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가거나, 연구결과를 나눠주는 정도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로 의미 있는 협력은, 그렇게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최근 네덜란드의 한 대학이 그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대학은 어떻게 지역과 함께 진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역은 대학과 협력하면서 무엇을 얻어야만 할까?’
이 대학은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학생들이 수업을 들으면서 지역사회 문제를 과제로 삼고, 지역에 있는 기관이나 주민들과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수업은 두 달 남짓으로 짧았고, 학생들은 관련 경험이 많지 않았다.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고립, 정신건강, 홈리스 문제 등은 오래된 뿌리를 가진 복합적이고 변화무쌍한 문제였다. 대학 수업 하나로는 그 문제의 단면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대학은 멈추지 않았다. 3년 동안 다양한 시도와 실패, 그리고 점진적인 조정을 통해 하나의 실험을 완성했다. 이 실험을 통해 지역사회와 대학이 함께 일하는 세 가지 방식이 드러났고, 각각의 방식이 가진 강점과 한계도 함께 확인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 ‘호혜성’이라는 단어가 단지 예의 바른 표현이 아닌, 진짜 협력의 핵심 원칙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도와주는 대학’이 아니라 ‘함께하는 대학’
이 실험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VU대학(Vrije Universiteit Amsterdam)에서 진행되었다. 이 대학은 학부 과정의 모든 학생들이 지역사회와 관련된 과제를 한 번쯤은 경험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시스템을 갖췄다. 이를 ‘커뮤니티 서비스 러닝(CSL)’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단지 시스템만 만든다고 협력이 저절로 잘 되는 것은 아니다. VU 대학은 여기에 하나의 질문을 덧붙였다. ‘대학은 지역을 도와주는 존재여야만 하는가? 아니면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동반자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호혜성(reciprocity)’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쉽게 말해, 대학과 지역사회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연구진은 이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거래적 호혜성’이다. 학생들이 리포트나 제안서를 만들고, 지역기관은 그걸 받아 활용하는 식이다. 비교적 간단하고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관계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변형적 호혜성’이다. 여기서는 협력하는 과정 자체가 바뀐다. 대학도 배우고, 지역기관도 생각이 바뀐다. 서로가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이런 경우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진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VU 대학의 실험은 바로 이 ‘변형적 호혜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를 중심에 두고 진행되었다.

수업, 파트너, 그리고 문제… 세 가지로 나뉜 접근
연구진은 3년 동안 다양한 시도를 하며 세 가지 방식의 협력 모델을 정리했다. 각각은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달랐다.
1. 수업 중심 접근 – ‘단기성과’의 가능성과 한계
첫 번째 방식은 개별 수업이 중심이 되는 모델이다.
예를 들어, ‘도시의 건강’을 주제로 한 수업이 있었다. 이 수업에서는 특정 지역의 보건복지 문제를 과제로 삼고, 학생들이 직접 해당 지역의 주민이나 기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그에 대한 분석과 제안서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처음 이런 프로젝트를 해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문제가 너무 광범위하게 설정되었고, 결과물도 다소 표면적인 수준에 그쳤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점차 문제를 세분화하고, 학생들이 자신이 만들 산출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바꾸자 결과물의 수준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 보고서 외에도 인포그래픽, 팟캐스트, 제안 카드 등 다양한 형식이 나왔고, 지역 파트너들도 이를 실무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방식은 시간과 범위의 한계가 뚜렷하다. ‘작은 시도’ 이상의 역할을 하기에는 구조적 제약이 있다. 특히 복잡한 문제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거나 장기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는 다소 부족하다.
2. 파트너 중심 접근 – 한 기관과 깊이 있게
두 번째 방식은 특정 지역기관이 중심이 되는 모델이다.
예를 들어, 암스테르담의 한 사회복지기관이 ‘시설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살아가는 돌봄 전환’이라는 주제를 대학에 제안했다. 이 문제는 단기간에 끝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고, 단순한 해결책이 없었다.
VU 대학은 이 문제를 여러 과목에 걸쳐 다루도록 했다. 한 과목에서 나온 결과를 다음 과목에서 이어받는 식이었다. 학생들은 이전 수업에서 나온 자료를 참고해 더 깊은 분석을 시도했고, 기관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내부 연구 아젠다를 세웠다.
이 방식의 강점은 지식이 누적된다는 점이다. 매 학기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안이 쌓이면서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 역시 자신의 과제가 실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동기를 느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관계가 몇몇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주요 담당자가 바뀌거나 조직 개편이 있을 경우, 흐름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주제 중심 접근 – 문제 자체를 중심에 두다
세 번째 방식은 아예 문제 자체를 중심에 두고, 여기에 다양한 기관과 수업을 연결하는 모델이다.
예를 들어, 지역주민과 기관들이 함께 모여 ‘고립감’이라는 문제를 선정했다. 이 문제는 노인, 청년, 이주민, 정신질환자 등 다양한 집단에 걸쳐 있었고, 그 원인과 해법도 단순하지 않았다.
VU 대학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수업을 연결했다. 어떤 수업은 청년 고립을, 어떤 수업은 돌봄 노동자의 고립을 다뤘다. 각각의 결과는 다시 모여 큰 그림을 그렸다.
무엇보다 이 모델은 단순한 리포트 작성이나 발표에 그치지 않았다. 기관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고, 학생들이 만든 자료를 함께 검토하며 새로운 주제를 설정했다. 결국 ‘고립에 대한 낙인을 지우자’는 공동 목표가 설정되었고, 포토 전시회와 같은 지역행사로 이어졌다.
이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조율할 것도 많다. 하지만 진짜 문제를 중심에 두고 함께 배워나간다는 점에서, 가장 변형적 호혜성에 가까운 모델이었다.
진짜 협력은 ‘함께 배우는’ 경험에서 나온다
이 실험을 통해 VU 대학은 세 가지 중요한 전략을 발견했다. 1.복잡한 문제는 작게 나눌수록 잘 다룰 수 있다. 2.지속적인 피드백과 관계 조율이 중요하다. 3 지식은 쌓이고, 연결되어야 한다. 이 전략들은 수업 하나하나의 효과를 넘어서, 대학과 지역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를 진화시켜 나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VU 대학의 실험은 대학이 지역사회 문제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이 어떻게 지역 안으로 들어가 함께 배우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학생들이 만든 리포트가 정책이 되거나, 인포그래픽이 실제 캠페인에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학과 지역이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역은 대학을 지식의 공급자가 아닌 듣는 존재로 받아들였고, 대학은 지역을 학습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이 실험은 묻고 있다.
“우리는 진짜로 함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산출물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 속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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