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파도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지식의 항로 – 책임 있는 AI 리터러시를 위한 도서관의 진화
왜 지금 ‘도서관’을 다시 말하는가
한때 ‘조용한 책의 창고’로 불리던 대학도서관이, 이제는 AI 교육과 디지털 리터러시의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다.
2025년 6월, 미국 스토니브룩대학교(Stony Brook University)는 대학 도서관에 ‘AI 책임활용 전담 디렉터(Director of AI)’를 임명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서관 모델을 공개했다. 이는 단지 한 대학의 실험이 아니다. 생성형 AI가 교육의 지형을 뒤흔드는 지금, 도서관은 기술과 사람, 정보와 윤리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서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AI는 더 이상 공학 전공자들만의 기술이 아니다. 인문, 사회, 예술, 의학, 심지어 체육 전공자들조차 논문 작성, 자료 정리, 실험 설계, 콘텐츠 생산에 AI를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AI 활용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이, ‘무비판적 AI 사용’과 ‘막연한 공포’라는 두 극단이 공존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정보의 중립성과 교육적 책임을 함께 지닌 공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학도서관이 해야 할 일이다.
AI 시대, 대학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AI는 빠르다. 너무 빠르다. ChatGPT가 등장한 지 불과 2년, 대학은 여전히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는 중이고, 학생들은 이미 수업과 과제를 AI로 수행하고 있다. 몇몇 교과는 AI를 아예 커리큘럼에 편입하고 있지만, 대다수 교수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한다. 무엇이 표절인지, 어디까지가 협업인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조차 정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AI는 ‘기술’이 아니라 교육의 원칙을 시험하는 도구가 된다. 대학은 지식뿐 아니라 판단의 능력, 윤리적 감각, 비판적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야 한다. 문제는 이것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다. 바로 여기서 도서관의 역할이 부각된다.
도서관은 교수와 학생, 전공과 비전공, 학문과 실용을 가로지르는 공간이다. AI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툴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데이터를 믿을 것인가,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함께 묻는 과정이다. 이는 수업 시간의 지시보다, 도서관에서의 탐색과 상담, 협업과 토론을 통해 길러지는 힘이다.
혼란과 과장 속에서 ‘중심’을 지키는 공간
지금의 AI 열풍은 기술 자체보다 기술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사회적 현상에 가깝다. 언론은 AI가 직업을 대체할 것이라 말하고, 기업은 AI를 앞세운 혁신과 수익 모델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생과 교사는 이 기술이 학습과 연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갖지 못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혼란 속을 헤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도서관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정보의 ‘맥락’을 다루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 스토니브룩대학 도서관의 AI 디렉터 니콜라스 존슨는 인터뷰에서 “도서관은 모든 구성원에게 열려 있는, 가장 중립적이고 다학제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술이 특정 전공, 특정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도록 하고, AI 활용에 대한 민주적 접근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도서관이 수행할 수 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도서관이 “잘 쓰는 법”을 가르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AI 기술은 급격하게 보급되지만, 그 활용은 책임, 맥락, 목적, 평가, 결과의 해석이라는 고차원적 역량을 요구한다. 이는 단순한 기능교육으로는 불가능하다. 도서관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지고 해석하는 힘’을 훈련시키는 공간이다.
기술보다 질문을 가르치는 공간
AI 시대의 진짜 과제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가’,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에 있다. 도서관은 바로 이 질문을 설계하고, 검증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AI를 활용한 에세이 생성은 쉬워졌지만, 그 안에 담긴 논거의 타당성, 데이터의 출처, 편향의 가능성은 여전히 인간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판단력은 수업 시간의 일방향 전달만으로는 길러지지 않는다. 검색, 비교, 요약, 인용, 비판, 종합이라는 일련의 리터러시 훈련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도서관은 이 과정을 학생이 직접 수행하고, 피드백을 받고, 다시 시도해볼 수 있는 유일한 학습 공간이다.
더 나아가, 도서관은 특정 수업이나 전공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전교적 관점에서 AI 활용 가이드를 조정할 수 있는 중립적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교수자는 자신만의 AI 활용 기준을 만들고 싶어도, 학내 지침이 없거나 공유되지 않으면 결국 방어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도서관은 교직원과 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갈등을 조율하고 실천 지침을 만들 수 있는 허브로 기능할 수 있다.
스토니브룩대의 AI 디렉터는 이를 “커뮤니티 오브 프랙티스(community of practice)”로 표현했다. 즉,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같이 다루는 문화’를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AI 리터러시: 윤리, 책임, 맥락을 아우르다
AI를 활용한 학습이 진정한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도구 사용법을 넘어서는 리터러시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AI 리터러시란 단지 ‘AI를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어떻게, 언제, 무엇을 위해,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복합적 역량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리포트를 쓰기 위해 ChatGPT에 글감을 묻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어떤 자료를 기반으로 작성되었는지, 해당 답변이 어떤 편향을 내포하고 있는지,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서부터 표절이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학습이 아니라 오용이 된다.
AI 리터러시 교육은 이런 질문을 학생 스스로 던질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스토니브룩대 도서관은 이 점에서 기존의 정보활용 교육(information literacy)을 AI 리터러시로 확장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단지 AI 툴 목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내놓은 답을 ‘검토하는 시각’을 함께 교육하는 것이다.
특히 데이터 편향, 알고리즘의 불투명성, 프라이버시 침해, 저작권 문제 등은 단순한 기술문제가 아니다. 이는 디지털 시민성, 정보윤리, 사회정의 감수성을 포함하는 고차원의 학습 영역이다. 도서관은 바로 이런 복합적 감수성과 분석력을 훈련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도서관은 어떻게 실천하는가 – 새로운 모델들
스토니브룩대 도서관은 말뿐이 아니다. 이미 AI 리터러시 실천을 위한 다양한 시스템을 가동 중이며, 그 중심에 ‘AI 디렉터’가 있다. 그는 도서관과 대학 전체를 연결하는 AI 허브 역할을 맡아, 학생과 교직원 모두를 위한 전략적 교육과 지원을 기획하고 있다.
실제 도서관 내부에는 AI 리서치 어시스턴트 ( 학생이 자연어로 질문하면 관련 학술자료와 도서관 콘텐츠를 검색해주는 도구), AI 기반 북 파인더 ( 학생이 찾는 책의 위치나 관련 주제 서적을 인공지능이 안내), 고성능 컴퓨팅 워크스테이션 공간 ( 모델 개발, 텍스트 생성, 실험 설계 등을 위해 특화된 장비와 공간을 제공) 같은 AI 기반 서비스가 개발되고 있다.
또한, 도서관은 AI 실습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교내 다양한 학과와 협업하여 융합형 프로젝트 기반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인문대학 학생이 자신의 전공 글쓰기와 AI 도구를 접목할 수 있도록 돕고, 공대 학생은 윤리적 문제를 고려한 알고리즘 설계를 논의하는 세션을 도서관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
가장 주목할 점은, 도서관이 단순한 ‘기술 안내자’가 아니라 ‘해석과 성찰의 공동체’를 기획하는 공간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을 향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술을 둘러싼 질문을 묻고 가르치고 논쟁하는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이다.
우리 대학도서관에 필요한 변화
AI 시대를 맞이한 한국의 대학도서관은 여전히 낡은 구조와 역할의 틀에 갇혀 있다. 많은 도서관이 여전히 ‘자료 관리’와 ‘열람 지원’에 머무르고 있으며, AI에 대한 교육이나 연구지원은 일부 이공계열 이용자에 한정되어 있다. 도서관 공간 자체도 ‘공부하는 장소’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탐색, 협업, 실험, 질문의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도서관은 다시 한 번 교육 혁신의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보의 보관자가 아니라, 정보를 해석하고 윤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중개자, 지식 생산의 가이드를 제공하는 동반자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전환이 필요하다.
AI 리터러시 교육의 정규화: 학과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접근 가능한 AI 윤리, 활용, 데이터 감수성 교육 프로그램 설계
융합형 정보서비스 제공: 학과별 특성을 고려한 AI 활용 가이드, 맞춤형 리서치 컨설팅, 멘토링 세션 도입
공공성과 중립성을 활용한 캠퍼스 내 갈등 중재자 역할: 기술 남용, 표절, 생성형 도구 활용 갈등 등에서 신뢰받는 조정자 역할 수행
전문 사서의 재훈련 및 역할 확대: 기술 기반 정보매개자, AI 윤리 상담가, 데이터큐레이터로서의 전문성 강화
이런 변화는 단지 기술 수용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이 지향해야 할 교육 철학과 공동체 운영 방식의 재설계로 이어져야 한다. AI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그 도구를 다루는 방식은 공동체의 문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 문화의 출발점은 도서관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도서관은 더 이상 조용한 책장 속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질문이 살아 있고, 정보가 살아 있는, 가장 역동적인 교육현장이 되어야 한다. 특히 AI와 같은 전방위 기술이 교육을 재편하는 지금, 대학도서관은 다시금 지식의 문턱을 낮추고, 윤리의 기준을 높이며, 학생과 교수 모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스토니브룩대의 사례는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기술에 휘둘리지 않고, 기술을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면, 그곳은 강의실이 아니라 도서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검색으로, 검색에서 생성으로 넘어온 시대, 정보는 더욱 손쉽게 다가올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을 믿을지 말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이 중요한 판단을 훈련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도서관일 것이다.
AI 시대에도, 아니 AI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AI시대도서관 #AI리터러시 #대학혁신 #정보윤리교육 #스토니브룩도서관 #생성형AI #사서의진화 #교육플랫폼 #디지털시민성 #윤리적AI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