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대신 ‘단절’을 가르치는 사회
2025년,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와 함께 배우고 있는가. 이 질문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전 세계는 팬데믹과 전쟁, 기후위기와 양극화, 혐오와 배제의 확산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청년층은 지역과 세대, 이념과 성별로 나뉘어 서로를 향한 적의를 키우고, 교육은 여전히 경쟁과 선별의 도구로 기능한다. 학교와 대학은 사회를 재현한다. 그리고 그 사회는 지금, 점점 더 닫혀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이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일까? 글로벌 러닝(Global Learning)은 이 물음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외국어를 배우거나 해외에 나가는 ‘국제화’가 아니다. 글로벌 러닝은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타인의 연결을 자각하며, 더 넓은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한 마디로 말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어야만 살아남는다
글로벌 러닝이 제안하는 중심 개념은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이다. 이는 어떤 낭만적 구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냉엄한 현실 인식이다. 기후위기를 보라. 한반도의 탄소배출은 동남아시아의 폭우로, 유럽의 열파는 아프리카의 식량위기로 이어진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수출 규제가 다른 나라의 제조업을 멈추게 하고, 멀리 떨어진 분쟁이 세계 공급망을 흔든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가는 학습자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여기’뿐 아니라 ‘저기’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구적 관점과 지역적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 사고력, 이것이 글로벌 러닝이 추구하는 역량이다.
한국 교육은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글로벌 러닝은 다르게 묻는다. 왜 이런 방식이 유지되어 왔는가? 이 문제의 배경은 무엇인가? 누가 이 구조에서 이득을 보고, 누가 배제되는가? 이는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말한 ‘비판적 의식(critical consciousness)’과 연결된다. 즉,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를 들여다보고 바꿔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예컨대, 젠더 문제나 기후 위기에 대한 단편적 정보 전달을 넘어서, 그것이 구조적 불평등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글로벌 러닝은 결국 앎에서 실천으로, 의식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배움이다.
정체성과 책임은 ‘연결’을 통해 만들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정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다시 쓰인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하나됨’을 강조해 왔다. ‘단일민족’, ‘동질사회’, ‘공동체의식’ 같은 단어들은 교육을 통해 내면화되었고, 그 결과 정체성은 종종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유지되었다. 다문화 가정 청소년, 이주노동자, 난민, 젠더 소수자 등은 그 경계 밖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글로벌 러닝은 정체성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유동적인 구조로 본다. 내가 누구인지는 나 혼자 정할 수 없으며, 타인과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인식하는 순간, 정체성은 새로운 책임의 지평으로 확장된다. 그 책임은 단지 가족이나 국가, 지역사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구공동체 전체에 대한 윤리적 태도로 이어진다.
글로벌 러닝은 세계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세계는 추상적인 ‘지구’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마을과 학교, 도시와 연결된 구체적인 세계다. 다시 말해, 글로벌 러너는 ‘글로벌’한 문제를 ‘로컬’한 맥락에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보자. 기후위기 수업에서 단순히 탄소배출량 수치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기후변화를 체감하고, 그것이 세계 곳곳의 가뭄이나 난민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혹은 지역의 어르신과 인터뷰를 통해 세대 간 기후 감수성을 비교해보고, 해외 청년들과 온라인 토론을 통해 각국의 대응 방안을 나누는 경험도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삶의 맥락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세계시민성(global citizenship)’의 핵심이다.
대학, 다시 ‘배움의 의미’를 묻다
대학은 더 이상 취업을 위한 ‘스펙 공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글로벌 러닝은 대학이 다시금 ‘배움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만든다. 학생이 세계와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어떤 문제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문제를 마주하며 살아갈지를 중심에 놓는 것이다. 이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성찰과 실천의 과정이다. 한국의 대학들도 점점 더 국제화, ESG, 사회적 가치 실현 같은 화두를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표어에 그친다면, 교육은 방향을 잃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학 자체가 글로벌 러너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즉, 지역 문제를 세계적 관점으로, 세계 문제를 지역적 실천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지식생산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선을 긋고 살아간다. ‘이과’와 ‘문과’, ‘정상’과 ‘비정상’, ‘주류’와 ‘비주류’, ‘우리’와 ‘그들’—이러한 이분법은 학습과 사고를 단순화시키지만, 동시에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마비시킨다. 글로벌 러닝은 이러한 피로한 이분법을 해체하고, 다양한 맥락과 관점을 넘나드는 유연한 사고력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교육은 학생들에게 ‘이해의 거리두기’를 가르쳐야 한다. 모든 것에 대해 즉각 반응하고 판단하기보다,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고, 연결의 맥락을 상상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이러한 감각은 디지털 공간에서도 중요하다. 혐오와 분노의 알고리즘에 휘둘리기보다, 정보의 출처를 비판적으로 읽고, 서로 다른 진실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글로벌 러너란 누구인가? 그는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글로벌 러너는, 세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연결을 사유하고, 책임을 감각하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태도는 특정한 직업이나 전공, 연령에 국한되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시니어도, 이주민도, 청년 실업자도, 농촌 교사도 글로벌 러너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태도다.
교육은 다시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는 지식보다 더 근본적인 배움이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갈등을 견디고, 책임을 나누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이 배움은 단절된 사회를 치유하고, 연결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전쟁과 혐오의 확산은 모두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세계’가 만든 결과다. 그에 맞서야 하는 교육은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 교육은 다시, 용기 있게 선을 넘어야 한다. 차이를 구분하기보다 이해하고, 벽을 세우기보다 다리를 놓는 방식으로 말이다.
글로벌 러닝은 그 다리를 만드는 교육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그 다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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