자원봉사는 사회적 책임감(social responsibility)과 공감(empathy)을 키우는 기회가 된다.
‘나를 위한 공부’에서 ‘세상을 바꾸는 공부’로
학생들이 비교과 활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계발’이 60% 이상으로 가장 높았고, 이어 ‘경력 관리를 위한 이력서 강화’(45%),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54%), ‘타인에 대한 선한 영향력’(40%)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동기들은 모두 지속가능발전 역량의 핵심 조건과 연결돼 있다. 즉, 지속가능성은 더 이상 ‘이타적 선택’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삶’의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응답자들이 향후 개발하고자 하는 역량은 △외국어(26%) △프로그래밍 등 디지털 기술(14%) △자기 표현력 및 이미지 구축(14%) △산업 지식(11.5%) △자기 주장력(10%) 등이었다. 지속가능 역량이란 단지 환경이나 윤리적 이슈에 대한 이해를 넘어, 협업, 소통, 자기주도 학습 역량 전반을 포함하는 통합적 개념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요에 맞춰, 학생들은 △워크숍(75.5%) △프로젝트 참여(58.2%) △자격 교육(54.4%)을 가장 효과적인 역량 개발 수단으로 꼽았다. 단순 강의보다 실전형 학습이 더 선호된다는 점은 교육 방식의 전환 필요성을 시사한다.
지속가능 역량, 기업도 원한다
학생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지속가능 역량은 △사회 참여 및 주도성(66.8%) △지속적 학습의지(52.2%) △팀워크(51%) △책임감(50.2%) △커뮤니케이션(42.3%) △유연성과 적응력(41.9%) 등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기업이 인재 채용 시 요구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실제로 맥킨지, 세계은행, 월드이코노믹포럼 등의 보고서에서도 미래 인재에게 요구되는 역량으로 ▲문제 해결력 ▲비판적 사고 ▲공감 능력 ▲팀워크 ▲디지털 활용 능력 등을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지속가능성과 경제적 성공이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폴란드 대학의 한계 – 대학원 과정 부족, 실무 연계 미흡
연구는 긍정적인 사례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23개 대학 중 단 3개 대학만이 CSR 또는 지속가능 관련 전문 대학원 과정을 운영 중이며, 실무 중심 교육이나 기업 연계 프로젝트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 다국적 기업의 CSR 전문가 수요가 급증하고 있음에도 대학은 이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러한 격차는 곧 역량의 미스매치로 이어질 수 있으며, 대학과 산업계 간의 협력 강화, 실무형 워크숍 확대, NGO·공공기관과의 파트너십 구축이 시급한 과제로 제시된다.
“Tell me and I forget. Show me and I remember. Involve me and I understand.” 지속가능발전 교육은 암기식 강의가 아니라 체험과 참여 기반의 학습이어야 한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지역사회, 환경, 윤리 이슈에 참여하고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진정한 지속가능 역량이 형성된다. 이는 교육 혁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대학은 커리큘럼을 재설계하고, 비교과 활동을 장려하며, 교수자 또한 지속가능한 가치와 윤리를 실천하는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대학은 지속가능한 미래의 엔진이 될 수 있는가?
폴란드 사례는 제한적인 국가·지역 맥락에서 출발했지만, 지속가능 역량을 어떻게 정의하고 키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로 작동할 수 있다. 특히 지속가능성을 단지 환경이나 윤리의 문제로만 좁게 보지 않고, 사회·경제 전반에 걸친 역량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는 다른 국가의 고등교육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열쇠는 오늘날의 학생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길러내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이제 대학은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가치 창출자’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정, 비교과 활동, 산업계 협력, 교수법 등 모든 차원에서의 총체적 혁신이 필요하다.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대학의 역할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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