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압박·단기계약이 일상이 된 유럽 고등교육계… 유럽대학협회, 경력 다양성·포용성·사회적 책무 강조하며 개혁의 이정표 제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학문 경력, 유럽이 먼저 움직이다
한때 가장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직업 중 하나로 여겨졌던 대학 교수직이 최근 유럽 고등교육계에서 점점 인기를 잃고 있다. 박사학위를 마쳐도 정규직 교수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며, 많은 초기 경력 연구자들은 단기계약과 불투명한 승진 기준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 과중한 업무와 점점 강화되는 성과 압박, 연구 중심의 평가 시스템은 교육과 지역사회 기여 등 다른 중요한 역할을 가치 절하하는 경향까지 낳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대학협회(European University Association, EUA)는 2025년 5월 「지속 가능한 학문 경력을 위한 5대 원칙(Key Principles for Attractive and Sustainable Academic Careers)」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학문 경력을 단순한 고용 계약이 아닌 ‘지속가능하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전문 활동’으로 재정의하며, 고등교육기관이 어떤 방향으로 인사정책을 개혁해야 할지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보고서는 교육, 연구, 사회적 책무라는 대학의 세 가지 핵심 임무를 경력 구조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번 보도기사는 해당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유럽 대학들이 어떻게 경력 구조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향후 전 세계 고등교육 정책에 어떤 시사점을 던지는지를 서술체로 분석한다. 각 원칙별 핵심 내용을 하나씩 짚으며, 마지막에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고등교육계가 참고할 수 있는 방향도 함께 제시한다.

전문성 개발과 공정한 보상: 학문적 질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
EUA 보고서가 첫 번째 원칙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전문성 개발의 기회 보장과 우수성에 대한 명확한 보상 체계 구축’이다. 대학은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고 유지하기 위해 교육, 연구, 행정, 지역사회 기여 등 다양한 업무 영역에 필요한 역량을 단계별로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역량 개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보고서는 특히 ‘성과’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보상체계가 학문 활동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연구실적 위주의 평가 방식은 교육과 사회 참여 등 대학의 또 다른 사명들을 무시하게 만들고, 이는 결과적으로 대학의 공공성마저 약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대학은 학문적 질을 정의할 때 양적 지표만이 아니라 질적 기여와 공동체 내 협력, 리더십, 멘토링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해야 하며, 이를 명시적으로 정책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더불어 단기계약의 남용도 학문 경력의 지속가능성을 해치는 주요 요소로 지적됐다. 보고서는 프로젝트나 출산휴가 대체 등 특수한 상황에는 단기계약이 불가피할 수 있으나, 장기적인 고용안정과 경력 전망이 없는 구조는 인재의 이탈을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대학은 자체 재원을 활용해 외부 펀딩에 의존하지 않는 장기 고용 구조를 마련하고, 명확한 승진 기준과 생활 가능한 수준의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된다.
이처럼 첫 번째 원칙은 단지 개인의 성장을 위한 조언이 아니라, 대학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시스템적 기반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양성과 유연성: 경력 다양성이 대학을 살린다
두 번째 원칙은 ‘대학은 다양성을 반영하고, 다양한 경력 경로를 제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럽의 대학은 각각 고유한 역사와 지역, 규모,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구성원인 교원들의 경력 경로와 직무 역할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보고서는 특정한 경력 모델이나 업적 유형만을 중심으로 경력을 평가하는 관행이 오히려 대학의 혁신과 사회적 역할을 저해한다고 경고한다.
보고서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현대 대학은 전통적인 교수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연구, 교육, 행정, 지역사회 협력, 기술 이전 등 다양한 활동이 상호 연계되고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경력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교육 방법을 개발하거나, 시민과학 프로젝트를 이끄는 교수, 산학협력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연구자가 기존의 논문실적 중심 평가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는 대학이 실제 사회적 역할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EUA는 이러한 경직된 평가 구조를 바꾸기 위해 보다 폭넓은 경력 평가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업 경험, 지역사회 기여, 혁신적인 수업 설계, 다양한 직무 간 이동 경험 등은 정량적 연구실적 못지않게 대학의 임무에 기여하고 있으므로, 이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방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대학은 경력 이동의 유연성을 보장하여 산업계, 정부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다시 학계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대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지식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내부 구성원의 다양성과 다층적 역량을 인정하고, 이를 반영한 경력 제도 개편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교원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을 넘어서, 대학이 지속 가능한 조직으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협력의 문화와 학문적 시민권: 경쟁을 넘어선 공동체 지향
세 번째 원칙은 대학이 단순한 개인 성취의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상호 협력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보고서는 학문적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경쟁이 개인 간 고립을 부추기고 조직 내 분열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학문 경력을 위해서는 상호 지원, 멘토링, 책임 있는 리더십 등 ‘학문적 시민권(academic citizenship)’의 가치가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제도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학문적 시민권이란 단지 연구나 교육 성과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후속 세대의 양성을 위한 조언과 멘토링, 공동의 과제 수행,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행정적 역할, 그리고 공식·비공식적인 리더십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이는 단기적인 성과주의를 넘어, 학문 공동체로서의 대학이 지향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보고서는 스웨덴의 찰머스 공과대학처럼 ‘학문적 시민권’을 승진 심사 기준에 포함한 사례를 소개하며, 이 같은 제도적 인정이 교내 문화와 협업 구조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협업적 문화 조성을 위해서는 제도적 보상 체계 외에도 대학 운영 전반에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 병행되어야 한다. 구성원들이 어떤 형태의 협력과 지원이 기대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기여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학은 단기성과 중심의 압박 속에서도 전 생애 주기의 경력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여, 조교수부터 정년 보장 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 원칙은 대학이 인간 중심의 조직이자 지적 공동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단지 누가 더 많은 논문을 썼는지를 넘어, 누가 더 좋은 동료였고, 누가 더 많은 후속 세대를 길러냈으며, 누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기여했는지를 평가하는 방식이 제도화될 때, 대학은 비로소 미래지향적이고 지속가능한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조기 경력 연구자에 대한 투자: 학문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핵심 전략
네 번째 원칙은 조기 경력 연구자들에 대한 실질적 투자와 구조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박사과정생과 박사후 연구원들은 대학 연구생태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인력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안정하고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불확실한 미래, 단기계약의 연속, 과도한 업무 부담, 제한된 경력 개발 기회 등 여러 측면에서 구조적인 제약을 경험하며, 이는 결국 유능한 인재의 학계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EUA는 조기 경력 연구자에 대한 진정성 있는 지원이 단지 개인의 경력 발전을 위한 시혜적 조치가 아니라, 고등교육기관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전략적 투자라고 강조한다. 특히 보고서는 고등교육기관이 단기적 연구비 수주 중심의 경력 모델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고용 안정성과 경력 설계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단기 펀딩을 조합하여 중장기적 경력 경로를 설계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으며, 이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다.
또한 보고서는 조기 경력 연구자에게 현실적이고 투명한 경력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승진 기준과 평가 방식, 경력 전환 가능성 등 핵심 정보가 명확히 제시되어야 하며, 이는 단지 ‘경로 안내’에 그치지 않고, 조직이 구성원에 대해 지닌 책임의 표현이기도 하다. 특히 개인의 노력과 희생에만 경력의 성패를 맡기지 않고, 조직 차원에서 제도적·문화적 지원을 제공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는 공정성과 포용성을 높이는 수단이 된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과도한 업무 부담과 일-생활 균형의 붕괴가 조기 경력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위협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높은 내적 동기를 가진 집단이지만, 오히려 그 열정이 번아웃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에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대학은 조기 경력 연구자의 업무 강도를 점검하고, ‘연결 해제권(right to disconnect)’과 같은 권리를 보장하며, 멘토링 제도와 조직문화 개선을 통해 보다 지속가능한 경력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이 원칙은 단기 계약의 반복을 줄이고, 조기 경력자들이 장기적인 비전 속에서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체계를 구축하라는 대학에 대한 요구이다. 더불어 이는 전체 학문 생태계가 보다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관문이기도 하다.
대학의 사회적 책무와 경력 설계: 사회와 호흡하는 학문 생태계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원칙은 학문 경력이 단지 대학 내부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연결 속에서 설계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이나 연구소를 넘어, 지식의 생산과 전달, 그리고 사회 변화를 촉진하는 중추적인 사회적 기관이다.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육·연구·사회참여라는 세 가지 사명을 경력 제도 전반에 반영하는 접근이 필수적이다.
보고서는 대학의 모든 경력 경로가 각자의 미션과 사회적 기대에 부합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교육을 통해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역량, 연구를 통해 혁신을 이끌어내는 능력, 그리고 시민사회와 협력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 등은 모두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더불어 이러한 가치를 경력 평가의 기준으로 명확히 제시하고, 입직 단계부터 은퇴까지 지속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학과 사회의 연결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도 병행되어야 한다. 인사팀, 교육개발센터, 산학협력단, 대외협력실 등 다양한 내부 부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이들이 교원과 연구자의 사회적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역 사회와의 협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교수에게 연구 지원과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학생 대상 사회참여형 수업을 개발한 교원에게도 교육성과로서의 인정을 부여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학내 구조의 조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대학이 더 이상 사회로부터 고립된 ‘탑 속의 상아탑’이 아니라,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적극적인 파트너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학문 경력 또한 그 흐름 안에서 재정의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대학은 명실상부한 사회적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

유럽의 제안, 전 세계 고등교육이 주목해야 할 경고
유럽대학협회(EUA)가 제시한 5대 원칙은 단지 유럽 고등교육계 내부의 자정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점점 심화되고 있는 고등교육의 위기—성과 중심주의, 단기계약의 만연, 과도한 경쟁, 경력 경직성, 사회와의 단절—에 대해 구조적 해법을 제시하는 하나의 청사진이다. 보고서는 학문 경력이 단순히 실적을 쌓는 경쟁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후속 세대를 양성하며, 협력 속에서 발전하는 공동의 여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대학이 지속 가능하려면 학문 경력도 지속 가능해야 한다. 이는 개인에게 안정성과 성장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사회 변화와 대학 본연의 사명을 반영하는 구조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경쟁과 협업, 개별성과 공동체성, 학문적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형은 대학의 생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유지에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고등교육계 또한 유사한 위기를 겪고 있는 만큼, 유럽의 사례는 더없이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특히 조기 경력 연구자 처우 개선, 평가 기준 다변화, 사회참여 확대 등의 내용은 국내 대학들도 즉각 적용 가능한 항목들이다. 이 보고서가 일회성 선언문에 그치지 않고, 실제 대학 현장에서 정책과 문화로 구현되기를 기대하며, 이러한 논의가 국내에서도 보다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학문경력 #유럽대학 #교수직개혁 #조기연구자 #고등교육정책 #지속가능한대학 #사회적책무 #학문적시민권 #대학혁신 #연구평가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